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만 외치는 불협화음 시대 ‘착한 이들의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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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여간 협동조합에 대해 공부한 뒤 “협동조합이 한옥을 짓는 데 어울리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으로 시작된 ‘참우리 건축 협동조합’의 조합원들.


지난 5월의 어느 날 밴쿠버 공항. 최종 목적지인 캐나다 퀘벡으로 가기 위해선 여기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몬트리올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

현지 코디네이터의 조언에 따라 굳이 방송 촬영이 목적임을 밝히지 않기로 하고 입국 심사대로 갔다.
 
방문 목적을 묻는 직원의 말에 몬트리올에 있는 친구를 방문한다고 말하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보여줬다.

하지만 우리가 기내에 들고 탔던 드론과 트라이포드가 문제였다.

직원은 우리의 방문 목적을 의심했고 이미 관광이라고 말한 상황에서 말을 바꾸는 게 이상해 보일까 봐, 들고 있는 장비들은 레저용이라고 답변했다. 한참을 뚫어지게 내 얼굴을 쳐다보던 직원은 알았다며 도장을 찍었다.


데자르댕 협동조합?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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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프로그램의 특징은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 협동조합을 결성하는 과정을 영상 속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은퇴한 시니어들의 유치원 강사 협동조합 결성을 목표로 한 ‘하빠 프로젝트’와 경남 함안 강주마을의 해바라기 축제 협동조합 만들기 과정인 ‘해바라기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배우 우현 씨(사진 왼쪽)와 안내상 씨는 각각 ‘하빠’와 ‘해바라기’ 프로젝트에 함께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짐을 카트에 싣고 환승을 하러 가던 마지막 문 앞에서 입국 심사 카드를 확인하던 직원이 우리를 막아섰다.
 
“This way, please.” 점잖지만 낮은 어조로 말한 남자 직원의 손 끝에는 철문이 하나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에게 재차 “this way”를 말하는 그의 인도에 따라 들어선 문 안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제야 카드를 자세히 보니, 빨간 펜으로 숫자 1이 쓰여 있고 신경질적인 동그라미가 여러 겹 쳐있었다.

그곳에 들어온 지 1시간이 훌쩍 지나 오후 1시가 넘자 초조해졌다. 4시 50분 비행기를 못 탔을 경우 몬트리올에서 벌어질 여러 가지 불행들과 입국이 거절이라도 되면 꼬이게 될 전체 제작 스케줄을 시뮬레이션 해보았다. 우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1시 30분이 넘어서 겨우 우리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젊은 남자 직원이 여행 목적에 대해 물었고, 우리는 TV 촬영팀임을 솔직히 밝히고 명함과 영문으로 된 촬영 일정표를 그에게 보여줬다.

그는 일행 한 명 한 명의 직책과 이름을 확인하고는, 뭘 촬영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영어로 ‘협동조합’이라고 대답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발음이 문제일까 싶어 쿱, 쿠페라티브, 꾸뻬라띠브, 쿠퍼러티이브 등 다양한 악센트로 말했지만 여전히 그는 일정표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퀘벡에서 촬영하게 될 협동조합 중 가장 큰 협동조합인 ‘데자르댕 협동조합’의 이름을 말하며 그곳을 취재할 거라고 말했다.
 
시종 딱딱한 표정이던 그는 “오 데자르댕?”이라고 답하며 웃음을 보였다(참고로, 데자르댕 금융그룹은 순자산 209조, 고용직원 4만 5,000명인 퀘벡의 거대 협동조합이자 금융기관이다). 그에게 데자르댕은 하나의 보통명사인 듯했다.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짐을 풀어 확인해도 된다는 우리의 말에 공항 직원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파란색 도장을 찍고는 나가는 길을 안내해주었다.

한 컷도 찍기 전에 우리는 캐나다에서 협동조합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무사히 몬트리올로 갈 수 있었다.

9월 17일부터 매주 한 편씩 방송된 이번 프로그램은 8부작 다큐멘터리 ‘MBN 협동 프로젝트- 신(新) 부자수업’으로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한국 협동조합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기 위해 1년 동안 8개국 35개 도시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제작진은 긴 시리즈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기존 다큐멘터리들은 대부분 다양한 협동조합 사례를 보여주고 아직 걸음마 단계인 한국 협동조합 사회에 제언을 던지는 구성이었다.
 
