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는 1인 미디어다. 속된 말로 블로그로 밥도 먹고 살아야 한다. 블로그에 대한 시간투자가 적절한 보수로 돌아와야 안정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다. 당연히 수익성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가 방문객 수에 신경을 쓰는 것도 바로 이런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블로그 ‘강춘의 남자, 여자’의 강춘은 남자와 여자를 그리는 사람이다. 여자보다 더 여자를 잘 아는 남자이기도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부부의 수만큼이나 수많은 사연들 속에서 사랑의 의미를 캐내는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그림으로 닦아 주는 화가이다.”


모 주간신문의 고정칼럼 담당 여기자가 내 블로그와 나를 동시에 묘사한 글이다. 내가 들여다보기에는 좀 낯간지러운 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거의 완벽하리만큼 나를 잘 표현한 글이라서 어디엘 가도 나는 이 기자의 말을 달고 다닌다.

인생 후반을 ‘암’이란 병마가 막아

2004년. 그해 후반기는 내 인생에서 절체절명의 시간들이었다. 11월 1일 아침 9시. 의사 다섯 명이 무려 13시간의 대수술로 내 입속의 ‘구강암’이란 병마를 송두리째 뽑아내었다. 그리고 나는 제2의 생명을 부여 받았다. 그해 10월 중순쯤 내 입속의 오른쪽 볼에 조그만 염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서울대병원에서 검색한 결과 ‘평편세포암’이란 악성 병마가 들어앉았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3개월 안에 운명을 달리할 수가 있다는 의사의 잔인(?)한 최후의 선언을 직접 받았다.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기 때문이었는지 의외로 충격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만큼 살아 온 것도 어디냐, 더 이상의 욕심은 나 자신에게도, 또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구차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위로했고, 평온을 찾으려고 했다.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잘 견뎌냈다. 다행히도 수술 결과가 좋아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입원 17일 만에 퇴원을 했다. 평소에 헬스클럽에서 체력운동을 한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지금은 수술 후유증으로 약간 입술 모양이 보기 흉하게 되었지만 사회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수술 후 요양시간이 필요했기에 마포의 디자인 사무실은 당분간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집에서 쉬어야 했다. 그러나 천성이 놀고는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누워서만 있을 수는 없었다. 사무실에서 컴퓨터 외 몇몇 장비를 가져와 집에다 설치했다.
과거 동아일보에서 23년을 미술부장으로 일한 보람을 펼칠 기회가 왔다. 당시 신동아, 여성동아, 음악동아, 과학동아 그 외 단행본의 편집은 컴퓨터를 이용해 내가 맡은 출판 미술부의 편집 작업으로 매달 발간되었다. 이제 그곳에서 닦은 컴퓨터의 포토샵과 일러스트의 실력을 온라인으로 보여줄 때가 자연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2004년 12월 마지막 달, 나는 사이버 세상에 뛰어들었다. 말마따나 제2 인생의 첫발이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내 그림을 인터넷 신문에 연재하는 일이었고, 그 연재물의 원고를 모아 책으로 출간한다는 목표였다. 책을 출간하기 위해선 경쟁력이 높은 출판시장의 벽을 넘어 틈새 공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기 위해선 그림 연재는 특이한 아이템으로 해야만 했다. 오래전부터 기획하고 있었던 나만의 아이템이 있었다.
그림과 글이 함께하는 부부 이야기다. 한 컷의 그림과 짧은 에세이 형식의 글로 마감 짓는 스타일의 그림 에세이였다.
인터넷 검색도 해 보았고 직접 서점에 나가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현 출판계에선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부부 이야기는 없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일단은 인터넷 신문을 정해야 했다. 순위 검색을 해 봤다. 1위는 ‘오마이뉴스’였다. 나는 주저할 것도 없이 연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내 뜻을 이야기했다. 며칠 후 운이 좋게도 좋다는 사인을 받았다. 연재는 바로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타이틀은 ‘우리 부부야, 웬수야?’였다. 따라서 블로그도 ‘오마이뉴스’에서 시작했다. 블로그의 타이틀은 ‘강춘의 남자, 여자’였다.

