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방송사는 올봄 프로그램 개편을 기해 소위 ‘몸값이 비싼’ 프리랜서 MC 대신 자사 아나운서를 대거 투입했다.  아나운서실 내부에서조차 이번처럼 아나운서들이 골고루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가진 적은 없었다는 자평이 나올 정도라고 하니, 당분간 아나운서들이 프리랜서를 선언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사람들은 아나운서들이 훈련을 통해 습득한 단정한 언어 구사력이 정형화된 진행을 낳는다는 편견을 좀처럼 지우려 하지 않는다. 아나운서가 다름 아닌 바른 언어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러하기에 아나운서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정체성 혼란의 시기에 처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나테이너’의 전성시대
아나운서 본격 활용의 배경과 평가 

오미영 경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해 가을부터 조짐을 보여 온 외부 전문 MC 교체 바람이 확실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각 방송사는 올봄 프로그램 개편을 기해 소위 ‘몸값이 비싼’ 프리랜서 MC 대신 자사 아나운서를 대거 투입했다. 이미 지난해 11월 가을 개편에서 외부 MC 11명을 내부 인력으로 대거 교체, 총 14개 프로그램에 17명의 아나운서를 진행자로 투입한 바 있는 KBS는 이번 봄 개편에서 아나운서의 프로그램 참여율을 역대 최고로 높였다. 총 68명의 아나운서가 78개 프로그램에 참여, 내부 진행 인력 참여율이 57%에서 60%로 상승한 것이다. KBS만큼 규모가 크진 않지만 MBC와 SBS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시청자와 호흡해온 유명 MC들까지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경기 침체로 인한 방송사의 경영 악화가 주된 이유라지만, 10년 이상 한 프로그램을 지켜온 장수 MC들마저 하루아침에 줄줄이 마이크를 내려놓고 떠나자 섭섭하다는 시청자 반응이 뒤따랐다.

프리 선언은 미친 짓이다

판도 뒤바뀐 아나운서계

 지상파 방송사들이 손쉬운 제작비 절감 대책의 하나로 외부 방송인 퇴출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자 프리랜서 전문 MC들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은 개그맨 출신 MC들이 장악하고, 그 밖의 프로그램은 자사 아나운서들이 도맡다시피 한 현실에서 전문 MC들이 설 땅은 이제 케이블방송 정도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방송사 긴축 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된 아나운서들은 연예인 MC와 전문 MC 틈새에서 위축되었던 위상을 극복하고 도약을 준비 중이다. 과거에는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로 성공하기 위해 프리랜서 전업을 고민하는 아나운서도 있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몇몇을 제외한 웬만한 예능 프로그램에 아나운서들이 투입되어 끼와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나운서실 내부에서조차 이번처럼 아나운서들이 골고루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가진 적은 없었다는 자평이 나올 정도라고 하니, 당분간 아나운서들이 프리랜서를 선언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배경이야 어떻든 한동안 방송 현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아나운서들이 프로그램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크다. 높은 경쟁률을 거쳐 선발된 아나운서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것이 그간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스타는 만들어진다”는 방송가의 법칙을 떠올린다면 아나운서들에게 기회가 확대된 만큼 스타가 출현할 가능성도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나운서로서 스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이러한 질문은 엄숙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적인 아나운서 상을 떠올릴 때 어색한 것이 된다. 실제로 불과 몇 년 전 노현정·강수정 같은 여자 아나운서들이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각광받기 전까지는 아나운서와 대중적 인기는 다소 거리감이 있거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중들도 모름지기 아나운서는 인기쯤에는 초연한 존재일 거라고 인식해 왔다. 그러나 그즈음을 기해 교양과 예능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방송인을 뜻하는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연예인 자질이 가미된 아나운서 상이 새로운 스타상으로 떠오르면서, 이를 추구하는 아나운서들이 자연스럽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긴 요즘 방송가에는 ‘~테이너’ 바람이 워낙 거세다. 전통적인 장르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프로그램에 예능·오락 요소가 가미되는 제작 추세를 생각하면 ‘아나테이너’의 등장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은 모든 것을 쇼비즈니스화한다”는 닐 포스트만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진지한 TV’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된 터에 아나운서들만 이러한 흐름을 비껴가거나 홀로 진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나운서 입장에서 보자면 ‘아나테이너’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치열한 생존 방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방송 제작의 주도권,
아나운서에게 되돌아 갈까

