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같은뉴스 다른생각15
 ‘넛지 저널리즘’은 안 되는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소변기에 파리 한 마리를 그려 넣었더니, 변기 밖으로 새는 소변량의 80%가 줄어들었다. ‘조준사격’의 재미 때문이었으리라.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미국 텍사스 주는 고속도로에 버려지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요란한 광고 캠페인을 벌였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않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쓰레기를 버리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발상의 전환을 했다. 인기 풋볼 팀인 댈러스 카우보이의 선수들을 참여시켜 그들이 쓰레기를 줍고 맨손으로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며 “텍사스를 더럽히지 마!(Don’t mess with Texas!)”라고 으르렁대는 텔레비전 광고를 제작했다. 캠페인 1년 만에 쓰레기는 29%나 줄었고, 6년 후에는 72%나 감소했다. 텍사스 주민의 95%가 이 표어를 알고 있으며, 2006년에는 이 표어가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표어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뉴욕시 매디슨 거리를 행진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Richard H. Thaler)와 법률가 캐스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이 쓴 ‘넛지 :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안진환 옮김, 리더스북, 2009)에 나오는 이야기다. 넛지(nudge)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는 뜻이다. 탈러와 선스타인은 이 단어를 격상시켜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라는 정의를 새로 내렸다. 그들이 역설하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의 간판 상품으로 만든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에 시비를 거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이들은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는 좌파적인 것도 우파적인 것도 아니며, 민주당적인 것도 공화당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역설한다. 넛지는 초당파적이라는 것이다.
넛지는 구체적으로 선택설계에 적용될 수 있다. 이 일을 하는 ‘선택 설계자(choice architect)’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배경이 되는 ‘정황이나 맥락’을 만드는 사람이다. 투표용지를 디자인하는 사람, 환자에게 선택 가능한 다양한 치료법들을 설명해 줘야 하는 의사, 직원들이 회사의 의료보험 플랜에 등록할 때 서류 양식을 만드는 사람, 자녀에게 선택 가능한 교육 방식들을 설명해 주는 부모, 물건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세일즈맨 등이 바로 선택설계자들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하고 작은 요소라 해도 사람들의 행동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넛지는 선택 설계자가 취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금지하거나 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넛지 형태의 간섭은 쉽게 피할 수 있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 데 비용도 적게 들어야 한다. 넛지는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다. 과일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는 것은 넛지다. 그러나 정크푸드를 금지하는 것은 넛지가 아니다.”


넛지의 본질은 엔터테인먼트

이걸 행동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실은 커뮤니케이션학이다. ‘설득’ 기술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이미 넛지가 오래전부터 사용돼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광고 전문가들은 행동경제학에 대해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다. 무슨 옛날이야기를 그렇게 새로운 것처럼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을 비웃을 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선 오래된 이야기일망정 넛지의 이치를 정부·공공기관·시민단체 등의 정책에 고려하는 건 별개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정부부처·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들이 애용하는 플래카드는 노골적인 계몽과 훈계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않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강조한 텍사스 주의 과오를 교정할 뜻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눈을 돌려 우리의 저널리즘을 살펴보면 이 또한 애국(愛國)·구국(救國)의 비분강개형 메시지가 철철 흘러넘친다는 걸 알 수 있다. 인터넷은 가벼운 데다 심각한 것마저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만드는 일에 미쳐 있는데, 전통 저널리즘은 늘 진지하고 심각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넛지형 메시지는 ‘저널리즘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엔터테인먼트가 점령하지 않은 영역이 없다. 인포테인먼트, 다큐테인먼트, 마켓테인먼트, 이터테인먼트, 에듀테인먼트 등의 경우처럼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가 수많은 합성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그 생생한 증거다. 워크테인먼트, 폴리테인먼트, 처치테인먼트의 경우처럼 노동·정치·종교마저 엔터테인먼트를 피해 가진 못한다. 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는다고 해서 무슨 놀자판을 만들자는 게 아니다. 넛지의 본질이 엔터테인먼트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우리의 ‘계몽 저널리즘’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래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좋거니와 아름다운 일이긴 한데, 문제는 저널리즘의 경쟁 상대다. 인류 역사 이래 최고조에 이른 각종 엔터테인먼트와 경쟁해야 한다. 신문지국 차원의 혈투를 벌일 때가 아니다. 정녕 ‘넛지 저널리즘’은 안 되는 걸까?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6월호 미디어포럼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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