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솔깃한 게 있었다. 사라진 안중근 의거 필름에 대한 것이었다. 100년 전 하얼빈역 의거 당일을 담은 현장 동영상이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거다. 이토를 저격한 그 순간과 안 의사의 모습이 또렷이 살아 있는 동영상을 찾아내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


저격 장면 못 찾았지만,
원본 영상은 분명히 있다

KBS 역사스페셜 ‘안중근 의거 100년, 이토 저격 영상을 찾아라’ 제작기

황대준  KBS 역사스페셜 PD



이번 프로그램은 부채 같았다. 그것도 10년이나 이자가 붙은. 그래서 시작부터 힘들었다.
1999년 10월 24일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입사 6년 만에 처음으로 6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날이다. ‘KBS일요스페셜 - 발굴 일 외무성 비파일, 일본은 왜 안중근을 죽였나’라는 다소 긴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그만큼 개인적으로 각별했다. 그해는 안중근 의사 탄생 120년, 의거(1909년 10월 26일) 90년이 되는 때였다. 중국으로 일본으로 발품을 팔며 허덕거렸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우리들의 영웅, 안중근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 내가 서 있었다. 운명적 만남 같았다. 그리고 꼭 10년이 지났다.

의거 100년, 무엇을 방송하나?

사실 올 초부터 안중근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의거 100년을 맞는 특별한 해인데 뭔가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고. ‘당연하지! 안중근인데’라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나는 못하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아이디어가 특별히 없었다. 먼 이국땅 독일에서 고려인들이 불렀던 안중근의 노래를 추적해 볼까? 그 고려인들은 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연을 좇다 보면 또 다른 안중근이 나올 것 같았다. 독일 훔볼트대학에 아직도 남아 있는 당시의 안중근 노래 음반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사실 이 안중근의 노래 이야기는 10년 전 일요스페셜 제작 당시 발굴해 일부 내용이 방송되었다. 의거 100년 기획으로는 왠지 신선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 100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안중근의 재판을 재구성해 볼까? 재판 과정을 통해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은 안중근의 혜안과 그의 동양평화론을 주목해 보는 건 어떨까? 애당초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안중근이 던진 오늘의 화두는 무엇인가? 새로운 내용은 뭐지? 새로운 게 없다면 왜 만들지? 툭툭 던져지는 질문 앞에 스스로 답할 수 없었다. 시간은 대책 없이 흘러갔다.
올해는 유난히도 신문과 잡지, 방송에서 앞다퉈 가며 안중근을 다뤘다. 안중근은 2009년의 키워드처럼 보였다. 하이라이트는 지난 8월의 광복절 기획으로 KBS 보도국의 특집다큐멘터리 ‘코레아우라! 대한국인 안중근’과 SBS 스페셜의 ‘의거100년, 대한국인 안중근’ 방송이었다. 오랜 공을 들인 작품들이었다. 그 두 편의 방송을 보고 난 후 잠을 더 설쳤다. 나는 왜 안중근 아이템을 기획하고 있나?
역사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특히 가슴이 뛰지 않으면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당대 역사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를 찾았다. 이곳엔 안중근 연구로 학위를 받은 신운용 박사가 있다. 그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연구자의 마음엔 안중근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고 난 그 열망에 감전됐다.
‘의거 100주년을 바로 앞두고 안중근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내용이 좋을까? 이미 시청자들은 그의 빛나는 의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두 편이나 봤는데 어떻게 의거 100주년을 기릴 것인가’를 두고 여러 번 토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제강점기 안중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솔깃한 게 있었다. 사라진 안중근 의거 필름에 대한 것이었다. 100년 전 하얼빈역 의거 당일을 담은 현장 동영상이 있다는 얘기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토를 저격한 그 순간과 안 의사의 모습이 또렷이 살아 있는 동영상을 찾아내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피가 끓는 듯했다.

러시아인이 찍은 동영상이 있다?!

