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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한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가디언’은 영국 유력 일간지 11개중 판매부수가 10위지만, 웹사이트(www.guardian.co.uk)는 영국 인터넷 신문들 중 8년 연속 방문자 수 1위를 기록했다. 2008년 1월 기준 월 순방문자는 1,970만 명으로 ‘더 타임스’ ‘텔레그라프’ 온라인보다 월 400만∼700만 명 정도 많았다. 영국 최초로 1994년 온라인 신문을 출범시킨 텔레그라프에 비해 5년 늦은 1999년 1월에 시작했으면서도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최은숙의 ‘세계 1등 인터넷 신문에게 배우는 블로그와 커뮤니티 경영전략’(커뮤니케이션북스, 2008)은 바로 이 질문을 다루고 있다. 저자가 소개한 닐 서만(Neil Thurman)의 분석이 흥미롭다.

“가디언 미디어 그룹은 공익 법인인 ‘스콧 트러스트’가 소유한다. 바로 이 점이 가디언이 투자자들에게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하며, 수익은 반드시 가디언에 재투자되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이는 아주 독특한 소유권 구조로 단기 투자를 중시하는 개인 소유 미디어들과 달리 온라인에 대해 지속적이고 실험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공영방송 BBC도 비슷한 맥락에서 장기적 안목으로 온라인에 투자를 함으로써 가디언과 함께 영국에서 성공적인 온라인 뉴스 웹사이트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10쪽)

이게 웬 말인가. 뜻밖이다. 한국에서 공익법인은 무책임과 방만 경영의 대명사인 양 몰매를 맞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 분석이 타당하다면, 문제는 공익법인 그 자체가 아니라 공익법인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공익법인이 별 성공 사례를 남기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된 걸까?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비판은 지지자로부터 나와야

공익법인의 강점은 객관·공정·엄정으로 대변되는 외부자들의 조언이나 비판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바로 이게 ‘장기적 안목’을 가능케 하는 주요 근거다. 개인 소유 미디어는 누릴 수 없는 이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엔 이런 시스템이 없다. 아니 없는 건 아닐망정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패거리주의 때문이다.
공영방송의 문제에 대한 가장 강도 높은 비판은 공영방송을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완벽하진 못할망정 그래도 공영방송의 이상에 접근할 수 있게끔 늘 무능과 타락의 가능성을 경고해야만 한다. 사안에 따라 적극적인 개입도 불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영화론이 감히 고개를 내밀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형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공영방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부비판을 금기시하는 한 패거리가 되었고, 반대편도 똑같은 패거리를 형성했다. 비판은 양 진영 사이에서만 오고 갔을 뿐이다.
우리는 너무도 정(情)이 많은 민족이라 문화적으로 객관·공정·엄정은 기대하기 어려운 걸까? 그래서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늘 화기애애한 이야기만 주고받는 패거리주의에 함몰되는 나머지 스스로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리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패턴을 따르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젠 이런 걸 본격적인 의제로 삼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패거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선 “의견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Comment is free but facts are sacred)”는 대원칙에 대한 합의도 이루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는 예전 가디언 편집인이자 현재 가디언의 자유언론 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C. P. 스콧(Charles P. Scott)이 가디언 창간 100주년을 기념해 자유언론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한 말이다. 가디언의 역대 편집인들은 저널리즘의 원칙을 설명하면서 이 경구를 즐겨 인용했고, 온라인 저널리즘 시대에도 유효한 원칙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블로그의 제목에도 끌어다 썼다. ‘코멘트는 자유(Comment is Free)’는 2006년 3월 200여 명의 블로거들로 출발, 2007년 8월 조사 당시 1,753명, 2008년 1월 조사 당시 3,264명의 블로거들이 활동하는 대규모 집단 블로그라고 한다.
아무리 이념·정치성향·미디어철학이 다르더라도 “의견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는 대원칙만 지켜진다면 토론과 논쟁의 생산성은 크게 향상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의견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한가? 패거리주의에 오염되면 사실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다. 우리는 의견과 사실의 구분에 게으르며, 의견도 사실인 양 말하는 데에 익숙하다. 입장이 바뀌면 의견은 물론 사실마저 달라진다. 오직 힘겨루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싸움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힘이 세질 것이라는 데에서 위안을 찾아야 하는 걸까? 구체적인 통계로 입증할 순 없지만, 한국 미디어의 진로를 둘러싼 최근의 격렬한 논쟁·토론·싸움에서 어느 편에도 끼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무관심·피로 증후군이다. 어떤 식으로건 한국사회가 진보하리라는 것에 대한 기대는 포기할 수 없지만, 자기성찰의 결여에 대한 염증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10월호 사람과생각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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