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도 사람들이, 서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산다는 것, 지역에도 서울 못지않은 중요한 현안이 있다는 것, 따라서 지역 기자는 지역 현안이라는 프레임에 충실하되 그것에 매몰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 길지 않은 이곳 생활에서 받은 충격입니다.


환상의 섬, 제주에서 기자하기








변진석 KBS 제주총국 사회부 기자

 

#환상 속의 그대
제주도라고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짝사랑하는 그녀와 같이 걷기만 해도 저절로
무슨 일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밤바다, 입안에서 후다닥 거릴 것만 같은 횟감, 백 원짜리를 던지면 유로와 달러를 함께 든 산신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한라산 백록담…. 대충 이런 것들이겠죠?
그런 곳에서 기자 생활을 한다고 하면 그건 또 어떤 느낌이십니까? 아마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넌 인마 진짜 운 좋은 놈이야’. 이 정도겠죠. 근데 CSI 보면 다 나오잖아요. 지상낙원 마이애미에서도 사람들은 아옹다옹하면서 산다는 거.
지역 순환 근무 차 내려와 이제 백일을 갓 넘긴 저의 제주 생활을 지면을 빌려 잠시 돌아볼까 합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퇴근이 가까워 오면서 뭔가 가슴에 짜증이 직구로 작렬할 때, 정말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떠나버릴 수 있는 곳이 제주입니다. 일반 직장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자’마저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주입니다 여러분!
KBS 제주총국이 자리 잡은 시내 한가운데에서 한라산 1100고지까지는 차로 30여 분. 그나마 10분이면 시내에서 한라산 원시림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1100고지에 오르면 저 멀리 백록담 아래로 이런저런 오름과 신선한 공기, 새소리, 자연 발효식 화장실이 저를 반겨 줍니다. 1100고지 습지대를 걷다 보면 어느새 가슴속에 차올랐던 응어리들도 모두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산이 먹먹해지면 바다도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한라산에서 차를 몰고 남원을 지나면 곽지, 이호 등 유명 해수욕장까지 또 30분. 비바람에 파도까지 겹친 날 방파제에 차를 세워 놓고 음악을 틀어 놓으면 태평양 밑바닥부터 쿵쾅거리는 파도 소리에 또 어느새 스트레스 한 바가지를 바다에 풀어 놓게 됩니다. 바다까지 가는 길 동화책 한가운데를 쭉 찢어 세워 놓은 듯한 산간도로의 풍경은 그저 눈이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근무가 없는 날이면 좀 더 멀리까지 가볼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올레길이나 새로 뜨고 있는 숲길. 서귀포 해안과 감귤 밭.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악산이나 북한산의 3분의 1 정도 품만 들여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백록담 등에는 정말이지 우리나라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밖에는 나오지가 않습니다.
다가오는 휴가철, 대통령이 한 펀드는 올랐다는데 내 펀드는 반 토막 그대로고 1,400원 때 사둔 달러가 원통해서 해외여행은 못 가겠다는 분들께 강추합니다. 제주에 오세요. 정말이지 절대, 절대,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곳에 사람이 살았네
여기까지 읽어 보시면 ‘이 자식은 수신료 걷어서 제주에 보냈더니 일은 안 하고 놀기만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럼 일 얘기를 좀 해 볼까요.
저 역시 롯데 자이언츠와 돼지국밥 빼고는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부산 출신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해서 ‘비서울’ 출신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서울에서 단맛, 쓴맛, 신맛, 똥맛 다 보다 보니 어느덧 서울이 마음의 고향이 되고 또 어느새 서울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알게 모르게 ‘오직 서울’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 것 같습니다. 모든 중요한 사안은 서울에서 시작돼 서울에서 끝난다는 생각. 상당 부분 이러한 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지역 특성’이라는 중요한 시각은 알게 모르게 많이 옅어졌던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바라봤던 제주는 그저 아름다운 풍경, 관광지 특유의 후덕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가 봅니다.
그러나 이곳 제주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는 줄이 길었고 초등학생은 물에 빠져 죽고, 아줌마들은 머리채를 잡은 뒤에 소송을 걸고, 아저씨들은 음주운전을 하고 맘에 안 드는 도지사는 주민소환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여기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저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이란 그냥 서울 사람이 주말에 쉬러 가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고 기자를 포함한 서울 사람들은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역에도 사람들이, 서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산다는 것, 지역에도 서울 못지않은 중요한 현안이 있다는 것, 따라서 지역 기자는 지역 현안이라는 프레임에 충실하되 그것에 매몰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 길지 않은 이곳 생활에서 받은 충격입니다. 클럽 하나 없는 이곳에서 홍대 앞 클럽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뉴스를 본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평당 700만 원이, 분양가가 가장 비싼 아파트라는 뉴스를 보는 여기 사람들이 강남 아파트촌을 배경으로 한 온 마이크를 봤을 때 와 닿았을까요? 지역과 서울, 모두 우리 살아가는 한 세상이라는 것, 내년 서울로 돌아갈 때는 한층 성숙한 전국구 선수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7월호 에세이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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