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티효씨를 고향에 보내지 않으려는 시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우선은 이 과정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기로 했다. 후에 보는 시청자들이 알아서 판단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결국 프로그램을 위해 직접 나서서 시어머니를 설득해야 했다. 겨우 승낙을 받고 나니 또 다른 복병이 발목을 잡았다.

베트남에 도착한 다음날, 호찌민 병원에서 확인한 엄마인 더티빈 씨의 병환 생각보다 깊었다. 엄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모녀는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가 이렇게 아픈 줄 몰랐어요. 엄마 늦게 와서 죄송해요.”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베트남 신부 전티효, 전주를 울린 사연은?

방송통신위원회 선정,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전주방송 특집다큐 2부작 ‘전티효 이야기’

정한  전주방송 편성제작2팀장



전티효,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6월이었다. 정규 프로그램으로 제작하고 있는 ‘피우자 민들레’(2006년 7월부터 매주 화요일 방송되고 있는 이주여성 대상 정규 프로그램으로 지역방송에서는 유일하게 매주 제작되고 있음)의 다음 출연자를 찾던 중 만나게 된 그녀는 묻는 말 외에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눈매가 매섭고 감정의 기복도 심해 보였다. 여러 해 동안 이주여성을 만나온 나로서는 직감상 시어머니 때문에 정작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첫날은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가 암이라니’
만삭의 배를 안고 눈물만 뚝뚝


며칠 후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았다. 남산만한 배를 앞세우며 전티효 씨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현재 전티효 씨에게는 두 딸이 있지만 시어머니는 남편이 3대 독자라며 아들을 낳아 줄 것을 강요해 왔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 고향인 베트남에서는 친정어머니가 폐암 말기라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당시 전티효 씨는 아들 쌍둥이를 임신한지 9개월째인 만삭의 몸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 쌍둥이를 볼 기대로 연신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가슴이 컥컥 막혔다.
전라북도는 다른 도에 비해 농촌이 많고 그중에는 빈민도 많다. 그리고 가난한 농촌 남성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결혼할 기회가 적다. 반면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아시아 지역의 빈곤층 여성들은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전티효 씨처럼 한국행을 택한다. 한국의 농촌문제와 아시아 여성의 빈곤함이 결합해 지난 10여 년간 줄곧 그녀들은 농촌으로 혹은 도시 공단으로 시집을 왔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다문화가정의 실태다. 현재 전라북도에만 국제결혼 가정이 5,000가구를 넘어섰다. 6남매 중 장녀인 전티효, 그녀 역시 부푼 꿈을 안고 한국행을 택했으리라. 
그날 이후 나는 밤마다 서성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세 번째 임신인 전티효 씨는 쌍둥이 출산을 위해서는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데 남편의 직업이 그날 벌어 그날 사는 일당 잡부인지라 수술비며 병원비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또 친정어머니를 임종 전에 만나게 해야 했다.’

아들이 뭐길래!
출산부터 해야 보내주겠다

일단 출산이 급하니 병원부터 찾기로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무료로 수술할 병원과 의사를 지인의 도움으로 찾게 되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 싶어서 이후 수시로 전티효 씨 집을 들락날락하며 친해지는 과정을 가졌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산일인 7월 21일, 쌍둥이의 출산 과정을  카메라에 여과 없이 담는 데 동의했다. 행여 친정어머니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대비해 기록해 두기로 한 것이다.

1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그토록 시어머니가 원하던 아들 둘을 세상에 내놓았다. 다행히 산모나 아이들 모두 건강했다. 이후 회복실로 옮겨진 후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가, 고생했다. 내 소원 이루어줘서”라고 말했다. 이내 며느리 전티효 씨는 고개를 돌려 그간 참았던 눈물을 서럽게 흘리며 베갯잇을 적셨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친정어머니일 것 같아 나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전티효 씨는 폐암 말기의 친정어머니에게 “엄마, 방금 아들 쌍둥이 낳았어요! 지금 이 순간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친정어머니는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울면 산모 건강에 안 좋아”라고 딸을 위로했다. 딸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엄마, 제발 건강하셔야 해요. 제가 임신하는 바람에 엄마 아프다는 소식 듣고도 갈 수가 없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계셔야 해요.”
회사 사정상 12월이 되서야 전티효 씨와 쌍둥이 중 막내를 데리고 베트남 친정집으로 떠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가더라도 아이는 두고 혼자 가라는 것. 이유인즉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다. 며칠간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삿대질에 고성이 오가는 싸움을 벌였다.
나는 정말로 시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우선은 이 과정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기로 했다. 후에 보는 시청자들이 알아서 판단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결국 프로그램을 위해 직접 나서서 시어머니를 설득해야 했다. 겨우 승낙을 받고 나니 웬걸 또 다른 복병이 발목을 잡는다. “저 쌍둥이 둘 다 데려가지 않으면 안 갈 거예요.” 전티효 씨가 욕심을 부린다. 출국을 이틀 남겨 두고 이럴 수가. 프로그램을 위해서라면 아이를 둘 다 데려가서는 안됐다. 아이들 신경 쓰느라 전티효 씨의 감정선이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결국엔 처음이자 마지막인 쌍둥이 손자 녀석들을 전티효 씨의 친정엄마 품에 안겨 드리기로 결론을 냈다. 부랴부랴 군산시청에 전화 걸어 다짜고짜 사정 얘기를 하고 속히 여권 발급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12월 4일 아침, 정신없이 베트남 호찌민행 비행기를 겨우 타게 되었다.

