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나는 지역지 기자의 본분, 즉 지역주민들간의 정보와 의견 교류, 지역 권력기관의 비판 감시, 나아가 지역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지역 언론의 파수꾼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보다 내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가슴으로 품을 수 있는 기자가 진정한 지역지 기자의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다.


중앙지 기자와 지역지 기자










홍석천 영남일보 경제부 기자
hongsc@yeongnam.com



“소위 ‘중앙지’라고 부르는 서울일간지(서울지)와 지역에 본사를 둔 지역일간지의 차이는 뭘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보도의 관점이 서울에 있느냐, 지역에 있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기사의 가치판단이나 보도방향·편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에 재직중인 김주완 기자의 저서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의 한 단락이다.
처음부터 이 글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대부분의 기자경력을 중앙지에서 쌓았지만 지금은 지방지, 아니 지역지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처럼 신혼초 한 중앙 경제지에 입사하면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5년여의 시간이 흘러 고달픈 타향살이와 개인적인 일이 겹치면서 지난해 초 고향인 대구로의 귀향을 결정했다. 때마침 영남일보에서 경력기자를 채용하면서 경제지 근무 경력을 살려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고향 신문에서의 기자생활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역에서는 유력지로 인정받고 있지만 근무여건은 서울을 떠날 때 들었던 선배들의 우려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같은 인력으로 1개 면만 책임졌던 서울과는 달리 경제면 3개면과 종합면까지 맡아야 하는 이곳의 업무과부하는 오히려 애교수준이었다. 영업부서를 방불케 하는 신문 부수 확장에다 열악한 지역경제 상황 탓에 몇 안 되는 ‘귀하신’ 광고주 관리도 눈앞에 떨어진 당면과제였다.
게다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실질 수입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도 나의 선택에 대한 회의가 들게끔 하곤 했다. 또 선후배 기자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업계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인력감소로 가중되는 심각한 노동 강도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렇지만 나는 이 와중에도 알게 모르게 신분상승의 달콤함을 즐기고 있었다.
‘관존민비’와 ‘선비정신’이 투철하게 반영되고 있는 지역 정서에 편승해 ‘글 쓰는 놈(記者)’인 기자가 사회지도층인 동시에 권력층과 동급이라는 착각에 빠져든 것이다.
지역에서는 경제계 CEO에서부터 고위 기관장, 또는 사회단체의 대표들까지 다양한 인간관계의 형성하면서 이에 따라 나 또한 그들과 비슷한 신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수도권 지역지인 부천일보의 기자학교 게시판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지역지 기자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비겁하고, 때로는 자신에게 조차 두 얼굴을 쓰며 그것을 사실로 믿는 왜곡된 삶이다. 참외 밭에서 무늬만 수박이 수박이라고 외치는 것이다”라고. 내 자신이 중앙지의 시각을 유지한 채 지역지에 근무하는 무늬만 수박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실제와 동떨어진 의미 없는 자료에 의존한 기사, 홍보기사 등 반향 없는 메아리 같은 기사만 생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의 경쟁지에 한 아파트의 입주자대표 선거기사가 실렸다.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주민들의 직접 입주자 대표를 선출한다는 것이었다. 그 아파트는 바로 내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 아파트에는 영남일보의 기자가 3명이나 거주하고 있었다. 3명의 기자가 속된말로 '물'을 먹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동네주민이면서 영남일보 시민기자로 참여하고 있는 나의 멘티(Mentee)기자가 입주자대표회의 관련 기사를 보내왔다. 입주자 대표 선거과정을 경쟁지 기사보다 더욱 주민의 눈으로, 주민의 마음으로 보고 느낀 것을 보내왔다. 순간 난 형용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품위 있는 사람들의 기사만을 쫓다 바로 내 이웃의 일에는 무관심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신문기자이고 멘토기자라는 이유 하나로 수준 높은 척, 잘난 척 했던 나의 기자의식은 한순간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지역지 기자의 본분, 즉 지역주민들간의 정보와 의견 교류, 지역 권력기관의 비판 감시, 나아가 지역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적어도 지체 높고 돈이 많은 분들과 생활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서민들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다. 지역 언론의 파수꾼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보다 내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가슴으로 품을 수 있는 기자가 진정한 지역지 기자의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9월호 에세이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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