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심에서는 KBS 또한 제작에 관여할 수 있고, 수정 또는 보완을 요구할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방송의 주체로서 최종적인 편집권한이 있으므로 초상권 침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방송사 측과 외주제작사 담당 직원은 이에 불복,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항소심의 결론을 확정 지었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하지도 않았고, 나도 모르는 가운데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한다면? 아마도 몹시 부당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일반인의 상식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책임이 부과되기도 하는 것이 법이다. 민법 제760조에 규정되어 있는 공동불법행위, 제756조의 사용자 책임, 그리고 일부 특수한 형태의 ‘도급’의 경우에 ‘내가 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자기책임의 법리는 다소 변형되거나 확대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피해자를 보다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인 고려가 작용하고 있다.
언론의 취재, 보도행위는 기본적으로 다수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작업이다. 내가 작성한 기사 본문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으나 편집과정에서 잘못 붙인 제목이 문제 되기도 한다. 특히 방송의 경우 외주제작 프로그램에 법률적 하자가 있으면 방송사도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문제가 되곤 한다. 외주제작사가 제작, 납품한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은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중 누가 부담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지난 2008년 1월 17일 대법원에서 선고한 2007다59912 판결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건 개요

1. 동의 없이 이루어진 신생아 촬영
A는 이제 겨우 생후 1개월 남짓 된 아기다. 그런데 몸이 안 좋아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있다. A가 퇴원할 무렵 이 병원 신생아실에서 무려 세쌍둥이가 태어났다. 이들 세쌍둥이는 임신 7개월 만에 출생한 미숙아들이다. 그래서 역시 중환자실에 있다. 이들 미숙아 세쌍둥이들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애초 촬영의 대상이 아니었던 A였지만 조연급으로 적은 분량이나마 방송을 탄 것이다.
약 7초 분량의 첫 번째 장면은 간호사가 A를 안고 등을 두드려 주는 모습이다. 이어진 12초 분량의 두 번째 장면은 A가 스르르 잠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마지막 세 번째 장면은 총 20초 분량으로 A의 엄마가 A를 안고 분유를 먹이는 모습이다. 이 모습을 보고 주인공 격인 미숙아 세쌍둥이의 어머니는 "아이 진짜 부러워, 부러워요. 저만큼만 커도 안아줄 수 있는데. 빨리 커, 빨리"라고 말한다. A가 나오는 장면을 포함한 미숙아 세쌍둥이들의 이야기는 2005년 10월 4일 KBS가 제작, 방송하는 ‘병원 24시’를 통해 전국적으로 방영되었다. 문제는 위 프로그램의 촬영이나 방송에 A의 부모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 방송사에 유리한 외주 계약
방송법 제72조 제1항에 따르면 각 방송사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고시하는 일정 비율 이상을 외주제작 프로그램, 즉 자체 제작하지 않은 프로그램으로 편성해야 한다. 이에 따라 현재 지상파 방송사들의 경우 최소 40%는 외주제작 프로그램으로 편성해야 하는데 실제 비율은 그 이상이라고 한다.
이 사건 ‘병원 24시’ 역시 외주제작 프로그램이다. 한국방송공사가 ‘병원 24시’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방영하기는 하지만 프로그램의 제작은 다른 프로덕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면 A와 A의 어머니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잘못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해당 프로덕션 담당자는 병원 측과 A의 아버지로부터 세쌍둥이들 외에 A를 포함한 다른 신생아에 대한 촬영을 삼가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았다. 프로그램 제작을 맡은 프로덕션 측의 책임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국방송공사와 해당 프로덕션 사이에 체결된 계약 내용을 살펴보면 책임자의 범위가 좀 더 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 프로그램 제작계약의 몇 가지 주요 사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가. 프로그램의 기획은 사전에 승인을 받아 결정하고, 제작과 관련된 제반 사항 역시 협의하여 시행한다.
나. 제작현장에 수시로 입회하여 제작상황을 확인하고 필요한 지시를 할 수 있다.
다. 완성된 프로그램의 검수 이후라도 내용이 불충분하다고 판단된 부분에 대해 수정 또는 보완을 요구할 수 있고, 지체 없이 자신의 책임과 비용으로 수정 또는 보완한다.
라. 제작된 프로그램의 방송권(지상파, 위성, 유선, DMB 등)을 포함한 국내, 국외의 모든 권리는 방송사에 귀속된다.
마. 납품된 프로그램을 방송 등에 사용하면서 필요 시에는 직접 수정, 삭제 및 기타 편집할 수 있다.

계약이 외주제작사 측에 상당히 불리하게 체결되어 있다. 이 계약대로라면 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작, 완성, 납품의 전 과정을 발주처인 방송사가 주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소속 직원을 관리, 감독하듯 방송사는 외주제작사 측을 간섭할 수 있는 구조인데 이러한 일방적인 계약에 의거, 제작된 프로그램으로 인한 책임이 단지 외주제작사만의 것일까?

