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로서 나는 영상언어보다 활자 언어에 더 깊은 애정과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다. 나는 영화를 즐겨 보면서도 속으로는 영상 언어의 부박함을 경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인터넷 문명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인터넷은 박식하지만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는 멍청한 신’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에 환호작약한다.

책 읽어주는 남자의 직업병






박해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hhpark@chosun.com


영화 ‘더 리더’는 오래간만에 만난 수작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 소설이 요즘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을 보면, 이 영화의 울림이 꽤 깊고 멀리 퍼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며칠 전 나는 소설가 신경숙씨와 함께 경북 문경에서 열리는 낭독회에 가던 중 차안에서 영화 ‘더 리더’ 얘기를 주고받았다. “영화는 아주 좋았지만, 소설이 더 좋은 것 같다”라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했다.
 물론 영화와 소설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 숱한 영화들이 원작과 전혀 다른 작품으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창동의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유괴당한 아이의 엄마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영화의 결말과는 달리, 신의 섭리를 거부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 원작 소설의 모티브나 상황 설정을 차용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를 창작한 영화도 많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 최대 수상작인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원작 소설인 ‘Q&A’의 골격을 빌렸을 뿐이다. 스토리와 주요 사건, 인물의 관계 등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분들에게 원작을 꼭 읽어보라고 권한다.
 그런데 영화 ‘더 리더’는 원작 소설에 매우 충실한 편이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있기-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이라는 이야기는 영화나 소설 어느 쪽이든 똑같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책의 묵시적 의미가 스크린에서는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가령, 영화에서 남자가 교도소에 수감된 여자를 위해 책을 녹음해 보내줄 때 처음에 고른 책이 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였을까. 물론 따질 필요도 없는 질문이지만, 원작 소설의 정답에는 남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영화에서 ‘오디세이’는 귀향의 이야기로 소개된다. 하지만 소설에서 법률가인 남자는 법률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고대의 서사시를 인용한다.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결코 발을 두 번 담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귀향을 믿겠는가.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것이다. ‘오디세이’는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의 이야기다. 법률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흡사 니체의 영원회귀를 연상케 하는 이런 사변적인 넋두리가 영화에서 표현되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영화 예술의 특성에 무지한 소치임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문학과 출판 분야를 오랫동안 담당하니 활자 중독이란 직업병을 앓고 있는 ‘책 읽어주는 남자’ 로서 나는 영상언어보다 활자 언어에 더 깊은 애정과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다. 특히 영화 기자가 문화부에서 문학 기자 보다 더 선망하는 직종이 된 세태의 변화 앞에서 쇠락의 서글픔을 애통해하다가 생긴 울화병의 후유증일 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를 즐겨 보면서도 속으로는 영상 언어의 부박함을 경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인터넷 문명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나도 하루에 상당한 시간을 인터넷 접속에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은 박식하지만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는 멍청한 신(神)’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에 환호작약한다. 에코의 말을 서평 기사에 인용했다가 ‘집단 지성’을 신봉하는 한 박식한 네티즌에게서 신랄하게 조롱당한 적이 있다. 인터넷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를 주도할 때였는데, 무모하게도 인터넷을 멍청하다고 한 나의 우둔함 때문에 자초한 필화였다.
 하지만 인터넷의 집단 지성이 갖춰야 할 ‘비판 지성’은 책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시대의 숱한 현자(賢者)들의 말씀에 나는 안도한다. 때때로 인간은 영화와 인터넷 문명에서 눈을 뗄 필요가 있다. 상징적으로 ‘영상 문맹’이 될 때, 우리는 책에 숨은 길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될 지도 모른다. ‘신은 내게 책과 어둠을 주었다’고 했던 맹인 작가 보르헤스가 말년에는 남이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주라는 거대한 도서관 내부를 산책했듯이.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5월호 에세이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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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deira plastica 2012.01.20 0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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