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현장_제작기>

구성으로 시작해서 구성으로 끝난 작품
EBS 다큐프라임 - 바퀴 2부작 문동현 EBS 평생교육본부 기획다큐팀 PD


그날 달은 꽉 차 있었다.
창백한 달빛은 아파트 단지의 현란한 불빛들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겨울 밤 카메라는 달에서 서서히 틸다운(Tilt down)한다.
시커먼 형체의 실루엣, 달빛에 또렷이 살아나는 윤곽선들이 바스락거리고 있다.
카메라가 서서히 줌인(Zoom in)해 들어간다. 고조되는 긴장음….
마침내 드러나는 실루엣의 정체.
수백, 수천 마리가 엉켜 한 덩어리처럼 꿈틀거린다.
거대한 바퀴벌레 떼….
2008년 겨울, 퇴근길에 우연히 올려다본 보름달에서 떠오른 콘티다.
나는 아파트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콘티를 적고 그렸다.
‘다큐프라임-바퀴’ 제작은 꽤 낭만적으로 시작되었다.


바퀴 냄새에 익숙한 전문가가 되다   2009년 초봄에야 바퀴를 만날 수 있었다. 수소문 끝에 전라북도 부안의 한 곤충전시관에서 바퀴를 대량으로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은 수조 가득한 바퀴벌레 떼…. 미국바퀴, 또는 이질바퀴라고 부르는 대형종인데, 3~4센티미터 남짓 되었다. 수백 마리가 한데 뒤엉켜 내는 움직임과 소음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코와 뇌를 찔러 오던 특유의 독한 냄새, 토할 뻔했다. 숙련된 바퀴 방제 전문가들은 냄새만으로도 집안의 바퀴 서식처를 찾아낸다고 하는데, 제작진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8개월여의 촬영이 끝나갈 무렵 조연출과 한 식당 앞을 지나는데 익숙한 냄새가 났다. 우린 근처에 바퀴들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이제 전문가가 다 되었다고 농담을 했다. 초봄에 얻어온 바퀴 두 통이 한여름엔 대형 수조에 가득 찰 정도로 늘어났다. 공간과 먹이양에 맞추어 스스로 개체 수를 조절하는 탓인지 방송이 끝난 지금은 처음 올 때의 양과 비슷해졌다. 아무 데나 풀어 줄 수도 없고, 소중한 출연자(?)들을 죽일 수도 없고, 분양 받아서 키우겠다는 사람도 없어서 고민 중이다.
 
나는 다큐멘터리가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장르라고 생각한다. 사실의 재가공이 아닌, 사실(fact) 자체의 노출이라는 내재적 속성이 그렇다. 하지만 나의 다큐멘터리는 보수적이고 정형화되어 있다. 소재를 길어 올리는 우물이 좁고, 바라보는 관점은 평이하며, 풀어 가는 방식도 어깨 너머로 배운 것뿐이다. 나는 늘 내 부족한 상상력에 갈증을 느꼈다.

2008년에 ‘다큐프라임-마리온 이야기’를 제작했다. 100여 년 전 멸종된 세이셀코끼리거북의 실화를 드라마적으로 재구성한 다큐멘터리였다. 거북의 생태나 멸종의 역사 같은 정보들은 최소화하거나 후반부에 별도의 신으로 빼고, 마리온이라는 주인공 거북의 비극적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기존의 구성형 포맷과는 다른, 이야기 중심의 다큐멘터리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다만 2주라는 짧은 기간에 아프리카 현지에서 올로케이션으로 동물 드라마를 찍다 보니 영상의 깊이까지 만족스럽게 나오진 못했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생태를 깊이 있게 보여 주면서도, 정보 구성이 아니라 드라마적인 이야기로 끌고 나가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다큐와 드라마 포맷을 혼합
‘바퀴’는 ‘마리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바퀴의 생태는 시간적으로 구성하였다. 암수가 만나고 짝짓기하고 알 낳고, 퍼져 나간다. 이 과정에서 바퀴에 관한 자연다큐적 생태 정보들을 녹여 넣었다.

바퀴들은 결국 발각되어 일망타진당하지만, 죽어 가는 바퀴들은 알을 낳아 후대를 기약한다. 이 마지막 반전은 인간과 바퀴의 대결에서 결코 인간이 승리할 수 없지만, 바퀴에게도 승자의 영광이 아니라 위태로운 연명만이 남아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인간들이 즐겨 하는 이러한 단순하고 위험한 대결 구도가 얼마나 많은 바퀴들과, 생명들과, 자연의 삶들을 위태롭게 하는지 말하고 싶었다.

