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같은뉴스 다른생각16
전문직 저널리즘의 딜레마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는 한때 언론의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졌다. 전문직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20세기 중반 미국 ‘시카고 트리뷴’지에선 신문 편집의 진실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신문사 편집 담당자들과 영업부서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도 따로 이용하도록 교육을 받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있다(110쪽).
미국 일리노이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로버트 맥체스니의 ‘미디어정책 개혁론’(원제: The Problem of the Media, 오창호·최현철 역, 나남, 2009)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전문직 저널리즘의 한계’는 크게 새로울 건 없지만, 한번쯤 곱씹어 볼 만한 의미는 있을 것 같다. 전문가주의가 오늘날엔 ‘유일한 희망’은 아닐망정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맥체스니는 전문직주의의 세 가지 ‘뿌리 깊은 편향성’을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선별과 연관된 논란을 없애기 위해 공식적인 정보원, 특히 뉴스 가치가 높은 고위직 관리나 유명 공인에 의존하는 편향성이다. 두 번째, 의미로 가득 찬 맥락과 적절한 배경을 제공하는 것은 언론인으로 하여금 확실한 입장에 설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뉴스 인용부호에 의존하면서 맥락화(contextalization)를 회피하는 편향성이다. 세 번째, 소유주와 광고주의 상업적 목적과 거대기업의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가치를 밀수입(密輸入)하는 편향성이다(113~120쪽). 맥체스니는 이런 편향성이 PR 산업의 등장과 급속한 성장을 자극했으며 시민의 ‘정치로부터의 도피’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매끄럽게 처리된 보도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유급의 ‘전문가, 겉으로는 중립적이지만 실제로는 사이비 시민단체, 그리고 가공된 뉴스 이벤트, 능수능란한 PR 대행사들이 뉴스를 그들의 주요 고객인 기업의 요구에 맞춰서 만들 수 있다. … 조사결과 어느 신문이든 뉴스로 나타나는 것 중에 40~70%가 PR 기사였다. … 이들 두 가지 편향성의 결합효과와 정보조작의 현저함은 웅장하지만 비참한 역설을 낳고 있다. 즉 이론상으로는 정치적 참여를 고려해야 할 언론이 정치에서 의미를 벗겨내고, 광범위한 탈정치화를 촉진하는 것이다.”(118~119쪽)
맥체스니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수긍하면서도 한 가지 갖게 되는 의문은 이 모든 문제들이 과연 전문직주의 때문에 빚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전문직 언론시대의 절정은 미국 언론인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추구하는 데 상대적 자율성을 가졌던, 그리고 그들의 기교를 갈고 닦는 데 상당한 자원을 가졌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쳤다”고 말한다(125쪽). 그는 이 시기에 나타나는 전문직주의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다시금 “그러나 언론인들에게 부여한 자율성은 언제나 상대적이었고, 전문직 규약이 진화했던 방식은 민주적인 세력으로서 전문직 언론이 봉사하는 능력에 심각한 제한으로 작용했다”고 했다.(128쪽)

전문직주의의 최대 적은 조로현상

그런데 듣고 보니 좀 이상하다. 문제의 핵심은 ‘전문직주의’가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의 위축 또는 박탈이 아닐까? 즉 언론 기업이 기업은 기업이더라도 일반 기업과는 다르다고 보는 시각에서 허용되었던 상대적 자율성이 그 시각의 와해와 더불어 사라진 것이 비극의 출발이며, 전문직주의는 그런 상황에서 위선적인 자기정당화의 기제가 되고 말았다고 보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전문직주의 이전의 ‘당파 저널리즘’이나 오늘날의 ‘시민 저널리즘’이 전문직주의를 보완할 수는 있어도 대체할 수는 없겠기에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맥체스니가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즉 전문직주의는 상대적 자율성이 보장된다거나 하는 우호적 환경에선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달라진 환경 자체에 도전할 수 있는 저항성은 없거나 약하기 때문에 전문직주의를 탓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언론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대중이 여전히 전문직주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면, 그런 책임 추궁이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모든 전문직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음모”라고 주장했던 조지 버나드 쇼의 시각에 따르자면, 전문직주의는 하루빨리 타파해야 할 제도이자 관행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그게 실천가능한 대안일 리 없잖은가. 인간세계의 딜레마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경우엔 전문직주의보다는 오히려 ‘전문직의 관료화’가 더 큰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나이 40만 넘으면 관리자로 변신하고 또 그렇게 변신하지 않으면 무능한 사람인 양 낙인을 찍는 풍토야말로 전문직주의의 장점뿐만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죽이는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취재·제작 현장에서 머리가 하얀 기자·PD·앵커를 볼 수 있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인가. 현 단계에서 한국형 전문직주의의 최대 적은 조로(早老)가 아닐까.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7월호 미디어포럼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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