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미디어 기획은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다. 혹자는 치밀한 전략과 철저한 준비로 탄생했다고 평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딪치고 절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어느 단계에서 만족하고 멈췄다면 여기까지 발전하지도 못했으리라. 무모하고 용감했기에 오히려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기자들이여, 활자의 구속에서 벗어나라

이학준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미디어전략팀 기자


<편집자주> 이번에는 크로스미디어다. 동영상을 중심으로 하는 멀티미디어 콘텐츠가 급부상하고 있다. 앞으로 ‘펜 기자’라는 단어는 의미를 점점 잃어갈 것이다. 기자가 곧 PD이자 미디어 기획자인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3회에 걸쳐 크로스미디어 시대멀티미디어 기자로 거듭나는 방법을 싣는다. 크로스미디어의 기획은 물론, 제작 실무와 활용방법까지 지면을 통해 알아보자.



활자(活字)는 살아 움직인다. 종이 속에 갇혀 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활자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류의 사랑을 받아온 까닭이다. 뉴미디어가 발전하면서 활자는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만나 종이의 제약을 떨쳤다. 영상을 만나 상상력을 구체화시켰다. 크로스미디어(Cross-media)는 구속을 벗어난 활자의 모습이다.

미디어 빅뱅 시대를 준비한다

조선일보가 2007년 2월 처음 선보인 크로스미디어 기획은 신문, 방송, 인터넷으로 같은 보도물을 동시에 내보내는 뉴스 서비스이다. 신문은 정제된 뉴스와 사진을 게재한다. 인터넷으로는 신문에 누락된 기사를 포함, 데스킹 이전의 기사를 내보낸다. 사진 갤러리를 만들어 현장감을 더하기도 하고 블로그와 연계해 후일담을 소개하기도 한다. 신문 취재와 함께 제작된 방송 다큐멘터리는 지상파, 케이블, DMB 등을 통해 전파된다. ‘아침에 신문으로 본 뉴스를 저녁에 TV로 확인한다’는 표현은 신문과 방송, 인터넷을 결합한 조선일보 크로스미디어 기획을 상징한다.
조선일보는 아시아의 인권 사각지대를 탐사 보도한 ‘Our Asia’ 9부작을 2007년 소개한 이래 ‘세계의 디자인 도시를 가다’(2007), ‘천국의 국경을 넘다’(2008), ‘강군시대’(2008), ‘꿈을 찍는 아이들’(2009) 등 대형 크로스미디어 보도물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2009년 하반기와 2010년 크로스미디어 기획도 대기 중이다. 각 부서 기자들은 케이블TV 혹은 블로그를 활용해 ‘강인선 LIVE’ ‘5분 쿠킹’ ‘이 사람이 사는 법’ ‘여행편지’ ‘스타를 넘어서다’ 등 작은 크로스미디어 보도물을 매주 생산하고 있다.
이 가운데 탈북자 인권을 보도한 ‘천국의 국경을 넘다’는 영국 BBC, 프랑스 CANAL+, 미국 PBS, 독일 ARD, 일본 TBS 등 세계 16개 방송사에 편성된 데 이어 몬테카를로 TV페스티벌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카메라웁스크라 그랑프리, 로리펙 어워드, 아시아인권언론상, 한국기자상, 한국신문상, 삼성언론상 등 13개의 국내외 언론상을 받았다.
명칭은 다르지만 크로스미디어 방식의 보도를 시작했거나 준비 중인 국내 언론사는 여럿이다. 중앙일보의 JMnet 리포트, 동아일보의 크로스미디어, 한겨레신문의 노드 프로젝트 등이 그것이다. 일본 TBS 보도국은 크로스미디어 기획을 배우러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보도의 ‘한류(韓流)’가 만들어진 셈이다.
최근 크로스미디어는 보도뿐 아니라 광고 분야까지 확대되고 있다. 닛케이신문은 광고국 명칭을 크로스미디어국으로 바꿨다.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와 다음은 크로스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광고 수익을 늘리려 애쓰고 있다.
이처럼 우리 곁으로 훌쩍 다가온 것이 크로스미디어다. 글을 쓰는 신문기자들에게 인터넷 뉴스를 기획하고 방송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저 몇몇 선택받은 언론사 기자들만 시도할 수 있는 게 크로스미디어라는 인식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아무 준비 없이 미디어빅뱅 시대를 맞이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시작이 반이다. 막상 도전해 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이 크로스미디어다. 도전 중에 전작을 뛰어넘는 아이디어가 탄생할 수도 있다. ‘크로스미디어의 탄생 과정’을 첫 번째 글로 선택한 이유는 여러 선후배들께 자신감을 드리려 함이다. 좌충우돌 끝에 탄생한 미디어 융합 기획들이 최근 미디어 변화를 이끌어 왔고, 세계 유수의 미디어 회사들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펜기자도 웹기획자 될 수 있다

