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같은뉴스 다른생각17
‘정파 저널리즘’의 소통을 위하여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언론계와 정계에 ‘프레임’ 개념을 유행시키는 데에 기여한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의 또 다른 저서 ‘자유전쟁: 자유 개념을 두고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의 대격돌’(나익주 옮김, 프레시안북, 2009)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마지막의 제13장이다. 역설 같지만 이성을 신뢰할 때에 소통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통을 위해 ‘감정’보다는 ‘이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과연 그런가? 소통의 어느 단계에선 그럴지 몰라도 좀 더 깊이 들어간 단계에선 오히려 이성이 소통의 적(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흥미롭지 않은가.

레이코프는 “대부분의 사고는 무의식적이다. 비록 어떤 형태의 이성이 보편적일 수는 있지만, 이성의 많은 부분은 보편적이지 않다. 우리는 프레임과 개념적 은유를 사용해 생각하고, 이것들은 보편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은 마음에 대한 새롭고 반(反)합리주의적인 이 지식을 받아들이고 있다. 합리성은 경계가 지어져 있다. 사고는 프레임과 원형, 은유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전통적 합리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은 이러한 합리성과 관련된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경제적 결정은 주로 무의식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우 다마지우(Antonio Damasio)는 이성이 감정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감정에 의존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뇌졸중이나 뇌 손상으로 인해 감정을 느낄 수 없거나 타인의 감정을 판단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300∼301쪽)

이성적 토론보다 감성적 친교가 효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느낀다. 자신이 감정적 대응을 할 때엔 설사 그것을 멈추진 못할지라도 자신이 감정을 발산하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신념화하진 않는다. 반면 이성은 곧잘 신념의 재료가 된다. 그것이 감정에 의해 추동된 이성일지라도 그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이성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곧잘 자명한 이성에 대해 “이건 상식이다”고 외치지만,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만일 상식을 정의하는 프레임이 사실과 충돌한다면 사실은 무시될 것”이기 때문이다.(301쪽)
미국 뉴욕타임스 2006년 1월 24일자 ‘사이언스 타임스’난엔 “소름 끼치는 일: 분파적 사고는 무의식적이다”라는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에모리대학의 드루 웨스틴(Drew Westin)이 이끄는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대한 보도였다. 레이코프는 이 기사를 소개한 뒤 “인지과학자들에게는 이것이 별로 ‘소름 끼치는 일’은 아니다.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오히려 ‘사이언스 타임스’가 ‘분파적 사고가 무의식적’이라는 것을 ‘소름 끼치는 일’로 여겼다는 점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사고의 무의식적 본성은 지난 30년간의 연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결과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뉴욕타임스의 뉴스팀과 편집팀이 인지과학자들의 이 발견을 과학란에 싣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일까? … 사회과학이나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심지어 마음과 뇌의 가장 초보적인 속성에 대해서조차 거의 배우지 않는다. 정부나 미디어, 두뇌집단, 대학의 공적인 정치 담론은 지금까지 가장 기본적인 사실마저도 구체화하지 못했다. 프레임 형성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한 프레임을 재형성하는 일일 것이다.”(310∼311쪽)

‘생물학 결정론’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생물학 소통 기여론’이다. 즉 우리 인간이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를 인정하고 들어갈 때에 겸손해질 수 있으며, 그럴 때에 비로소 소통 가능성도 열린다는 것이다. 물론 레이코프는 자신이 지지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승리를 위한 조언으로 한 말이기에, 이런 식으로 써먹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겠지만, 소통해서 나쁠 게 무어 있겠는가.
이 원리를 우리의 ‘정파 저널리즘’에 적용한다면,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신문들의 종사자들이 상호 이성적인 토론(실은 이성을 빙자한 감정싸움)보다는 감성적인 친교에 힘쓰는 게 소통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물론 그들 중엔 이미 기존 연고를 매개로 친교를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런 연고를 뛰어넘어 상호 친교 모임을 공식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정례화해 보는 건 어떨까?
책을 읽다가 덜컥 해본 생각이 아니다. 나의 경험담이기도 하다. 독설가로 소문난 논객들이 특정인에겐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호의적 편파성을 보이는 경우들이 많다. 왜 그런가 하고 알아보면, 거의 대부분 사적인 친교 때문이다. 쓴웃음을 지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이건 비판의 엄정성을 해치는 정실주의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앞서 내가 한 제안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엔 도움이 되는 사례일 것이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8월호 미디어포럼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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