100년 전 당시엔 영화나 동영상을 일반 스틸 사진과 비교해 ‘활동사진’이라 불렀다. 안중근 의거 활동사진에 대한 기사가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1909년 11월 21일자에는 ‘한 러시아인이 촬영한 이 활동사진엔 안중근이 뛰어나와 7연발 단총으로 이토를 저격하는 광경과 이토의 비서관 등이 쓰러지는 모습이 정밀히 찍혀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필름은 일본 영자신문 자판판프레스 사원 다노모기(賴母木)가 1만 5,000원에 매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간다고 소개했다. 충격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 기사는 분명히 안중근 의거 동영상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것이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우리는 이 동영상을 왜 몰랐을까?
최근까지 알려진 하얼빈역 의거 당일의 동영상은 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면은 하얼빈역에 기차가 들어오는 영상이다. 두 번째 장면은 이토 일행이 플랫폼을 걸어오는 영상, 마지막 장면은 안중근 의사가 끌려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영상이다. 이 동영상은 1995년 NHK가 만든 다큐멘터리에 들어 있다. NHK 프로그램의 이 세 장면이 편집된 것이라면 어딘가에 원본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이토 저격 장면은 없는 걸까? 더구나 아수라장이 되었을 하얼빈역의 상황은 왜 한 컷도 없지? 의문이 쏟아졌다.
즉각 동영상 추적에 나섰다. 우선 1995년 NHK 다큐멘터리에 쓰인 자료 원본에 대해 NHK에 문의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에 등장한 구매자 ‘자판프레스 다노모기 씨’의 존재를 추적했다. 또 안중근 의거 활동사진에 대한 당시 일본 언론들의 기록을 샅샅이 훑어야 했다. 일본 인터넷 검색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화로 들은 NHK의 답변은 비관적이었다. 다시 일본 PD특파원을 통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의 영상에 대해 계속 알아봐 주길 부탁했다. 수소문 끝에 다노모기 씨의 묘는 찾았는데 그의 후손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실마리는 오히려 당대의 일본 언론들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100년 전 서울에서 발행된 일본신문, 경성신보에서 몇 가지 주요 단서들을 찾았다. 특히 1910년 2월 13일자에는 안중근 의거 활동사진을 직접 찍은 러시아 활동사진사 코프치에프의 실제 목격담이 실렸다. 그는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의 모든 상황을 촬영했다고 했다. 도쿄 아사히신문에선 더 놀라운 기록이 발견되었다. 1910년 2월 2일자의 광고란에는 2월 1일부터 6일까지 국기관이란 곳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조난 활동사진(동영상)이 상영된다는 광고가 실려 있다. 이 광고기사엔 의거 당일 카메라맨이었던 러시아 육군 활동사진사 코프치에프가 초청연사로 되어 있다. 앗! 이럴 수가. 국기관은 일본의 국기(國技)인 스모 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안중근 의거 동영상은 분명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것도 당대 최고가인 1만 5,000원, 오늘날로 치면 약 2억 원에 팔렸다. 구매한 사람의 이름이 밝혀져 있고 일본에선 대중들에게 공개상영도 했다. 신문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필름의 길이는 최소 500척(尺)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기술적으로 계산해 봐도 적어도 5~10분 분량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단 세 컷의 30초도 되지 않는 영상만 남아 있다.
1909년 10월 26일 그날의 하얼빈역 활동사진이 공개 상영된 도쿄 국기관을 찾았다. 국기관 비망록에는 정확하게 1910년 2월 1일부터 6일까지 이토 조난 활동사진대회가 열렸다고 적혀 있다. 비싸게 치른 대관료도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활동사진과 관련된 다른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허탈했다. 일본인들의 기록엔 지긋지긋할 정도로 꼼꼼한 내용들이 있게 마련인데. 1909년 설립 당시의 사진과 당시 경기장 실내 사진을 얻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 일본 최대의 명물이었던 스모경기장인 국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2만 명 정도. 6일간 어림잡아도 12만 명이 관람한 것이다.

