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방 최초의 보도 데스크: 전응덕

뉴스 보도의 초석 세운 방송 저널리즘의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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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후 부산에서 열린 환영 대회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전응덕. / 사진 출처: ‘이 사람아 목에 힘을 빼게’(전응덕 지음)-필자 제공


한국 방송 역사에서 민간 상업방송의 첫 보도 책임자는 전응덕이다.

그는 1959년 4월 한국 최초의 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이 개국하자 초대 보도과장으로 영입됐다.1

부산MBC 출범 당시 방송 분야별 책임자는 편성에 이수열, 제작에 오사량, 기술에 박인규, 그리고 보도에 전응덕이었는데,2 직제상으로는 ‘과’ 체제였으므로 전응덕이 한국 민방 최초의 보도과장이 된 것이다.

전응덕은 부산문화방송에 이어 서울에 소재한 2개 민간 방송사의 보도과장으로 스카우트됐다.

1963년 서울 문화방송 MBC의 2대 보도과장3을 지내고, 그 다음해인 1964년에는 신생 RSB(라디오 서울)에 초대 보도과장으로 부임했다.4

동일인이 신생 민방 3사의 보도 책임자로 활동한, 이 전설적인 사건은 모두 1960년 전후 5년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이는 그의 나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시절이었다.



민방 3사의 보도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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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특파원 시절 다른 매체의 기자들과 함께 도시바 공장을 방문한 전응덕(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그 옆으로 서울신문 서기원(전 KBS 사장), 한국일보 이원홍(전 KBS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 사진 출처: ‘이 사람아 목에 힘을 빼게’-필자 제공


한편 RSB가 TBC 동양방송으로 전환하면서 보도부가 신설되자 전응덕은 보도부 차장, 부장을 맡았는데, 후에 ‘부’ 직제가 ‘국’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보도국장이 됐다.

그는 한때 도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주요 일간지의 기라성 같은 유명 신문기자들과 활동하기도 했다.5

이와 같이 그는 한국의 방송 저널리즘을 개척하는 긴 여정 속에서 1974년 이사, 상무이사를 거쳐 전무이사로까지 승격됐고, 방송계를 떠나서는 광고 분야에 도전하여 오랫동안 협회장을 맡아 방송광고 발전에 초석을 놓기도 했다.

전응덕은 1954년 KBS 부산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했다.

그는 한국전쟁 후 육군에 지원해 부산에서 통신장교로 복무하던 중 청소년 시절부터 꿈꾸었던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하여 방송인이 됐다.

그는 기민한 행동, 명석한 머리를 기반으로 성심성의껏 방송 활동에 혼신을 다했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 그는 KBS 부산방송의 ‘노래자랑’ 공개 방송 프로그램을 3만 명의 군중 앞에서 진행하는 것을 비롯하여 각종 프로그램을 너끈하게 소화해 부산 지역의 명아나운서로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6

이렇게 종횡무진 활약하던 그를 1960년대 초기에 상업 방송국 제조가로 명성을 날린 정환옥이 앞장서 낙점했다.

신생 부산MBC 문화방송이 개국 준비를 하면서 전응덕을 보도 책임자로 영입한 것이다.
 
전응덕은 1959년 3월 우리나라 첫 민간 상업방송인 부산 MBC 초대 보도과장으로 스카우트되어 민방 보도의 기틀을 다져갔다.

그는 보도과장으로 재임하면서 전천후 방송인으로 활동했는데, 그 당시의 상황을 “보도 책임자, 기자, 아나운서, PD, 광고 섭외 등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했다”라고 회고한 바있다.7

그 시대 한국 사회는 전쟁의 후유증과 장기 독재에 매몰되어 굶주림에 허덕이던 국민소득 100달러 수준의 저개발국가였다.

전응덕은 민방 보도 책임자로 일하면서 평소 “방송이 국민 편에 설 때 어떠한 권력도 감히 손댈 수 없다”는 신념으로 방송 언론을 강조했다고 한다.8

그는 1960년 2월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선생이 서거했을 당시, 국영방송에서 기피한 장례식을 과감하게 중계방송했으며, 특히 3·15 부정 선거로 파생된 마산 시민들의 의거현장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기도했다.

마산의거 생중계 방송은 결과적으로 일본 NHK 등 외신기자들에게 커다란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특파원들이 본국에 급송하여 국제적인 특종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의 상황을 집중 보도하던 전응덕은 박정희 소장과 얽힌 일화를 자신의 자서전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박정희는 4·19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합동위령제가 부산 범어사에서 개최될 때 부산경남 계엄사무소장으로서의 조사에서 “여러분의 애통한 희생은 무능하고 무기력한 선배들의 책임인 바, 나도 여러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이 비통한 순간을 맞아 뼈아픈 회한을 느끼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흘린 고귀한 피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거는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길이 빛날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이는 경남지사와 부산시장의 자기 변명조의 조사와는 사뭇 대조적이었고 한다. 전응덕은 박정희가 1년여 후에 5·16쿠데타를 주도하고 주체 세력으로 활동할 당시의 두 사람과 얽힌 일화를 회억하기도 했다.9


‘한국 언론 100대 특종’에 선정

전응덕은 부산문화방송 보도과장 시절, 부산 지역의 시위는 물론 서울의 학생 시위까지 현장 중계함으로써 4·19혁명의 유발과 제2공화국 탄생에도 이바지한 셈이다.

이러한 그의 방송 보도는 월간조선이 1999년 선정한 ‘한국 언론 100대 특종’으로 뽑혔으며, 2001년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는 그에게 공로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2010년 11월 4·19기념사업회(회장 이기택)가 수여하는 4·19혁명 정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10

전응덕은 1963년 9월 신생 서울 MBC 보도과장이 되어 활동 영역을 중앙무대로 넓혀가게 됐다.

