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 씻김굿··· 그해 여름은 뜨거웠네!

사람의 눈물샘은 잘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많이, 자주, 끊임없이 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경험했다.
 
1983년 6월 30일 시작되어 장장 138일간 계속됐던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때 우리 국민들이 그랬다.

계해년, 돼지띠의 1983년은 ‘울음의 한 해’였다. 한 해 내내 국민의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유난히 대형 사건사고와 가슴 울리는 사연이 많았던 한 해였다. 동아일보의 3년차 사건기자였던 필자 또한 실컷 울었고 사건 현장을 원 없이 뛰었던 한 해였다.


눈물과 사건사고의 해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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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여름 여의도 광장은 이산가족을 찾는 숱한 벽보와 상봉자들의 눈물로 뜨겁게 달구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한창이던 무렵의 여의도 광장 모습. / 사진출처: 연합뉴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두 달여 국민을 울릴 즈음이던 그해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기가 소련 상공 서사할린에서 소련에 피격, 269명 전원이 숨졌다.
 
미국 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이 여객기의 승객 중에는 래리 맥도널드 미국 하원의원도 있었다.

탑승객들의 국적만 해도 16개인데다 비무장 민간항공기를 격추시킨 것은 사실상 ‘학살행위’였기 때문에 전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다.

숨진 사람들의 슬픈 사연이 언론을 탈 때마다 국민들은 또 울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10월 9일 한글날,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공식 명칭은 ‘버마암살폭파사건’)이 터졌다.

당시 미얀마를 공식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저지른 이 끔찍한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를 포함한 장관, 청와대 수석비서관, 취재기자 등 17명이 숨졌다.

미얀마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던 전 대통령은 예정보다 조금 늦게 출발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국가적 인재들의 희생과 사건의 비극성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몸서리치며 울었다.

1983년은 사건사고 홍수의 해였다. 지난 11월 22일 작고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23일간의 단식투쟁을 시작한 것도 그 해 5월 18일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 걸고 벌인 투쟁이었다. 오랜 단식 끝에 긴 수염의 바짝 마른 몸으로 서울대병원에 강제 이송되던 그의 모습을 언론을 통해 지켜보며 민주화를 열망하던 많은 국민들이 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특종 경쟁, 기사 송고 싸움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1983년의 여름을 관통했다. 6월 30일 시작되어 11월 14일에 끝났으니 방송의 절정이었던 7~9월의 가뜩이나 뜨거웠던 여름은 그냥 열탕이었다.

오늘의 ‘여의도 공원’이 아니고 나무 한 그루 없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어 ‘국군의 날 행사’가 단골로 열리던 ‘여의도 광장’(일명 5.16광장).

이산가족을 찾는 숱한 벽보와 임시로 설치된 ‘만남의 광장’(현 산업은행 본점 터)의 열기, 곳곳에 설치된 공중전화기의 열띤 목소리들, 열정에 찬 사람들의 눈길, 그리고 시시각각 벌어지는 상봉의 사연에 따른 눈물바다로 광장은 더욱 뜨겁게 달구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자 세계에는 취재 영역(일본어로 나와바리)이라는 게 있다. 정치부 국회 출입기자, 경제부 금융계 출입기자, 체육부 야구담당 기자, 사회부 사건기자 식으로.

당시 사건기자로 영등포경찰서 출입기자였던 필자는 KBS가 영등포 관내에 있다는 이유로 당연히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취재에 가장 먼저 투입됐다.

정확히는 7월 1일, 그러니까 6월 30일 밤에 시작된 방송이 예정을 넘겨 7월 1일 새벽까지 연장되면서 벌써 큰 태풍이 될 것 같은 조짐을 보인 바로 당일이었다. 그리고는 이 특집방송이 종료된 11월 14일까지 현장을 뛰었다.

첫날 사연이 보도된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가운데 “6.25 한국전쟁의 와중인 1.4후퇴 때 헤어진 사촌남매 8명을 찾는다”는 신영숙 씨가 바로 그날 제1호로 상봉에 성공했다.

프로그램이 대박을 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나흘 지나기 무섭게 이 방송은 온 나라와 국민을 울리는 각본 없는 드라마, 감동의 휴먼스토리, 전쟁 상흔을 지우는 국민의 씻김굿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마도 한 언론사(KBS, 당시는 ‘한국방송공사’)가 취재대상이 되고 나머지 모든 국내외 언론사가 취재 경쟁을 벌이는 상황은 전대미문, 금시초문의 일이었고 앞으로도 벌어지기 힘든 일이리라.

국내 언론은 물론 세계 4대 통신사(AP, AFP, UPI, 로이터)를 비롯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주요 언론사가 취재에 나섰다. 미국 ABC방송의 유명 프로그램 ‘나이트라인’이 생방송으로 특집뉴스를 내보낼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취재기자들에게 처음에는 온통 싸움투성이였다. 취재 싸움, 특종 경쟁, 아이디어 싸움과 함께 기사 송고 싸움이 가장 어려웠다.

오늘과 달리 핸드폰, 노트북은 물론 컴퓨터, 팩시밀리조차 일반화되지 않은 때였다. 기사를 취재하면 취재수첩이나 머릿속에 대강의 기사를 만든 뒤 회사에 전화를 걸어 기사를 불러줘야 했다.
 
아니면 회사 취재차량을 타고 회사로 들어가 번개 같은 속도로 기사를 써 넘기고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는 특히 전화난이 극심해서 집에 청색전화(예전에 전화 시설이 부족해 전화를 놓기가 어려웠을 때, 사용권을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전화를 이르던 말)를 가진 경우는 그것만으로도 부자이던 시대였다.
 
