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휴일 140일, 하루 8시간 근무, 전 직원 해외여행, 전 직원 정규직, 육아휴직 최대 9년, 70세 정년보장은 아니더라도…. 언론사를 경영의 마인드로만 생각하는 현실에 서서히 염증이 났다. 기자를 ‘돈벌이 기사(技士)’로 생각하는 언론관에 화가 났다. 신(神)의 직장을 원한 것이 아닌데 회사는 ‘신(辛)의 직장’으로 칼날을 곧추세웠다.


 

무소의 뿔처럼 가리라





 



나재필 충청투데이 편집부 차장

najepil@cctoday.co.kr



괴나리봇짐을 꾸렸다. 8년간의 서울생활, 13년간의 편집기자 생활을 정리하는 의미였다. 김삿갓은 하나의 로망이었고 그 방랑벽을 고스란히 떠안고 낙향을 결심한 것이다. 수 백 만장의 텍스트를 읽고 또 읽었던 직업이었는데 달랑 A4용지 한 장으로 수속을 마쳤다.
신문기자로 산다는 것은 고행이었다. 샛길로 빠질 여유조차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이직의 꿈이 항상 보푸라기처럼 일었다. 술과 일과 피로 속에서 하루하루 근심의 나이테만 켜켜이 쌓여갔다. 매년 쭉쭉 오르는 연봉에 신바람이 났지만 시시때때로 배반의 장미에 찔려 눈물 흘리는 나약한 인간 군상을 느끼며 몸 안에 찬바람이 불었다.
그러다보니 직장을 7번이나 옮기는 콤플렉스가 생겼다. 성실성이 부족하다거나, 충성도가 떨어져 이직을 반복한 것은 아니다. 직장의 제1조건이 ‘돈’이 아님을 알았을 때,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고 ‘정(情)’을 방관할 때 직장은 ‘머슴’에 준하는 인력시장일 뿐이었다.
연간 휴일 140일, 하루 8시간 근무, 전 직원 해외여행, 전 직원 정규직, 육아휴직 최대 9년, 70세 정년보장은 아니더라도…. 언론사를 경영의 마인드로만 생각하는 현실에 서서히 염증이 났다. 기자를 ‘돈벌이 기사(技士)’로 생각하는 언론관에 화가 났다. 신(神)의 직장을 원한 것이 아닌데 회사는 ‘신(辛)의 직장’으로 칼날을 곧추세웠다. 가로 39.4㎝ 세로 54.5㎝의 지면에 바친 청춘은 중년의 비포장도로로 접어들면서 스러져갔다. 가끔은 빗물에 눈물을 감추며 달렸다. 낙향은 그래서 탈출구이자 비상구였다.
세상살이에 구토하고 비토하고, 아파한 기억들이 고향 땅에 내려앉았다. 봄이면 매화꽃과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고향. 적당한 욕망이 있고, 청승맞은 밤에게 술잔을 건넬 수 있는 고향. 고향에선 토악질도 편하고 배설도 편했다. 내가 아프고 힘들고 ‘술이 필요할 만큼’ 외로울 때 달려와 술이 되고 말이 되고 어깨동무가 되어주는 고향.
그러나 낙향한지 얼마 후 난 다시 고향의 신문사를 기웃거리게 됐다. 활어시장 같은 편집국이 생각났던 것이다. 펄떡펄떡 뛰는 생선의 오르가슴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잉크냄새 폴폴 풍기며 윤전기가 돌아가는 그 전쟁터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싱싱함을 잊을 수 없어서 수 일 동안 술독에 빠져 살다가 지방 신문사에 다시 들어갔다.
신문사는 여전히 정글의 전사를 키우고 있었다. 특별하다는 오만 속에 맨주먹 정신을 가르치고, 술 냄새와 인간의 냄새가 오묘하게 합쳐진 그로테스크한 곳. 콘크리트 세상을 벗어나 맨발로 뛰고 싶었지만 다시 콘크리트였다. 늘 마음이 뻥 뚫려 있었는데 고향에서도 천공(穿孔)이 났다. 본래 있었어야 할 작은 파편이 제대로 와 박힌 듯이. 그러나 편해졌다. 분노와 미움으로 점철된 치열한 ‘삶의 체험현장’이 끝나서인지 편해졌다. 맹수의 살기가 사라져 편해졌다. 상그릴라(shangri-la)는 아니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지평선’을 찾아 헤매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열애한 신문편집을 다시 하게 돼 행복했다.
고액연봉자로 꽤 산듯한데 지금도 빚 빼면 서까래 하나 남는다. 여전히 가난하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이더라도 마음속에 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산다. 달콤한 수액을 주는 대신 다른 벌레들이 꼬이는 것을 막는 벚나무, 모기가 들끓지 않도록 해주는 산초나무, 우물가에 심었다가 그 잎을 물위에 띄워 나그네의 물갈이를 막아준 버드나무,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를 위해 오리(2㎞)마다 심은 오리나무, 옛 시골집 길손에게 뒷간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는 감나무, 일을 돕기 위해 처가에 온 사위의 지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약한 덩굴로 질빵을 매줬다는데서 이름 붙은 사위질빵나무 등을 키우면서 말이다.
그리고 염원한다. 16년차를 향해 내달리고 있는 ‘지금’을 떠나 낙향다운 낙향을 언젠가는 하리라고. 텃밭에 고추며 오이며 토마토 등 채소들을 기르고, 사계절동안 여러 가지 입성을 갈아입는 초록을 즐기며, 도시서 놀러온 지우(知友)들에게 햇살 같은 자연을 선물할 수 있는 그곳으로 가리라고. 비루먹을 상념이 폐선의 갑판처럼 삐걱대더라도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진정한 고향으로 가겠노라고.
해바라기는 태양의 궤적을 따라 동에서 서로 꽃을 움직인다. 더 놀라운 것은 암실에서도 해바라기는 빛이 있는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에서 서로 꽃을 움직인다. 빛을 쫓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습성’대로 살았다. 세상이 다 그런 줄 알고 ‘버릇’처럼 살았다. 그러나 이제 나를 감싸고 있었던 ‘무거운 갑옷’을 벗어놓는다. 세상이 아무리 날 흔들어대도 무소의 뿔처럼 내 길을 가기 위해서.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10월호 에세이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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