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교수는 한 달에 한 번씩 원고를 보내면서 간결한 인사말을 담았다. 게재날짜를 착각했을 때는 “어제 전화주실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큰일 날 뻔…”이라고 고마워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운 건 나였는데 말이다.


장교수 영전에 올린 감사패






 


                                                            송상근  동아일보 오피니언팀장

 

“이학수가 누구야? 난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그렇게 대단한 분이에요?” 모두 어리둥절했다.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 겸 삼성전자 부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동업자라는 소리까지 듣던 ‘천하의 이학수’를 모른다니 믿기지 않았다.
“아니~, 학교일에 도움이 된다면서 총장님이 같이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총장님과 가서 만날 때 내 책에 사인을 해서 드렸지. 그렇게 대단한 분이에요?” 우리는 웃으면서 말씀드렸다. 삼성의 실세 중 실세다, 삼성에서는 모든 길이 이학수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난 그런 건 몰라. 근데, 근데, 다음날 말이야, 이학수란 분이 비서를 시켜서 디카를 보냈어. 아주 예쁜 걸로. 기분이 아주 좋았지 뭐야. 근데~ 그렇게 대단한 분이에요?” 디카가 예쁘다며 손뼉 치며 좋아하는 장영희 교수를 보면서 우리는 배꼽을 잡고 다시 웃었다. 2006년 12월 26일 이화여대 후문 쪽 레스토랑에서 장 교수 제자인 동아일보 후배들과 같이 점심을 먹을 때 일이다.
장 교수는 그해 7월부터 동아일보 고정칼럼인 ‘동아광장’ 필진이 됐다. 한 달에 한 번씩 원고를 보내면서 간결한 인사말을 담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제 말씀드린 것과 내용은 비슷하지만 제목은 바꿨는데 괜찮겠지요, ‘아줌마의 힘’과 ‘독서의 힘’ 중 무엇을 쓸까 하다가 아줌마 힘은 유사한 글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쓴 것 같아 독서의 힘에 초점 맞추었습니다. … 원고가 좀 부실하다고 느낄 때는 “더 붙잡고 싶지만 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서… ㅠ.ㅠ”라고 미안해했고, 게재날짜를 착각했을 때는 “솔직히 날짜가 바뀌어서 달력 표시를 안 해 놓아 어제 전화주실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큰일 날 뻔…”이라고 고마워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운 건 나였는데 말이다.
장 교수의 글은 항상 따뜻했다. 사람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담백하고 맛깔스런 언어로 정리했다. 내 기억에 한 번의 예외가 있다.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라’는 제목(2007년 1월 18일자)이었다. 어느 잡지와 인터뷰를 했는데 ‘신체장애로 천형(天刑)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의 희망의 상징 장영희’이라는 표현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기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난 심히 불쾌했다. 어떻게 감히 남의 삶을 ‘천형’이라고 부르는가. 맞다. 나는 1급 장애인이고, 암 투병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내 삶을 천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내 삶에도 축복은 있다. 첫째 나는 인간이다…둘째, 내 주위에는 늘 좋은 사람만 있다…셋째, 내겐 내가 사랑하는 일이 있다…넷째, 난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 남이 아파하면 나도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아참, 내가 누리는 축복 중에 중요한 걸 하나 빠뜨렸다. ‘동아광장’의 필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한데 이렇게 동아광장에서 독자를 만나니, 누가 뭐래도 내 삶은 ‘천형’은커녕 ‘천혜(天惠)’의 삶이다.”

동아일보는 인기가 많은 장 교수의 글을 계속 싣기로 했다. 첫 6개월이 지나서 나는 “이왕 쓰셨으니 1년은 채우셔야죠”라고 말씀드렸다. 장 교수는 흔쾌히 수락했다. 다시 6개월이 지나자 나는 “연말까지 채우셔야죠”라고 부탁드렸다. 장 교수는 머뭇거리지 않고 받아줬다. 다시 6개월이 지나자 나는 “1년 반에 끝내긴 좀 그러니 2년을 채우셔야죠”라고 요청했다. 장 교수는 군말 없이 응락했다.
다시 6개월이 지나자 나는 “연말까지 채우셔야죠”라는 말을 한 번 더 했다. “아, 그래요. 그럼 더 쓰지요.” 이런 대답을 기다렸는데 반응이 달랐다. “제가요, 하반기부터 안식년을 가려고 해요. 치료도 좀 받아야 하고요…” 미안하다며 다음 기회를 보자는 얘기에 나는 더 권유하지 못했다. 유방암과 척추암에 이어 간암이 찾아온 시점임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장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5월 10일 오전에 보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과 함께 눈이 사무실 책상 한쪽으로 향했다. 칼럼을 새긴 동판이 보였다. ‘동아광장’ 집필을 끝낸 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기념품이었다. 다른 필진에게는 직접 만나서 드리거나 택배로 보내고 딱 하나 남았다. 투병 중이라는 말을 듣고 꼭 찾아가서 전달하겠다고 생각했는데 한두 번 통화하면서 날짜를 못 잡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잊었다.
하루 뒤에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갔다. 분향하고 나서 동판을 가져왔다고 하니까 직접 놓아달라고 유족이 입을 모았다. 영정 아래에 놓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자 오빠라는 분이 다가오더니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동아일보가 참 잘해 주시네요. 영희가 동아일보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 분은 또 “조금 있다가 (동판 방향을) 돌려놓아. 영희가 보도록”이라고 가족에게 얘기했다. 빈소를 나오는데 밤하늘에서 봄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7월호 에세이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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