3. 방송사에도 제작사에 준하는 손배책임 물어
그 해 10월 A와 A의 부모 등 총 3명은 명예훼손 및 초상권 침해를 이유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서울동부지법에 제기하면서 외주제작사와 그 담당직원 외에도 방송사와 소속 프로듀서, 병원과 소속 홍보팀장을 피고로 삼았다. 청구액이 원고 1인당 5,000만 원에서 1억 원에 이르는 고액의 소송이었다. 이에 대해 1심 법원은 원고들 중에서 화면에 직접 노출된 A와 A의 어머니 두 사람에게만 각각 300만 원을 지급하도록 외주제작사 측에 명하는 판결을 선고했다(2005가합14302). 법원은 우선 신생아 중환자실에 요양 중이라는 사실이 명예훼손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또 프로그램의 제작 주체는 엄연히 외주제작사이므로 병원 측은 물론이고 한국방송공사 측에도 제작사에 준하는 수준의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1심의 판단은 2심에 이르러 상당 부분 변경된다. 2007년 7월 25일 2심 재판을 담당한 서울고등법원은 A와 A의 어머니에게 각각 700만 원을 공동으로 지급하도록 외주제작사 측뿐만 아니라 한국방송공사 측에도 명했다(2006나80294). 2심에서는 우선 초상권 침해로 인한 위자료 액수가 300만 원에서 700만 원으로 다소 상향조정되었다. 그리고 KBS 또한 제작에 관여할 수 있고, 수정 또는 보완을 요구할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방송의 주체로서 최종적인 편집권한이 있으므로 초상권 침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방송사 측과 외주제작사 담당 직원은 이러한 2심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2008년 1월 17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항소심의 결론을 확정 지었다.


판결 요지

가. (외주제작 프로그램의 문제점에 대해 방송사에게도 책임이 있는지 여부) 외주제작사와 체결한 제작계약에서 방송 프로그램의 방송권이 방송사업자에게 귀속하고, 납품된 방송 프로그램의 최종적인 편집권한이 방송사업자에게 유보된 사정 아래에서 방송사업자가 제작과정에서 외주제작사에 의하여 무단 촬영된 장면에 관하여 피촬영자로부터 그 방송의 승낙 여부를 확인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피촬영자의 식별을 곤란하게 하는 별도의 화면조작(이른바 모자이크 처리 등) 없이 그대로 방송하게 되면 외주제작사와 공동하여 피촬영자의 초상권을 침해한 불법행위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 이러한 방송사업자의 책임은 그가 방송의 주체로서 자신의 독립적 판단 하에 외주제작 방송 프로그램이 납품된 상태 그대로 방송한 데 기초한 것이므로 그 제작과 관련하여 방송사업자와 외주제작사 사이의 법률관계가 민법상의 도급인과 수급인의 관계인지 또는 실질적으로 사용자와 피용자 관계인지 여하에 따라 그 책임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나. (방송사 측에 외주제작 프로그램에 대한 과도한 주의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판단) 피고 ○○○(KBS 소속 ‘병원24시’ 담당 프로듀서) … 에게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것 … 은 피촬영자의 승낙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곤란하다면 편집권에 기하여 문제 될 수 있는 장면을 삭제하거나 피촬영자의 동일성 식별을 곤란하게 하는 화면조작 등으로 초상권 침해의 결과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이 피고 한국방송공사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전제한 것으로서 피고 ○○○에게 이행이 불가능한 수준의 주의의무를 요구하는 것 … 이라고 볼 수 없다.


방송 제작 현장에의 적용

최근 기사를 보니 한 지상파 방송사의 경우 외주제작 프로그램이 차지하는 비율이 70%에 육박한다고 한다. 뉴스나 대담, 토론 프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드라마, 교양 프로는 아마도 외주제작물일 것이다. 이와 같은 외주제작 프로그램에 법적 하자가 있다면 방송사 역시 책임을 질 것인가? 방송사 스스로 저지른 잘못은 아닐지라도 책임을 진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특수한 형태의 도급이기 때문이다. 방송 프로그램 외주제작 계약은 법률적으로는 ‘도급’에 해당한다. 도급은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체결하는 계약으로 도급인은 일의 결과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고 그 결과물만 취하면 될 뿐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도급계약에서 도급인은 결과에 대한 대가지급 의무 외에 별다른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도급인이 수급인의 일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와 간섭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렇게 되면 마치 고용주가 소속 직원의 업무영역 전반에 대해 책임을 부담하는 것처럼 도급인은 수급인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이 사건 외주 프로그램 제작계약 역시 본연의 도급과는 다르다. 방송사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작, 납품, 보수의 전 과정을 주관한다고 여길 정도로 외주제작사의 일에 간섭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도급이라면 도급인은 수급인의 업무 영역에서 일어난 전반적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최종 편집 권한이 방송사에 있으므로

다음으로 방송의 주체로서 행사하는 편집권한 때문이다. 프로그램 제작을 외주로 돌렸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인 편집 및 방송권한은 해당 방송사에 유보되어 있음을 법원은 주목했다. 외주제작사가 납품한 방송 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영해야 할 의무가 없는 방송사로서는 법적 하자(초상 촬영 시 동의를 받지 않은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방송한 책임을 부담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방송사에 책임을 부과하기로 한다면 방송사로서는 외주제작이 어렵다는 불평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방송사의 책임은 독자적인 책임이 아니다.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외주제작사와 연대하여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각자 따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중 누구든지 한 번 배상하면 그 나머지 사람 모두는 면책된다. 나아가 변제 후에 내부적으로 구상권의 행사가 가능하다. 책임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져 그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자에게 다시 변상을 요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상의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언론사에 손해배상책임을 지운다고 하더라도 무리한 것이 아니다. 외주제작사의 잘못으로 인해 손해배상을 하게 되었다면 결국 그 책임은 내부구상의 과정을 통해 외주제작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11월호 법을 알고 기사 쓰기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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