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보도의 원칙하에서도 실명보도가 항상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판례는 시장, 농림부장관, 국립대학교 교수, 전직 언론인, 도의회의원, 검사 등을 공인으로 보았고 이런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범죄보도와 관련해서는 국민들의 정당한 관심 사안이라 하여 실명으로 보도하는 것을 허용했다.




익명보도와 실명보도 중 기자들이 선호하는 것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 범죄보도를 하는 데 지켜야 할 것 중에는 ‘익명보도의 원칙’이 있다. 익명보도의 원칙이란 공적 인물이 아닌 사인의 범죄보도에서 범죄자의 실명을 공개하지 말라는 것이다. ‘범죄’에 관한 보도는 일반적으로 공익성이 인정되지만, ‘범죄자’에 관한 보도는 공익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실명보도는 자유롭지 못하고, 기자는 어떤 사안을 보도하는 데 당사자의 실명을 공개해도 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불편했던 실명보도에 대해 지난 9월 10일 대법원은 “그 실명을 보도함으로써 얻어지는 공공의 정보에 대한 이익과 원고의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이 유지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을 비교형량할 때 전자의 이익이 후자의 이익보다 우월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실명보도를 감행한 언론사를 옹호한 것이다. 이로부터 5일 후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모든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공익 목적의 보도라면 피의자의 실명을 공개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인터넷 신문사는 기사 제목을 다음과 같이 뽑기도 했다.

“공익성 강한 언론보도, 피의자 실명 공개해도 돼”

과연 이번 대법원 판결을 기점으로 공익성 강한 언론보도에는 피의자의 실명을 공개해도 되게 된 것일까? 해당 판결문을 입수하여 읽어본 결과 판시사항 중에는 실명보도가 허용되는 요건을 자세히 언급한 점 둥 몇 가지 의미 있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9월 15일을 전후하여 쏟아졌던 기사들이 주목했던 점, 즉 ‘익명보도의 원칙’의 적용과 관련해서도 진일보한 판단을 내린 것인지에 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상 판결(대법원 2009. 9. 10. 선고 2007다71 판결)이 언론에 실명보도의 여지를 좀 더 넓게 허용했는지에 관해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사건 개요

1. 거액의 횡령으로 얼룩진 상조회 운영
2001년 7월 MBC ‘PD수첩’ 제작진은 ‘죽음 부른 사금고 ○○원 횡령사건’ 편을 방영했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전라남도 나주에 있는 음성 나환자 정착촌인 ‘○○원’이었다.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나환자였기 때문에 외지인의 출입도 많지 않고 폐쇄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원 정착민들은 자체적으로 상조회를 조직, 운영했는데 A가 그 이사장직을 맡았다.
A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안 상조회 운영은 파행을 거듭했다. 관련 법률을 위반하면서까지 여신 및 수신행위를 한 것으로 모자라, 부실대출에 예금기장을 누락하고 예금잔고 역시 소진해 버렸다. 물론 파행적인 상조회 운영의 배후에는 임직원들에 의한 배임과 거액의 횡령이 있었다.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고 아는 것 없는 정착촌 주민들에게로 돌아갔다. 피 같은 돈을 상조회에 맡겨 두었던 회원들은 이자는커녕 원금도 찾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생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또 삶을 비관하여 3명이 자살을 기도, 이 중에서 2명이 사망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A는 상조회의 최고 관리·감독자인 이사장으로서 설령 본인이 직접 횡령이나 배임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조회 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한 법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주민들 역시 이런 A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원 사건은 PD수첩 방영 이전부터 다른 언론을 통해 이미 국민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수사기관 역시 수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문제는 다른 언론보도와는 달리 이 사건 방송 도중 A의 실명이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A의 실명 공개는 주민들이 A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며 시위하는 장면 등을 방영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제작진에서 하고자만 했다면 모자이크 처리를 통해 실명이 공개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실명 공개를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연 A의 실명 공개는 적절한 것이었을까?

2. 원고 패소로 끝난 명예훼손 소송
A는 3년의 시효가 거의 만료되어 가던 2004년 6월에 이르러서야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A는 주장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권리의 침해, 즉 명예훼손뿐만 아니라 사생활의 비밀, 성명권, 음성권 침해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듬해 9월 선고된 1심 판결에서 A의 청구는 전부 기각되었다(광주지방법원 2005.9.28. 선고 2004가단45689 판결). A의 항소로 시작된 2심 재판 역시 A의 패소로 끝났으며(광주고등법원 2006.12.7. 선고 2005나9561 판결),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2년 8개월 만에 끝난 상고심 재판에서도 A는 패소하고 말았다.