“제가 편집국에 어떤 누를 끼쳤는지 알고 싶습니다.” 입사 5년차를 맞은 2003년 3월. 편집국장에게 보냈던 이메일은 다소 도전적이었다. 국민일보에 근무하고 있던 필자는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를 거쳐 인터넷뉴스팀에 발령 났다. 대단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취재부서에서 쫓겨난(?) 것일까. 사표를 제출할 생각까지 했다. 국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거세를 당했다거나 내친 것이 아니라 국장에게 ‘잘 보여서 그랬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는 정답이네.” 지금 생각해 보니 국장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인터넷뉴스팀엔 기자가 단 둘이었다. 매일 기사를 업데이트하고 인터넷 사이트에 기사 배치를 확정하면 하루 일과는 마무리됐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1998년 하반기와 1999년 상반기에 입사한 신문, 방송사 수습기자 동기들 모임이 떠올랐다.
1999년 경기 북부엔 큰 수해가 났다. 사회부에 배치된 신참 기자들은 모두 문산을 중심으로 모였다. 몇 주간의 취재를 마친 뒤 9명의 기자가 모여 ‘뉴스인사이드(News Inside)’라는 팀을 결성했다. 취재한 내용들이 신문과 방송에 누락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뉴스들을 모아 인터넷 서비스를 하기로 했다. 필자는 국장을 맡았다. 열정은 넘쳤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자주 모여 회의를 했음에도 6개월 만에 헤어졌다. 뉴스인사이드는 펼쳐 보지 못한 여러 기획안을 유산으로 남겼다.
인터넷뉴스팀장을 설득해 뉴스인사이드 기획안을 실행하기로 했다. 회사에 내건 조건은 하나. ‘0% 지원에, 100% 검열’. 서울 시내 주요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언론사 기자와 PD를 모아 ‘NJ(News Jockey) 카페’라는 인터넷 방송국을 열었다. 미리 만들어진 기획안에 팔팔한 대학생들이 뿜어내는 창의력을 더하니 새로운 것들이 쏟아졌다. 뉴스를 랩으로 만들기도 했고, 패러디 뉴스로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 패러디 뉴스 앵커를 맡았던 이는 1년 뒤 ‘헤딩라인뉴스’로 지상파까지 진출한 이명선 앵커다.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선 콘텐츠를 팔아야 했다. 포털 사이트와 이동통신사의 문을 두드렸다. ‘기자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고생하는 후배들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 이 경험이 향후 해외 미디어 등에 콘텐츠를 판매할 때, 좋은 밑거름이 됐다. 차마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패러디물을 한나라당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고 항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대학생 NJ들은 떠나면서 마지막 기획안을 남겼다. 그것은 포털 사이트를 활용한 ‘실시간 토론회’였다. 2003년 7월 야후코리아와 손잡고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를 초청해 토론회를 열었다. 9월엔 새천년민주당 김근태 고문을 만났다. 2004년 2월엔 미디어다음의 지원을 받아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과 온라인 토론회를 열었다.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온라인 토론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청와대를 여러 번 방문하기도 했다. 2006년 3월 실시된 노 전 대통령의 온라인 토론회는 대학생들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됐다. 실시간 토론회는 지금도 야후코리아의 대표적인 뉴스 서비스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에 만족해선 살아남을 수 없다

언론사에 근무하는 뉴미디어 기획자의 고민은 다음과 같다. ‘글로 확장할 것인가, 영상으로 확장할 것인가.’ NJ 카페를 운영하다 우연히 CBS 인터넷 사이트에서 ‘노컷뉴스’라는 작은 배너를 발견했다. 취재기자들의 정보보고를 뉴스로 재가공해 서비스하는 코너였다. 편집국 혹은 보도국의 가장 큰 힘은 네트워크다. 이를 이용한 뉴미디어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CBS를 찾아갔다. 지금 CBS 보도국장인 민경중 선배가 노컷뉴스를 만든 이다. 그날 술도 많이 얻어먹고 여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부분 기억나진 않는다. 필름이 끊긴 탓이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하나. ‘노컷뉴스라는 이름 아래 국민일보와 CBS의 인터넷을 통합하자.’
회사에선 손사래를 쳤다. 포기하지 않았다. NJ 카페와 온라인 토론회의 성공 덕분인지 편집국은 후배의 제안을 무시하지 않았다. 2003년 11월 국민일보와 CBS는 ‘인터넷 콘텐츠 통합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양사의 인터넷 서비스를 노컷뉴스(nocutnews.co.kr)로 통합하고, 국민일보는 사진을, CBS는 오디오 뉴스를 상호 제공하는 것이 요지다.
민 선배와 둘이서 네이버, 다음 등 주요 포털 사이트를 찾아 노컷뉴스를 홍보했다. 메이저 언론사 수준의 콘텐츠 비용을 받기 위해서다. 번번이 거절당했다. ‘마이너 언론사의 콘텐츠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강남 한복판에서 민 선배와 함께 쭈그리고 앉아 좌절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2004년 4월 양사가 공동으로 운영했던 총선기자단은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을 글과 영상으로 단독 보도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자리를 빌려 김광수, 김영관, 박예원, 이해리를 포함한 총선기자단에 감사드린다. 그렇게 노컷뉴스는 네티즌에게 이름을 알려갔다.
제휴는 오래가지 않았다. 취재기자들은 인터넷 콘텐츠를 추가 제공하는 데 피로감을 느꼈다. CBS만으로 노컷뉴스가 운영됐다. 노컷뉴스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편으로 배가 아팠지만, 한편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2004년 10월 국민일보만의 인터넷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편집국 속보뿐 아니라 네티즌 사이에 유행하는 인터넷 소식까지 보도하는 쿠키뉴스(kukinews.com)의 탄생이다. 노컷뉴스와 쿠키뉴스는 어제의 동지에서 오늘의 경쟁자로 바뀌었다. 지방지를 연합하고 해외 동포 소식을 통합하는 데도, 영상 서비스를 추가하는 데도 앞뒤를 다퉜다. 이 과정에서 노컷뉴스 민 선배가 했던 말을 잊기 어렵다. “어떤 순간에도 만족하지 말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 그래야 우리 후배들이 살아남는다.” 