구성에서 또 하나의 도전은 바퀴와 함께 사는 인간들의 플롯을 다른 축으로 배치한 것이었다. 집을 내놓고, 부부가 다투고, 욕심 때문에 바퀴의 존재를 숨기고 결국엔 벌을 받는다. 바퀴의 생태와 인간들의 이야기는 동일한 시간 설정 위에서 진행되며, 두 스토리 라인이 서로 교차되고 작용하여 다음 사건들을 만들고 결말에서 만난다.자연다큐적 생태 정보와 드라마 포맷을 혼합하는 방식은 바퀴의 생태 특성과 주제 의식 전달이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주인공인 미국바퀴는 야생바퀴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사는 대표적 ‘가주성(家住性)바퀴’이다. 미국바퀴의 생태는 인간들의 서식환경이나 행동특성과 연결 지을 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문제는 양자의 적절한 비율과 배치였다. 생태 정보가 너무 많으면, 사람은 소품이나 배경에 불과하게 되어 일반적인 자연다큐멘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고, 드라마가 넘치면 거꾸로 바퀴가 소품이 되고 말았다. 수없이 많은 퇴고에 퇴고를 거쳤고, 더빙 작업을 끝낸 후에도 최종 수정을 거쳤다. ‘바퀴’는 구성으로 시작해서 구성으로 끝난 작품이었다. 
 

영상 질감 촬영에 집중
다큐멘터리 ‘바퀴’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고, 바퀴에 대한 과장과 혐의들이 얼마간 벗겨졌다 해도 그것이 프로그램이 의도한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바퀴라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본래적 속성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얻게 되는 변화일 뿐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고스란히 보여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은 내용의 문제였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영상의 질감이었다.

흔히 새카맣게 보이는 미국바퀴의 제 색깔은 진한 원두커피색이다. 적절한 조명이 바퀴의 몸을 뚫고 지나갈 때 윤기가 흐르는 커피색은 두께에 따라 단계적인 채도(彩度) 차를 빚어냈다. 기본적인 생태를 뺀 거의 모든 장면을 고속 카메라로 찍었다.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바퀴의 특성상 암부(暗部)의 관용도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초당 60프레임으로 찍어 후반에서 2배속하여 30프레임으로 맞추는 식이었다.  인물들이 등장하는 드라마 부분도 같은 방식으로 찍었다. 느린 화면으로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하고, 별도의 카메라에 동시 녹음을 하여 후반에 싱크를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달게 받아들일 만했다.

고속으로 촬영된 모든 컷들은 후반 색보정 작업을 거쳐 색감을 살리고 밸런스를 맞췄다. 바퀴 체색이 돋보이게 암바(amber)톤을 기조로 하였다. ‘바퀴’ 제작에서 고속 카메라는 ‘고속(high-speed)’이 아니라 ‘질감(look)’을 촬영했다. 하루 대여료만 1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라 엄두도 못 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7월 말에 회사 장비로 구입해 들어왔다. 다른 프로그램과 나눠 쓰고, 이미 찍어 놓은 것을 다시 찍어야 했지만 제작팀에겐 즐거운 수고였다.

후반 작업의 핵심은 사운드였다. 사실 바퀴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퀴의 몸짓에 맞추어 모든 소리는 폴리(foley)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영상이나 효과와 마찬가지로, 신마다 다른 색깔의 음악을 작곡했다. 50분짜리 한 편에 스물세 곡이 들어갔다. 주제곡은 작사와 노래, 연주까지 순수한 창작의 결과물이다.


올해로 방송생활 17년차에 접어든다. 언제부턴가 연도가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재구성하는 버릇이 생겼다. 2009년은 ‘바퀴’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어쩌면 ‘바퀴’는 나의 PD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까지는 몸에 배어 있는 기존의 다큐멘터리 문법들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퀴’를 마친 지금은 ‘벗어나려는 집착’에 조금씩 회의가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큐의 정신을 버리고 나도 보수화되는 것인가? 아니면 ‘부정의 부정’을 통해 궁극의 ‘긍정’을 이루려는 것인가? 그 답은 다음 작품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그때 나는 ‘바퀴’를 다시 볼 것이다. 캄캄한 방에서 혼자….


월간<신문과방송>2010년 2월호 '언론현장'

 

 

Posted by 정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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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콜릿도도 2010.03.10 1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자연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한번 꼭 봐야겠네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지십니다!!

    • 정명화 2010.03.11 1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구성으로 시작해서 구성으로 끝난다'는 문동현PD님의 글을 보며 항상 현장에서 계시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꼭 멋진 자연다큐멘터리 제작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