이경우 서울신문 어문팀 차장·한국어문기자협회장


‘몇 년 전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학술회의에서 세계 공용 문자로 쓰이면 좋겠다고 선정한 글자가 무엇일까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을 기준으로 가장 우수한 글자로 뽑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 문자가 없는 나라들에게 국제연합(UN)이 제공하는 문자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바로 한글입니다.’

2010년부터 사용되는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도덕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6월 해당 페이지를 다시 집필해 일선 학교에 배포했다.

세계 공용 문자에 관한 내용은 인터넷에는 떠돌지만 실체가 없었다. 옥스퍼드대학에서도 문자를 대상으로 순위를 매긴 사실이 없었다. 유엔이 한글을 문자 없는 나라에 제공한다는 내용 또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글의 우수성을 지나치게 찬양하다 부풀려진 결과들이 아닌가 싶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유의 내용은 언론에도 등장했다. 한글을 칭찬하면서 한글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자라고 심심치 않게 밝히기도 한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세계적인 언어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현존하는 언어들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유용한 문자로 인정하고 있는 한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글자, 이제 세계인의 것이기도 한 한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글의 우수성은 정보화 시대에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유네스코는 1997년 10월 1일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책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정한 것이다. 한글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도 아니고, 세계기록유산도 아니다.

앞의 첫 번째 기사 문장에는 ‘현존하는 언어들 가운데 … 한글’이라고 돼 있다. ‘한글’을 ‘문자’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 혼동해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한글’을 ‘언어’ 즉 ‘우리말’로 착각하고 사용하는 예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한글이 국제특허협력조약(PCT)의 국제 공식어로 채택됐고…” 한글은 문자이니 절대 국제 공식어가 될수 없다. ‘한국어’ 혹은 ‘우리말’이어야 했는데 ‘한글’이라고 잘못 표현했다. 2007년 제43차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총회는 ‘한국어’를 국제 특허협력조약의 국제 공식어로 채택했다. 다음 예에서도 ‘한글’은 ‘우리말’의 의미로 사용하고 말았다.

“외래어나 외국어 남용이 가장 심한 곳은 공교롭게도 한글 사용을 바르게 선도하고 이를 실천해야할 ‘방송사 등 언론기관’들이다.” 외국어 남용 얘기만 나오면 바로 ‘한글’과 연결하는 게 다반사다. 그러고 한글을 바르게 사용하자고 한다. 외래어와 외국어 남용은 어휘의 문제이지 문자와는 관련이 없다. 한글을 바르지 않게 사용한다는 말은 문자를 변형해 쓴다는 뜻이 된다.

“명동 등 주요 관광지에 한글과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4개 국어로 표기된 관광안내판을 설치했다.”,“영어 원문과 함께 한글 번역 버전도 수록하고 있다.”한글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다른 외국어와 함께 하나의 언어로 표현했다. 한글을 국어라고 했다. 한글 번역이라고 했다. ‘한국어’ 혹은 ‘우리말’이 와야 할 자리에 ‘한글’이 오곤 한다. 한글은 문자라는 것을 다시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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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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