병마 이겨 내고 인터넷 세상으로 뛰어들다

블로그의 반응과 신문 연재의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네티즌들의 댓글과 블로그 이웃지기들의 응원은 내게 커다란 힘이며 용기를 주었다.
또한 나만의 독특한 그림과 글은 오프라인의 출판 쪽에서도 주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이 연재가 되고 얼마 안 있어 모 출판사에서 출판제의가 들어 왔다. 그리고 바로 계약을 했다.
2006년 7월엔 신문에 연재되었던 그림들을 모아 ‘우리 부부야, 웬수야?’ 타이틀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오마이뉴스’에서도 소위 인기 작가라는 명목으로 일본 여행까지 시켜 주었다. 그리고 2007년 창간 7주년 기념으로 ‘2월 22일상’ 수상도 했다. 같은 해 5월엔 신문에 연재되었던 ‘프러포즈메모리’의 연재물도 책으로 출간되었다.
한마디로 파워 블로거란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마이뉴스’의 독자들이 나를 ‘극보수’로 몰아 악성 댓글이 붙기 시작했다. 같은  블로거로 친하게 지냈던 몇몇 논객도 하루아침에 변신해 나를 공격해 왔다. 보수신문 동아일보 출신에다 생각하는 사고까지 ‘오마이뉴스’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찍혔다. 파문은 점점 확대되어 ‘오마이뉴스’ 연재 담당자와의 갈등도 생겼다. 잘나가던 그림이 베스트 대열에서 빠지는 횟수가 많아졌다.
불같은 성질의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댓글로 논쟁을 하고 싶었지만 ‘오마이뉴스’의 골수 논객들을 상대하기엔 나는 너무 힘이 없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연재도 끊고 블로그의 문도 닫아걸었다. 이념의 대립과 갈등은 나를 분노케 했다.
한두 달 쉬면서 블로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이제 그만 접을까 하는 고민도 했지만 결론은 시대의 첨단인 사이버 세상을 외면하고 지낸다는 것은 시대에 낙오가 되는 것 같았다. ‘블로그는 1인 미디어’다. 내 마음대로 글 올리고, 넋두리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더구나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일러스트레이터는 포토폴리오가 있어야 한다. 블로그는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좋은 클라이언트도 만날 수 있고 내 생계를 유지할 ‘잡’도 잡을 수 있다. 사이버 세상의 블로그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나는 점점 더 당당한 블로거로 태어나기를 원했다.

블로그를 조인스로 옮기다

2007년 8월. 나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내 짐을 이사할 블로그를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마음에 맞는 곳은 찾기가 어려웠다. 신문 출신이라 될 수 있으면 신문사에서 하는 블로그를 찾기로 했다. 기왕이면 내가 머물렀던 동아일보에 정착하려 했지만 당시에는 블로그가 없었다. 아쉬웠다. 조선일보의 ‘조블’도 기웃거렸지만 비교적 자유 분위기가 풍기는 중앙일보의 블로그 ‘조인스’를 노크했다. 중앙일보와의 인연은 1968년 서소문 시절부터였다. 당시 중앙일보 건물 10층에서 삼성 주관으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하청작업을 시작했었다. 그 첫 번째가 ‘황금박쥐’ 제작이었다. 당시 나는 키애니메이터로 그 제작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조인스 블로그에서의 타이틀도 변함 없이 ‘강춘의 남자, 여자’였다.
행운인지 ‘조인스’에 가입한 지 몇 달 안 되어 ‘다음뷰’와의 제휴로 내 포스트가 ‘다음’의 네티즌들에게도 선을 보이게 되었다. 포스팅은 일주일에 다섯 꼭지는 정확히 올렸다. 혹시라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빠질 경우를 생각해서 일주일분은 사전에 미리 포스팅해 두었다. 단골 방문객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내 성의였다. 그런 노력의 대가는 확실했다. 블로그 일일 방문객은 갈수록 폭발적이었다. 일일 평균 2만∼3만 명이 찾아왔고, 어떤 날은 25∼26만 명이 다녀가기도 했다. 현재 2년 3개월 만에 누적 방문객 수가 660만 명을 넘었다. 아마도 12월까지는 800만 명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스스로 블로거로서 자부심을 갖는다.