우리는 8부작 중 2편만 다양한 사례 위주로 구성하고 나머지는 포맷을 다르게 하기로 했다.
 
한국 협동조합의 메카로 불리는 원주와 풀뿌리 농촌 협동조합의 모범이라 불리는 홍성 풀무촌을 각 1편으로 소개하되, 재연드라마를 가미한 성공 스토리 포맷으로 기획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 협동조합을 결성하는 2개의 프로젝트를 각 2편으로 구성했다.
 
손주를 돌보는 시니어들을 뜻하는 ‘하빠(할아버지+아빠)’라는 개념을 차용해 은퇴한 시니어들이 직접 유치원 강사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하빠 프로젝트, 그리고 경남 함안의 강주마을에서 해바라기 축제를 위한 협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을 따라가며 보여주는 해바라기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두 프로젝트 모두 장기간 촬영으로 변수가 많은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다행히 잘 진행됐고 두 개의 협동조합이 성공리에 만들어졌다.


협동조합 결성 과정 따라가기

다양한 사례를 다루는 편에서는 최대한 지역별, 업종별로 겹치지 않으면서 책, 방송에서 다뤄지지 않은 협동조합들을 선정했다.

2015년 8월 현재 전국 협동조합의 수는 7,759개, 취재를 시작한 올해 초 기준으로도 6,600개가 넘었다.

협동조합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지만 책과 논문에서 다루는 사례들은 한정적이었다.
 
우리는 전체 리스트를 출력해 의미가 있거나 시청자들이 흥미를 느낄 법한 협동조합들을 추리고 연락을 했다. 연락 자체가 안 되는 협동조합, 아직 아무 사업도 시작하지 않은 협동조합들이 꽤 있었다.
 
이러한 ‘개점휴업 협동조합’을 제외하고 제작진은 두 달 동안 제주도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를 돌며 사전 취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현장에서의 어려움과 열정이 담긴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해외 취재의 경우에는 협동조합으로 유명한 스페인 몬드라곤, 이탈리아 볼로냐, 캐나다 퀘벡 세 지역을 비롯해 핀란드, 독일, 스웨덴, 일본의 협동조합을 취재했다.


오해와 편견, 그리고 진실

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많은 편견과 마주쳤다. 협동조합이 8부작으로 다루기엔 너무 재미없는 소재이고, 이미 기본적인 내용이 방송으로 소개된 낡은 주제라는 의견은 기획단계에서 마주친 편견이었다.

또, 협동조합을 사회주의나 노동조합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답답하다는 활동가들의 불만은 일반 사람들이 협동조합에 대해 가진 편견이었다.
 
많은 협동조합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무엇’이란걸 실감했다.

하지만 1년여의 제작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큰 편견은 내 자신도 갖고 있던거였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협동조합은 착한 경제, 소규모의 친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대안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단지 착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하고 있을까? 사전 취재와 촬영을 거치면서 “협동조합은 선하다”는 명제는 거짓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협동조합은 선한 사람들의 친목 모임 같은 게 아니라, 현실에서 돈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고민 끝에 선택한 답이었다.
 
시장경제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수익을 내야 하는 치열한 경제 영역이 협동조합이다.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비즈니스 모델이 확실치 않으면 존재하기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조합원들 역시 이 부분을 뼈저리게 느끼며 확고한 비즈니스 모델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협동조합 기본법 시행 후 공부를 하다가 1년 후에야 신중하게 협동조합을 결성했다는 한옥 장인 협동조합의 한 조합원은 “협동조합이 한옥을 짓는 데 어울리는 시스템일 거야, 하고 진행을 했고, 여전히 실험은 진행 중입니다”라는 말로 비즈니스 영역으로서의 협동조합을 소개했다.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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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의 한 아파트촌에서 개업해서 2년 만에 월 매출 3,000만 원을 올릴 정도로 자리 잡은 반찬가게 협동조합 ‘달콤한 밥상’의 조합원들. 이들은 협동조합의 가치를 동네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소박한 삶의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정부의 지원을 바라거나 큰돈을 벌고 싶으신 분들은 협동조합 하지 마세요.” 8부에 소개된 대구의 한 협동조합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변두리 아파트촌에서 개업해서 2년 만에 월 매출 3,000만 원을 올릴 정도로 자리 잡은 반찬가게 협동조합.