자판프레스 다노모기 씨를 찾아서

활동사진 필름 원본의 구매자인 다노모기(賴母木)는 이때 상업적으로도 흥행에 성공했다. 영자신문 자판프레스 사원 다노모기, 그를 쫓아 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다노모기가 묻혀 있는 묘지 관리소에 제작진의 취재목적과 연락처를 남기고 후손과의 연락을 정중히 부탁했다. 후손을 만나기만 하면 생각보다 쉽게 활동사진 필름 원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감이 때때로 들뜨게 했다.
그러면 활동사진을 구입한 회사 ‘자판프레스’는 어떤 신문사였을까? 100년 전 영자신문사였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대 영자신문이 몇 개나 되겠나 싶었지만 일본의 근대 언론자료 어디에도 ‘자판프레스’는 보이지 않았다. 유령회사인가? 신문사로 위장한 군부세력이었나? 도대체 오리무중이었다. 근대 신문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요코하마의 신문박물관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자판프레스’는 신문사가 아니라 신문대리업을 하는 회사였다. 그리고 다노모기는 ‘자판프레스’의 사장이었으며 그 후로도 여러 언론사 사장을 역임했다는 것. 그런데도 그에 대한 활동기록은 거의 없다. 의문투성이의 사람이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왜 하얼빈 의거 동영상(활동사진)을 구입한 걸까?
취재 중 다노모기 손자라는 분의 연락이 왔다. 집을 찾아와도 좋다고 했다. 70대 손자에게 들은 할아버지 다노모기에 대한 이야기는 원망이 많이 섞여 있었다. 말년에 중의원을 9번이나 연속으로 지냈으나 할아버지가 남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렵게 구한 사진 두 장을 건넬 뿐이었다. 안중근 동영상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고 정말 놀라워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 동영상을 구입하게 된 다른 배후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물론 물증은 없었다. 이후로도 언제든 도움을 주겠다는 손자의 말을 들으며 돌아서야 했다.
이렇게 끝내야 하나? 여기저기 수소문해 봐도 시원한 대답은 없었다. 대부분 동영상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분명히 영상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영상이 100년 전의 활동사진임을 모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안중근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어딜 가든 막혔다. 맘속 깊은 곳에선 자동으로 기도가 나왔다. 제발 한번만 도와주세요. 귀국 날짜가 코앞이다.
일은 엉뚱하게도 원점에서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도쿄 PD특파원 선배의 전화 목소리가 높았다. NHK가 자료의 저작권자를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아! 잘 모르겠다더니 왜 이제야?’ 우리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NHK가 야속했다가도 다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르쳐 주는 게 어디야. 모른다고 우기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NHK가 가르쳐준 자료 원본은 1941년 제작된 뉴스영화였다. 제목은 ‘뉴스영화 발달사, 약진의 흔적’이고 제작사는 아사히신문사다. NHK는 이 자료를 편집해 1995년 다큐멘터리에 썼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사에 이 영상의 존재를 물었다. 신문사에서 뉴스영화를 만들었다면 최소한 영화필름은 보관하겠지 싶었다. 영화자료는 자회사인 텔레비전아사히영상주식회사에 있다고 했다. 바로 달려갔다.
텔레비전아사히영상주식회사 담당자와 연결이 됐다. 좁은 사무실에서 인터뷰 촬영만 허락했다. 100년 전의 하얼빈역, 안중근 의거 당일 영상이 담긴 ‘뉴스영화 발달사, 약진의 흔적’을 보고 싶다고 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담당자는 뉴스영화는 원본이 필름 형태인데 보여줄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복사본은 있다고 했다. 제작진과 같이 복사본을 시사하는  모습을 촬영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으나 정중히 거절당했다. 영상구입만 가능하다고 했다. 전체 분량은 너무 비쌌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부분의 영화자료 일부를 VHS로 구입했다.