밤새워 우는 모녀 곁
스태프는 달랑 PD 한 명

지역방송의 제작 여건상 촬영 장비는 6㎜ 카메라에 스태프라곤 달랑 나 하나. 지난 2008년 한국방송 PD대상 작품상과 민영방송대상을 수상한 ‘내 이름은 메셀’ 편을 제작 할때도 역시 홀로였기 때문에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쨌든 비행기는 전티효의 고향으로 날고 있었다.
이윽고 고향 붕타우의 바꾸마을 어귀에서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걷는다. 점점 빨리. 발길이 바쁘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엄마를 껴안고 전티효는 손까지 떨어 가며 한없이 울었다. 2시간여 끌어안고 울던 모녀를 뒤로하고 나는 하얀 담배 연기를 품어내며 그 연기가 너무 매워 나 또한 눈물을 훔쳤다. 얼마나 사무치게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엄마에게 미안했을까?
그렇게 첫날이 저물어 갔다. 다음날 새벽 4시 서둘러 호찌민 병원으로 전티효 씨의 엄마인 더티빈 씨의 병환을 확인해 보러 길을 나섰다. 뜻밖에 엄마의 병환은 생각보다 깊었고, 인터뷰 결과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전티효 씨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모녀는 부둥켜안고 서로가 대성통곡을 하였다. “엄마가 이렇게 아픈 줄 몰랐어요. 엄마 늦게 와서 죄송해요.”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엄마, 안녕!
“어서 가라. 나는 살만큼 살았다”

며칠 후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평소 모녀가 자주 가던 곳으로 나들이를 가자고. 아마도 평생 마지막 추억이 될 것 같아 떠나기 전 엄마와의 마지막 여행을 주선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모녀는 곱디고운 아오자이를 차려입고 근처 바닷가를 걸었다.

“엄마 어릴 적 우리 가족이 이곳에 와서 놀던 때가 생각나요. 그때 우리 너무 행복 했어요.”
“지금 내가 걷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네가 옆에 있으니 너무너무 행복해.”

모녀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엄마가 말했다. “다른 자식들은 다 다녀갔는데 네가 오지 않아 여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이제 나는 소원을 이뤘다. 편히 갈 수 있겠어.”
시간은 어찌도 빨리 흐르던지 약속된 일주일이 흐르고 한국으로 되돌아오던 날. 침묵속에서  전티효 씨의 아버지가 먼저 “어서 가라”고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는 전티효 씨는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엉엉 울면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순간 시어머니가 고향 방문을 결사반대했던 진짜 이유를 나는 알게 되었다.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두고 마음이 아파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한동안 부둥켜안고 울던 엄마는 “한국에 너의 가족이 있으니 돌아가라,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전티효 씨는 어쩌면 다시 못 볼 엄마와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이후 전티효 씨의 이야기는 지난 1월 말과 2월 초에 특집 2부작으로 제작, 방송되었다. 시청률 8.4%라는 휴먼 다큐로서는 놀라운 시청률과 함께 지역 사회에 이주여성을 향한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
지난 3월 7일 오후 베트남 현지 시간으로 5시 30분쯤(모녀 상봉 88일 후). 전티효 씨의 어머니 더티빈 씨가 지병인 폐암으로 돌아가셨음을 연락 받았다 전티효씨의 엄마 더티빈씨는 임종 전 자신의 가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 준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6월호 제작기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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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ck de madeira 2012.02.17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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