 시청자 사이에 방송에 대한 신비감이 존재했던 초창기 시절, 아나운서는 모든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자 얼굴로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아나운서는 이 시절 방송국 내에서 유일하게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특권층’으로 황금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점차 프로그램 제작 기법이 발달하고 전문화되면서 진행자인 아나운서는 제작 의도를 충실히 대변하고 반영해야 하는 수동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90년대 이후 방송사 간 경쟁 체제가 심화되고 제작의 효율성이 중시되면서 프로그램에 임하는 진행자에게는 보다 밀도 있고 열정적인 참여 자세가 요구되었으나, 아나운서 조직이 그러한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면서 제작진의 불만을 샀다. 일반적으로 PD는 자신이 맡고 있는 프로그램 하나에 매달려 일하는 데 비해 아나운서의 근무 방식은 경우에 따라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맡으면서 아나운서 조직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는 필수 방송 업무(예컨대 라디오 뉴스, 공지사항 등)를 할당받는 형태이다. 자연히 개별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다. 이에 따른 제작진의 반응은 외부 전문 방송인 기용이라는 현실적 위협으로 나타났고, 그 이후 특화된 오락 영역에서의 연예인 MC 영입까지 보태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구조적으로 보아 아나운서 조직이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한 아나운서들이 주도권을 회복하기가 매우 불리한 환경으로 변모되어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방송사 경영 수지 악화로 인한 외부 방송인 퇴출은 위기감 속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아나운서들에게 예기치 못한 반전의 기회가 된 셈이다.

스타가 되고픈 젊은 아나운서,
기회의 땅이 열렸다

물론 이러한 반전의 배경에는 과거 전형적인 아나운서 이미지를 탈피, 개인기에 능하고 소위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아나운서들의 ‘반란’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나운서의 모습을 파격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흥밋거리로 만들어낸 TV와 이를 놓칠세라 재빨리 기사화해 새로운 뉴스 소비 욕구를 생산해낸 미디어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인터넷의 지칠 줄 모르는 연성 뉴스 소비 성향은 본격적인 ‘아나테이너’ 시대 개막을 부채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 시대 미디어 간 무한 경쟁이 촉발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 대상을 찾아야 하는 연성 뉴스가 양산되었고, 그 가운데 새롭게 주목 받은 대상이 아나운서 집단이다. 아나운서 관련 뉴스는 이미 시시콜콜한 사생활이 많이 노출되어 염증을 유발하는 연예인 뉴스를 대신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체재가 되었다. 그 결과 최근 아나운서 관련 뉴스는 기존의 연예인 관련 뉴스를 답습하는 형태로 각 매체에서 소개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아나운서들이 방송 현장에 전면 배치되었다. 아나운서들은 과연 제2의 황금기를 구가할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좋든 싫든 성공적인 ‘아나테이너’의 정착 여부에 달려 있다. 연예오락 프로그램이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 방송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운서들이 과연 시청률로 입증되는 흥행성에서 경쟁력을 지니는가 하는 부분은 여전히 미지수다. 이번 개편의 교체 바람 속에서도 시청률 상위를 기록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연예인 MC들이 거의 유임된 것은 이러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난해 가을 개편에 투입된 아나운서들 가운데에는 “연예인 진행자와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거나 “외부 전문 MC 또는 연예인 MC와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을 얻은 경우도 있기에, 아나운서의 프로그램 전면 투입을 놓고 우려 섞인 일부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시청자 시선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매력이나 개성을 발휘하는 아나운서가 부족하지 않으냐는 지적이다.

“연예인 MC와 조화 안된다”
우려 섞인 비판도 나와

 하지만 이러한 우려와 지적은 상당 부분 연예인 MC를 최고의 방송 모델로 삼는 고정관념에서 출발한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른 언어를 사용하면 재미있게 진행할 수 없다는 어이없는 고정관념과 다름없다. 사람들은 아나운서들이 훈련을 통해 습득한 단정한 언어 구사력이 정형화된 진행을 낳는다는 편견을 좀처럼 지우려 하지 않는다. 아나운서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벗어나기 힘든 딜레마이다. 아나운서가 다름 아닌 바른 언어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러하기에 아나운서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정체성 혼란의 시기에 처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걱정되는 것은 모든 것이 흥행 위주로 평가되는 방송 현실 속에서 자칫 ‘아나테이너’로서의 성공 욕심에 아나운서임을 포기하는 아나운서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나운서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아나테이너’라는 이름 또한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 될 거란 얘기다. 방송사 긴축 정책 덕분에 아나운서들이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지만 그 이면이 결코 순탄해 보이는 것만은 아닌 것은 그 때문이다. 흔히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만 아나운서에게 기회는 위기가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과연 아나운서들에게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새로운 아나운서 상을 정립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할’ 그들의 향방이 지금 펼쳐져 있는 셈이다.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6월호 언론현장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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