그러니 KBS 안에서 전화를 확보하지 못하면 근처의 파출소로 달려가거나 미리 수배해 둔 여의도 내의 전화 있는 지인 집을 찾아가 전화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언론사 취재차량을 운전하던 분들의 별명 중에는 ‘마하’ ‘번개’ ‘총알’ 등이 적지 않았다. 비상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며 여의도에서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까지를 10여 분에 주파해 내니 그럴 수밖에.

특히 사진의 경우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가지고 회사에 들어가 암실에서 직접 작업해 사진을 인화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신문사 차량은 날아다니다시피 하는 게 다반사였다. 찌는 듯한 무더위, 항상 부족 상태인 잠과의 싸움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언론사 간 취재 경쟁은 점차 시들해지고 이산가족 상봉이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동조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점차 일심동체가 되어갔다고나 할까? 한국일보가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명단만으로 호외를 발행해도 아차 싶거나 경쟁심을 느끼는 게 아니라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송이 만들어낸 스타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만들어 낸 최단 시간, 최대 스타 연예인의 하나가 가수 설운도씨다.

당시 25살의 무명가수였던 그는 ‘낙동강 아버지’라는 제목의 곡을 만들어 놓고 연습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작곡자가 이산가족 찾기 첫날 방송을 본 뒤 번개처럼 아이디어를 떠올려 이 상황에 맞는 가사를 작사가에게 의뢰해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노래로 바꾸고 급하게 취입해 KBS 담당 PD에게 넘겼다.

당시 이원홍 KBS 사장까지 거치면서 ‘합격’ 판정을 받은 이 노래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의 주제가 중 하나가 됐다.

설운도는 아예 KBS에 대기하고 있다가 상봉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무대로 나와 이 노래를 불렀다. 130여 일 그러고 나니 그는 일약 스타가수가 되어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진짜 주제가로 잘 알려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1964년 KBS 라디오에서 방송한 드라마 ‘남과 북’의 주제가였다.

가사가 프로그램 취지와 딱 맞아떨어져 KBS가 이 곡을 부른 가수 곽순옥을 찾았으나 그녀는 홍콩에 살고 있었다. 급히 대타로 투입된 가수는 패티 킴. 그녀에게도 이 행운은 엄청난 것이었다.

주제가와 관련해 생생하게 떠오르는 또 한 분은 국민가수 김정구. 당시 67세(1998년 작고)로 실제 이산가족이었던 그 또한 KBS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상봉이 이루어질 때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러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한국전쟁 휴전(1953년 7월) 30주년을 맞아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소’라는 제목의 1회 특집 방송으로 기획됐던 이 프로그램이 전 세계에 냉전과 분단의 상처를 인식시키며 온 국민을 울리는 138일, 453시간 45분의 기네스북 기록 대하드라마로 만들어진 과정을 되돌아보면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복합체”라는 말이 실감난다.

어떻든 그때까지 ‘관제 방송’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던 KBS는 이 홈런 한 방으로 공영방송의 위력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명예와 위상이 높아졌다.

이 방송은 한반도 긴장 완화에 크게 기여하고, 전 세계에 평화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이 방송은 ‘1983년 세계언론인대회’에서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이듬해에는 ‘세계평화협력회의’에서 방송기관 최초로 ‘골드 머큐리·애드 호너렘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그런데 필자는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의 최대 수혜자는 당시의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거쳐 정권을 잡은 그에게 국민 화합은 가장 절실한 숙제였다.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는 이루어내지 못할 난제였다.

‘국풍’이라는 국민축제 행사를 벌이고, 서둘러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를 만들며 국민들을 달래보려 했지만 광주항쟁 3년째인 당시의 시대 분위기는 문자 그대로 ‘침묵의 동토’였다

. 고려대 총장 출신인 김상협 총리가 “막힌 것은 뚫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국민은 얼어붙어 있었다. 민심은 정권에서 이반되어 있었다.

그런데 KBS가 국민의 가슴을 녹여주고 울음보가 터지는 카타르시스를 줌으로써 정권의 숙제를 해결해 주었으니 속으로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서 다시 뛰는 날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는 빛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림자도 짧지 않았다.

자신을 찾는 사연판 앞에 서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때가 아니다” “인연이 여기까지구나”라고 하염없이 눈물지으며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상봉 이후에 재산 싸움이 벌어져 불행해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방송은 해방 70년과 분단 67년을 맞는 오늘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가장 감동적이고 인도적인 사건의 금자탑이다.

사상, 이념, 정파를 다 떠나 국민이 하나 되게 했던 행복한 방송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져 디지털 시대가 된 지금 이런 방송이 재연됐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KBS와 관계 당국이 구체적인 노력과 구상을 해주었으면 한다. 이대로 세월이 조금 더 가버리면 남북한 분단 1세대들은 다 사라진다. 그러면 남북한은 ‘형제국가’가 아닌 ‘사촌국가’로 더 멀어지고 만다.
 
그런 불행을 막고 남남이건 남북이건 이산가족이 다시 대규모로 상봉하는 날이 빨리 다시 오길 기원한다. 그날이 오면 60대의 프리랜서 기자로 현장을 다시 한번 뛰고 싶다.
 
32년 전의 감격과 감동을 떠올리며….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전 청와대 춘추관장


Posted by 미디어정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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