포박당한 안중근, 얼굴과 밧줄까지 보여

구입한 영상을 바로 시사했다. NHK가 1995년 이 자료로 편집했다면 또 다른 영상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혹시 이토를 저격한 장면이 짧게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안중근의 다른 어떤 모습이라도? 맥박이 빨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뉴스영화 발달사, 약진의 흔적’ 타이틀이 뜨고 100년 전 도쿄의 풍경들이 조금 나오고 장중한 음악과 함께 이토의 사진이 나온다. 드디어 기차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오는 장면이다. 그리고 어?… 아! … 저격 장면은 없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장면들이 좀 길었다. 또 뭔가 이상했다. 잠깐 스쳐가는 플랫폼 장면. 분명 못 보던 장면인데. 그랬다. 이 뉴스영화엔 새로운 한 컷이 더 들어 있었다. 이럴 수가! 눈이 확 커지는 듯했다. 새로운 장면은 기차가 도착한 곳에 러시아 군대가 도열해 있는 모습이었다. 냉정하게 따져 보았다. NHK 자료는 3컷으로 30초도 안 되는데, 아사히 자료는 4컷으로 전체 길이도 40초나 된다. 아니! 그러면 이 뉴스 필름도 편집된 것이 분명한데 또 다른 원본이 있다는 반증 아닌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편집된 영상들은 극히 일부다. 100년 전 그날 하얼빈역에서는 안중근의 의거로 대혼란이 일어났다고 했다. 의거 현장을 찍은 러시아 활동사진사 코프치에프는 그 모든 장면을 담았다고 했다. 당시 신문들이 문제의 활동사진(안중근 의거 동영상)을 소개한 기사에도 그날의 상황은 적나라하다. 그럼 왜 지금 남아 있는 동영상 자료는 이토 저격 장면 같은 주요 영상이 빠져 있을까? 그리고 혹시 우리가 입수한 뉴스영화는 1941년 원본이 맞는 걸까? 아무래도 1941년 판 ‘뉴스영화 발달사, 약진의 흔적’ 필름 원본을 추적해야 했다. 일본 촬영이 끝나갈 무렵 가까스로 필름 원본의 소장자를 찾아냈다. 600㎞를 한숨에 달려 고베의 개인영화자료관을 찾았다. 빽빽이 들어찬 4,000여 점의 필름이 수장고를 메우고 있었다. 소장자가 1941년 판 ‘뉴스영화 발달사, 약진의 흔적’ 필름 원본을 내놓았다.
필름 앞에서 온몸을 감싸는 전율이 느껴졌다. 혹시나 이 필름 속에 저격 영상이 담겨 있진 않을까? 침이 말랐다. 소장자는 우리의 목마름을 아는 듯 곧바로 원본 상영을 해 줬다. 필름을 영사기에 감을 때 그의 손도 약간 떨렸다. 필름 상태는 깨끗했다. 이제까지 본 것 가운데 가장 선명한 영상이었다. 이토의 얼굴과 하얼빈역이 나올 땐 온몸이 뻣뻣해졌다. 아쉽게도 우리가 구입한 자료 영상과 똑같았지만 대형 화면의 영화필름은 포박당한 안중근의 얼굴과 밧줄까지도 보인다. 코가 시큰거린다. 내 앞에 안중근이 보이는데…. 추적은 여기서 멈췄다. 

저격 장면 담은 원본이 어딘가에 있다

결과적으로 안중근 의거 동영상, 이토 저격 영상을 찾는 데 실패했다. 성과가 있었다면 다만 의거 직전 하얼빈역의 상황을 전해 주는 새로운 장면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찾은 동영상이 40초 정도의 길이로 지금까지 알려진 영상보다 더 길다는 것이다. 이 뉴스영화는 기록에 나온 것처럼 필름의 원본이 어딘가에 존재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당연히 아직 9분여로 추정되는 남은 영상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안중근 의거 100년을 맞는 오늘 우리가 그에게 빚진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일일 것이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12월호 언론현장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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