여성 방문객들에게 더 인기

내 블로그를 찾는 방문객은 주부들이 많다. 블로그의 성격이 대체적으로 여성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우습게도 그 때문에 숱한 남자들에게 댓글을 통해 핀잔을 자주 받았다. 반면 여성들로부터는 공개적으로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받은 적이 많다. 주로 양성평등 면에서는 확고한 내 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도 해 본다.
그렇기 때문인지 블로그 쪽지를 통해서 사연을 보내오는 주부들이 많다. 내 블로그를 계속해서 눈팅만 하다가 용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여성들이다. 사연은 대부분 시부모나 남편과의 불화로 생기는 갈등에 대한 하소연들이다. 해결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답신을 해야 하는 나 자신도 당황할 때가 많다. 과연 어떤 길로 안내를 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그러나 방법은 있었다. 다음날 나는 그녀의 사연을 그림으로 포스팅해 네티즌들에게 해결책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답신을 보낸다. 어느 주부는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시어머니가 매일 찾아와 시시콜콜 간섭을 해서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고 대처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그녀는 내 블로그에 자주 댓글을 달던 소위 왕팬이었다. 긍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결국엔 결혼 한 달 만에 남편과 이혼을 하고 말았다. 남편 역시 엄마 편을 들어 공격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참으로 냉혹한 세상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블로그는 1인 미디어다. 속된 말로 블로그로 밥도 먹고 살아야 한다. 블로그에 대한 시간투자가 적절한 보수로 돌아와야 안정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다. 당연히 수익성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가 방문객 수에 신경을 쓰는 것도 바로 이런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블로그 운영을 위해선 본격적인 기업 광고 유치가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 블로그가 상주해 있는 ‘조인스’는 개인이 쓸 수 있는 배너 공간이 하나로 한정되어 있다. 아주 불리한 조건이다. 그러기에 어느 정도의 수익성이 있는 구글의 애드센스와 다음의 애드클릭스를 유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할 수 없으면 편법을 쓸 수밖에. 개인에게 주어지는 배너 공간의 디자인을 다양화하는 일과 포스트난에서의 광고 자리를 만들어 링크시키는 방법이다. 몇 번 시도를 해 보았는데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남은 일은 대기업의 광고 유치다. 쉬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한번 부딪쳐 보는 것이다.

블로그에 광고유치, 수익성도 봐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익성도 없는 블로그에 왜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 매달리는지 알 수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나의 경우는 다른 블로거와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내 블로그는 곧 나의 포토폴리오다. 클라이언트들은 내 블로그를 펼쳐 보며 적지 않은 원고 청탁을 해 온다. 그래서 나의 블로그에는 각종 카테고리가 그림 스타일별로 잘 배열되어 있다. 그 덕에 비교적 블로그 덕을 많이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블로그는 절반의 성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책이 두 권이나 나왔고, 고정적으로 오프라인의 주간신문과 온라인의 인터넷신문 몇 곳에 고정 원고료를 받고 연재물을 싣고 있다. 또한 각종 사보와 월간지 등에서 부정기적으로 원고 청탁들이 들어온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이 아직 수입 면에서는 만족할 수 없을뿐더러 생활적인 면에서도 결코 안정적이지 못하다.
바로 이런 면들이 블로거들의 고민이다. 그러나 블로그의 앞날은 대단히 밝다고 생각한다. 외국에서는 많은 기업들이 고정 방문객 수가 많은 파워 블로거들과 연 계약을 하여 신제품을 선보이고 또한 블로그에 광고를 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얻는 추세로 가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주방기구 회사 같은 곳에서는 신제품이 나오면 요리 블로거들을 동원해 광고를 한다. 블로거들은 거기에 따른 일정액의 수입을 얻고 있다. 그밖에 카메라, 자동차, 의류 등의 기업들도 파워 블로거들을 이용하는 사례가 일상화되고 있다.
실제로 포털 ‘다음뷰’에 등록된 본격적인 블로거 수는 현재 16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오늘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글을 쓰며 자신의 글이 베스트 반열에 올라 많은 방문객을 사로잡기를 꿈꾼다. 블로그도 이제 바야흐로 본격적인 경쟁시대에 들어섰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12월호 미디어포럼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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