판결 요지

가. 범죄 사실의 보도와 함께 피의자의 실명을 공개하기 위해서는 피의자의 실명을 보도함으로써 얻어지는 공공의 정보에 대한 이익과 피의자의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이 유지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을 비교형량한 후 전자의 이익이 후자의 이익보다 더 우월하다고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후자의 이익이 더 우월하다고 판단되더라도 그 보도의 내용이 진실과 다를 경우 실명이 보도된 피의자에 대한 법익침해의 정도는 그렇지 아니한 경우보다 더욱 커지므로, 언론기관이 피의자의 실명을 공개하여 범죄 사실을 보도할 경우에는 그 보도내용이 진실인지를 확인할 주의의무는 더 높아진다고 할 것이다.

나. 여기서 어떠한 경우에 피의자의 실명보도를 허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공공의 정보에 관한 이익이 더 우월하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는 일률적으로 정할 수는 없고, 범죄사실의 내용 및 태양, 범죄 발생 당시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배경과 그 범죄가 정치·사회·경제·문화에 미치는 영향력, 피의자의 직업·사회적 지위·활동 내지 공적 인물로서의 성격 여부, 범죄사건 보도에 피의자의 특정이 필요한 정도, 개별 법률에서 피의자의 실명 공개를 금지하는 규정이 있는지 여부, 피의자의 실명을 공개함으로써 침해되는 이익 및 당해 사실의 공표가 이루어진 상대방의 범위의 광협 등을 종합·참작하여 정하여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고도의 해악성’을 가진 중대한 범죄에 관한 것이거나 사안의 중대성이 그보다 다소 떨어지더라도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측면에서 ‘비범성’을 갖고 있어 공공에서 중요성을 가지거나 공공의 이익과 연관성을 갖는 경우 또는 피의자가 갖는 공적 인물로서의 특성과 그 업무 내지 활동과의 연관성 때문에 일반 범죄로서의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서 공공에 중요성을 갖게 되는 등 ‘시사성’이 인정되는 경우 등에는 개별 법률에 달리 정함이 있다거나 그 밖에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공공의 정보에 관한 이익이 더 우월하다고 보아 피의자의 실명을 공개하여 보도하는 것도 허용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기사 쓰기 적용

지난 1998년 7월 14일 대법원에서 “범죄 자체를 보도하기 위하여 반드시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의 신원을 명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고,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에 관한 보도가 반드시 범죄 자체에 관한 보도와 같은 공공성을 가진다고 볼 수도 없다”고 선고한 이래 익명보도는 범죄보도의 원칙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익명보도의 원칙하에서도 실명보도가 항상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판례는 시장, 농림부장관, 국립대학교 교수, 전직 언론인, 도의회의원, 검사 등을 공인으로 보았고 이런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범죄보도와 관련해서는 국민들의 정당한 관심 사안이라 하여 실명으로 보도하는 것을 허용했다. 문제는 공인과 사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6급 이하의 공무원은 공인에 해당할까? 또 변호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공인과 사인 중 어디에 해당할까? 최근 대법원에서는 정신과의원을 운영하는 의사를 사인으로 보고 그의 신원에 관한 사항을 명시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원고는 평범한 정신과 의사에 불과하여 공적인 인물이라 볼 수 없는 점, 그 범죄의 내용이나 성격에 비추어도 … 원고의 신원에 관한 사항은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라 할 수 없으므로”(대법원 2007.7.12. 선고 2006다65620 판결)
 
이러한 판례의 태도에 대해서는 ‘공인인지 여부를 공익성 판단에서 고려해야 할 하나의 요소로 삼는 것은 모르지만, 공인인지 여부만에 의해 공익성을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이연갑, 실명보도와 불법행위책임, 법조 2009년 6월호, 347쪽). 즉 정신과 의사의 범죄는 그로 인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위해가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실명을 공개하는 쪽이 오히려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2007다71)은 이러한 비판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번 사안에서 대법원은 범죄자의 실명 등 인적 사항이 공중의 정당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당사자가 공인인지 여부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당사자의 공인성 유무 외에도 ①범죄사실의 내용 및 태양 ②범죄 발생 당시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배경 ③범죄가 사회에 미친 영향력 ④피의자의 직업, 사회적 지위 및 활동 ⑤개별 법률에 피의자의 실명 공개를 금지하는 규정이 있는지 여부 ⑥공표가 이루어진 상대방의 범위의 광협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이러한 판례의 태도변화는 결과적으로 실명보도가 가능한 범위의 확대로 이어졌다고 본다. 고도의 해악성을 가진 중대범죄가 아니더라도 비범성 혹은 시사성을 가진 사건의 당사자에 관해서는 실명보도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물론 종전의 기준에 따르더라도 공적 인물의 범주를 넓혀 A를 포섭함으로써 실명보도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가 공인이 아니라서 실명보도가 불가하다는 종전의 태도대로라면 이번 사안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실명보도에 관해 의미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언론은 여전히 실명보도를 하는 데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익명보도의 원칙이 이번 판결로 폐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판결의 의미를 ‘실명보도가 허용되는 대상자 중 하나(상조회 대표)를 새롭게 발굴했다’는 정도로만 최대한 작게 부여하고 싶다.



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12월호 법을 알고 기사 쓰기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