그는 문화방송 보도과장 시절 민정 이양에 따른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에서 국영방송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90%의 청취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MBC에서 스포츠 캐스터로서도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63년 12월에는 도쿄에서 벌어진 서강일 선수의 동양 주니어페더급 타이틀 매치를 독점 중계하기도 했다.

전응덕은 1964년 4월 새로 탄생되는 RSB 보도과장으로 이적한 후, 보도 책임자로서 개국 1기 기자(강용식 등)·아나운서(서기원 등) 선발11에 참여하는 등 보도 라인의 업무를 관장하면서 계속 스포츠 캐스터로 방송 일선에 나서기도 했다.

일례로 1964년 6월에는 도쿄 올림픽 축구 예선인 한국과 베트남 경기를 중계방송하기 위해 사이공에 파견되기도 했다.12

그는 최계환에 이어 라디오와 TV를 총괄하는 제2대 보도부장으로 승진했다.

역시 보도 책임자로 있으면서 권투, 프로레슬링, 축구 종목 등의 국내외 주요 경기를 중계방송하는 명스포츠 캐스터로 1인 2역, 1인 3역의 역할을 해나갔다.

전응덕은 1966년 2월 TBC 초대 주일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3년 여간 일본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때 동아일보의 유혁인(전 공보처 장관), 조선일보의 김윤환(전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 한국일보의 이원홍(전 문공부장관, KBS 사장), 서울신문의 서기원(전 서울신문, KBS 사장) 같은 베테랑 신문기자 등과 더불어 상주했는데, 그는 자사의 명예를 위하여 전력투구하며 혼신을 다해 눈부신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전응덕은 1969년 동양방송 TBC가 보도부를 보도국으로 승격시키면서 초대 국장으로 임용됐는데, 그 당시 아나운서를 포함한 보도국 요원은 89명이었다.13

이로써 그는 195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메이저 상업방송의 첫 보도 책임자인 보도과장, 부장, 국장 등을 역임한 이력을 갖게 된 셈이다.

특히 그는 TBC 보도국장 시절 TV 저널리즘의 새 지평을 열었던 새로운 포맷의 ‘뉴스전망대’를 탄생시켰으며, ‘뉴스기상도’ ‘TBC석간’ 등도 신설했다.

이때 그는 기자들에게 뉴스 디렉팅 교육을 시켜 뉴스 PD 시대를 개막시키기도 했다.

전응덕은 1974년 중앙일보·동양방송의 광고 담당 이사로 승진, 광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5년 세계광고전시회를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별관에서 개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고 차츰 광고업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해 갔다.

그는 중앙일보·동양방송 상무이사, 전무이사로 활약하다가 1980년 11월 신군부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TBC가 KBS로 흡수되면서 그 다음해 언론계를 떠났다.


1인 3역의 리더

전응덕은 1989년 11월 한국광고협의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광고매체, 광고주, 광고회사의 삼각 체제에서 ‘조정자적 리더’ 역할을 철저히 수행했다.

그는 1990년 이 협의회를 연합회로 발전시켜 명실상부한 한국광고단체연합회로 출발시켰다.

또한 이 연합회에 한국광고학회를 비롯하여 한국광고주협회, 한국신문협회광고협의회 등 10여 개 단체를 가입시켜 한국 광고 산업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한편 1996년에는 서울에 세계광고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전응덕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11월 대통령 임명직인 민선1기 한국방송공사 이사가 되어14 1993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방송 선배인 노정팔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서울대 총장을 지낸 고병익 등과 함께 공영방송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편 그는 1997년부터 KBS시청자위원, 위원장으로 활동한 바도 있으며, 2000년부터 다시 KBS 한국방송의 이사로 임명되어 방송 원로로서 후배 방송인들을 이끌어 가기도 했다.

전응덕은 근면, 성실, 노력하는 방송인으로 방송 초창기에 보도 저널리즘을 개척한 파이오니어였다.

그는 1950년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보도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뉴스를 비롯한 새로운 보도 프로그램을 신설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심축인 TV뉴스의 정착에 초석을 놓았으며 1960년대와 70년대 방송 저널리즘의 영역 개척에 크게 기여했다.

1932년 서울 출생인 그는 방송대상(1994), 국민훈장 모란장(2001) 등을 수상했으며, ‘방송, 신문에서 광고까지, 1인 3역의 뜨거운 50년’이란 부제를 붙인 자서전 < 이 사람아 목에 힘을 빼게 >라는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15

김성호
언론학 박사·전 광운대 정보콘텐츠대학원장



1 MBC 부산문화방송(1991), 부산문화방송30년사, p.93.

2 전응덕(2002), 이 사람아 목에 힘을 빼게, 중앙M&B, p.48.

3 문화방송(1992), 문화방송30년사, p.1206.

4 중앙일보·동양방송(1976), 중앙일보·동양방송 10년사, p.173.

5 김성호(2013), 한국 아나운서 통사, pp.363~364.

6 전응덕, 앞의 책, pp.39~44.

7 앞의 책 pp.50~51.

8 최화웅·백성기·곽근수(2011), 한국민방 개척사, 나남, p.68.

9 전응덕, 앞의 책, pp.105~112.

10 중앙일보(2010), “4·19혁명 정의상 받는 전응덕 본사 고문”, 11.30일자

11 중앙일보(1985), 중앙일보20년사-부 동양방송17년사, p.850.

12 전응덕(1964), “한월 축구중계를 마치고”, 방송 8월

13 한국방송공사(1977), 한국방송사, p.817.

14 노정팔(1995), 한국방송과 50년, p.675.

15 김성호(2013), 앞의 책, p.369.


Posted by 미디어정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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