이 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은 협동조합의 가치를 동네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소박한 삶의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동네의 반찬 봉사모임에서 시작해 회원제 반찬가게로 성공한 이들은 여전히 동네 안에서 뭘 더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가 취재한 거대 규모의 협동조합들 역시 지역과 함께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연 매출 17조 원, 핀란드 최대의 소매·유통 기업인 SOK 협동조합 그룹은 지역 소비자에 대한 봉사와 지역에서의 고용 창출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캐나다 퀘벡의 경우 20여 년 전부터 지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복지 서비스가 필요한 조합원과 일자리를 얻고 싶은 조합원들을 하나로 묶은 연대협동조합을 발전시키고 있다.
 
퀘벡의 복지 영역을 담당하는 연대협동조합 모델은 저소득층에게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며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다.
 
우리가 취재한 협동조합들은 지역사회에의 기여라는 원칙 이외에도 개방적인 제도, 민주적 관리, 협동조합 간 협동 등의 가치를 지키며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협동조합은 선하다”라는 말은 편견인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
 
협동조합을 지루하거나 덜 치열한 무엇으로 파악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편견일 수 있지만, 많은 협동조합들이 자신만의 밥벌이를 넘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선하다고 볼 수 있다.

경쟁만이 옳은 길이라고 모두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이 불협화음의 시대에, 한국의 협동조합들이 연주하는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1장이 이제 막 시작됐다.

‘신 부자수업’이라는 프로그램 타이틀에 대해서 몇몇 출연자들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아직 협동조합이 낯선 시청자들이 자칫 협동조합을 돈벌이에만 연관시키지 않겠느냐는 지적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세속적인 개념의 ‘부자’라는 단어를 무턱대고 빌려오는 건 강변일 뿐이라는 걸 제작진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협동조합은 돈을 벌어야 하는 비즈니스라는 점에서 ‘부자’를 사전적인 의미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8편의 시리즈 동안 제작진들이 시청자들과 같이 나누고자 한 부자의 의미는 ‘협동으로 함께 잘 사는 새로운 부자’였다.

“그렇게 쌓인 관찰들이 비로소 저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었던 겁니다.”

카뮈의 단편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프리카에서 잡힌 여느 원숭이와 다를 바 없었지만 주인공 원숭이는 인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모방해 교수로 임용될 정도로 높은 위치에 오른다.

동물원에 평생 갇혀 있는 대신 인간의 삶을 살게 된 원숭이가 말하는 하나의 비결이 ‘관찰’이었다.
 
흔히 협동조합 운동의 성공에 필요한 요소는 리더의 존재라고 말한다. 확신을 가지고 희생을 감수하며 조합을 이끌어가는 리더는 당연히 필요하다.

국내외 사례에서도 협동조합을 만들고 유지시킨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협동조합을 더욱더 건강하게 만들어나가는 건 리더를 관찰하고 같은 방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평범한 조합원들이다.

또한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 한 협동조합이 성공할 경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을 관찰한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협동조합들이 탄생하기도 한다.

1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의 협동조합에 비해 한국 협동조합의 역사는 아직 짧다.

그리고 협동조합에 우호적인 제도와 문화를 가진 세계 각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 협동조합의 환경이 그리 녹록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많은 성공 사례가 나오고 협동조합 생태계 자체가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기 위해선 맞춤형 금융 지원체계나 협동조합연합회의 활성화 등 제도적인 보완과 함께 협동조합의 활용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방송에서 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방향을 제시하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특정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판단을 맡길 수는 있지 않을까.

장기 기획이었음에도 늘 그렇듯 촬영할 땐 조급했다.
 
하지만 협동조합을 만들고 가꿔나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어느 때부턴가 일상에서 증발해버렸던 여유와 온기가 배려있는 말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뭔가를 얻으려면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명제를 진리처럼 알고 살던 우리에게, 함께 사는 삶을 추구하는 이타적 인간, 상호적 인간의 존재는 아직 신선하다.

제작진은 본 프로그램을 통해 경쟁이 아닌 협동의 원리로도 시장경제하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협동조합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적인 대안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8부작이라는 다소 긴 구성에 미흡한 점과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협동조합이 조금이라도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구환

MBN 교양제작2부 PD



Posted by 미디어정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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