신문, 방송국에 방송 콘텐츠 팔다

다시 영상 서비스로 눈을 돌린 것은 2005년의 일이다. 신문과 인터넷, 신문과 라디오의 결합을 벗어나 신문과 TV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쿠키뉴스는 위성DMB 출범을 맞아 영상 서비스인 쿠키방송을 기획했다. 신문이 만든 방송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곳부터 찾았다.
“지역민방을 공략해 보면 어떨까?” 쿠키방송을 함께 기획한 정인택 선배의 한마디는 중요한 힌트였다. 다음날부터 전국을 돌아다녔다. 2005년 6월 국민일보는 울산방송(ubc)과 업무제휴 협약을 맺었다. 양사 간 뉴스 콘텐츠를 공유하고 방송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하는 것이 골자다. 업무제휴를 맺었지만 실제 편성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영상 제작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제휴도 중요하지만 콘텐츠 생산 능력을 쌓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2006년 1월 조선일보로 옮겼다. 다양한 분야의 미디어를 묶어서 공동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아이디어는 채택됐다. 진성호 부장, 방정오 팀장, 장원준 선배, 이기훈 기자 등과 전국 지역민방을 찾아다니며 설득작업을 했다. 지역민방 네트워크를 활용해 새로운 방송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신문 기사를 아침에 내보내니 시청률도 높아지리라는 가설도 제시했다.
신문과 방송이 결합하는 데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기차로, 버스로, 취재차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부산방송(KNN), 대구방송(TBC), 광주방송(KBC), 대전방송(TJB)을 중심으로 첫 크로스미디어 기획 ‘Our Asia’를 송출했다. 신문을 들고 대전까지 내려가 시청했다. 너무 신기했다. 서로 얼굴을 꼬집으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글로 표현된 기사와 영상으로 편집된 다큐멘터리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서로 다르게 표현된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시청률에 대한 가설은 적중했다. 방송사 동 시간대 평균 시청률의 두 배 이상 성적이 나왔다. 시청률 상승 가설은 지금까지 예외 없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크로스미디어에 참여한 방송사가 즐거운 이유다.
크로스미디어 기획을 글로벌하게 진행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회사 경영진의 제안이었다.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소재인 탈북자 인권문제를 탐사 보도하기로 했다. 이른바 ‘천국의 국경을 넘다’. 2007년 4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취재를 하고 제작을 했다. 현지 취재팀은 단 세 명.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도전이었다. 최선을 다했고 충격적인 영상도 얻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미디어 회사와 손을 잡기란 만만치 않았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했다. 영국 BBC, 미국 abc의 정문 경비실부터 찾아가 제휴를 제안했다. 이석기 선배, 백주환 사우 등이 동행했다. 담당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신문사의 장점인 탐사 보도의 전통을 살려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해외 방송사에 우리 콘텐츠를 판매하고 싶다.” 신문 보도는 3월 초로 예정됐지만 제휴는 이뤄지지 않았다. 입술이 바짝 탔다. 보도를 단 이틀 앞두고 영국에서 전화가 왔다. “조선일보 작품을 편성하겠다. BBC에게도 영광이다.”
이처럼 크로스미디어 기획은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다. 혹자는 치밀한 전략과 철저한 준비로 탄생했다고 평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딪치고 절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어느 단계에서 만족하고 멈췄다면 여기까지 발전하지도 못했으리라. 무모하고 용감했기에 오히려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열정을 가진 기자라면 누구라도 크로스미디어를 뛰어넘는 기획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는 까닭이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9월호 미래형 기자되기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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