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상처를 반복해서 드러내는 과거사 정리 수준에서 머물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
는 교훈과 언론정책 추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미디어 산업의 국제 경쟁과 매체간의

균형발전 문제가 국가 사회적인 중대 현안이라는 관점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로 과

거사 문제를 해석해야 할 시점이다.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해직 진실 규명과 해결 권고

진실화해위원회, 1980년 언론통폐합 보고서 발표_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학


부끄러운 상처를 반복해서 드러내는 과거사 정리 수준에서 머물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는 교훈과 언론정책 추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미디어 산업의 국제 경쟁과 매체간의 균형발전 문제가 국가 사회적인 중대 현안이라는 관점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로 과거사 문제를 해석해야 할 시점이다.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1980년의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대량 해직에 관한 진실규명 결정을 발표했다. 요지는 크게 나누어 3개 항이다. ① 언론사 통폐합: 신문 28개, 방송 29개, 통신 7개(총 64개)사를 통합 또는 폐간하여 신문 14개, 방송 3개, 통신 1개로 18개 언론사가 남도록 축소했고  ② 정기간행물 등록취소: 172종의 정기간행물을 강제 폐간시켰으며 ③ 언론인 강제해직: 1,000여명 이상의 언론인 해직.


국가기관의 세 번에 걸친 조사

1980년의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대량해직에 관해서는 정부기관이 새삼스럽게 조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더라도 진상은 다 알려져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신군부가 언론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도 익히 밝혀진 바 있기 때문이다.

개별 신문, 통신, 방송사의 폐간 또는 다른 언론사에 통합된 경위를 들여다보면 다 같은 사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직된 언론인들이 소속되었던 언론사의 상황도 약간씩은 달랐다. 권력이 요구한 해직자 명단에는 부정 부패와 연루된 사람도 있었지만 명단에 들어 있지 않은 사원까지 회사에서 자의적으로 끼워 넣은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더기로 폐간된 정기간행물 가운데는 신군부가 주장한 부실 퇴폐 언론이 아닌 간행물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비판적 논조를 꺾으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의 실체의 규명은 기왕에 여러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1) 1988년의 국회 5공 청문회: 1988년 11월과 12월에 국회는 청문회를 열고 통폐합을 기획하고 집행했던 관련자들을 출석시켜 당시의 정황과 책임문제를 추궁했다. TV로 생중계 하여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진희(전 MBC) 사장, 이수정(문공부 공보국장), 허문도(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 비서실장), 허삼수(국보위 사회정화위 간사), 이광표(문공부 장관), 김만기(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장), 이용린(보안사 2정보과장), 이상재(계엄사 검열단 보좌관), 전재오?김태진(보안사 언론대책반 요원), 한중혁(치안본보 언론담당) 등이 청문회에 불려나왔던 인물들이다. 경향신문에 통합되어 없어진 신아일보의 사주였던 장기봉 사장도 증인으로 출석했다. 12월 13일에는 조선, 중앙, 동아, 중앙, 한국 4대 언론사 사주들을 불러 기자 해직과 통합문제에 관한 증언을 청취했다.
신문은 청문회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보도했고, 통폐합과 5공화국의 언론통제, 기자해직 문제 등을 다루는 기획기사를 시리즈로 내보내기도 했다. 이로써 80년의 언론 통폐합 문제는 진실에 접근한 셈이었다.

2)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진상조사(‘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10.25) 국방부 과거사위원회는 신군부의 언론통제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회 청문회 이후에 9년 만이었다. “K-공작은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으로 관련 문건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K-공작의 일환으로 시행된 ‘보안사령관과 언론계 사장의 면담보고’ 문건은 신군부가 계엄기간에 검열된 기사를 계엄 이후에도 게재하지 못하도록 사장들로부터 각서까지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언론인 정화작업과 해직언론인 취업을 제한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신군부가 비판 성향의 언론인들을 색출하여 취업제한 등 불이익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5월 언론인 정화 대상자를 A급(국시 부정 및 제작 거부 주동 등), B급(제작 거부 선동 및 부조리 행위자), C급(단순 제작 거부 동조) 등으로 나눠 문화공보부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3)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007.10.10)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내놓은 방대한 분량의 ‘진실위 보고서’ 가운데 ‘언론·노동편’에서 언론관련 여러 의혹을 밝혀내었다. 한마디로 1980년의 통폐합은 정통성 없는 권력이 저지른 폭거(暴擧)였다. 신군부가 인위적, 강압적으로 언론의 구조를 바꾸어 권력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했던 조치가 언론 통폐합이었다.


진실화해위의 ‘권고조치’ 실행 방법

세 번에 걸친 진상규명으로 언론통폐합과 기자해직에 관한 진상은 완전히 드러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 진실화해위가 발표한 내용은 네 번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진실위는 “신군부의 조치는 적법한 권한을 가진 기관이 법적 근거를 가지고 법 절차와 요건에 따라 처리한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결론지었다. 이전 조사 결론과 다른 점은 없다. 하지만 이번 결정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은 ‘권고조치’이다.

부연하면 세 가지 ‘권고’ 사항을 담고 있다. 첫째 관련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사과, 둘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셋째 피해구제를 위한 조치이다. 국가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에 손실을 끼쳤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피해자들의 명예는 포괄적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날의 청문회와 과거사 정리 차원의 조사에서 그 부당함을 밝힌 것으로 그쳤지만, 이것으로도 피해자의 명예는 상당부분 회복이 된 셈인데, 이번의 조사결과도 그런 조치의 일단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경우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1998년 5월과 6월 서울고등법원이 판결한 두 건의 언론관련 재판이 그 예였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직후에 검열철폐와 제작 거부운동을 주도하였다가 구속되어 유죄 판결로 복역했던 기자협회 관계자와 문화방송-경향신문에 소속되었던 언론인들에 대한 재심청구 재판이 있었다. 1980년의 짧았던 ‘서울의 봄’ 이후 언론인의 무더기 해고와 언론 통폐합으로 이어지는 태풍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980년 5.17 직후에 구속된 언론인은 2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19명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되었다. 이들은 3가지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벌인 검열 거부운동에 연루되어 구속된 사건, 둘째는 문화방송-경향신문의 제작거부 운동과 관련된 사건, 셋째는 광주 민주화운동 취재기자들이 유언비어 등의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이 두 사건에 관해서는 필자가 <신문과 방송> 1998년 8월호에 기고했던 ‘5·18 언론인 해직, 80년 기협·경향사건 무죄판결의 의미’라는 글이 있다.



“피해자들에게 사과” 권고

1980년의 통폐합 당시에 해직된 언론 가운데는 그 후 개별적으로 복직된 사람도 있고,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재판을 통해 명예를 회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판을 통해서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을 것이고, 공개적인 재판이 아니라도 명예가 회복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해직기자들의 명예를 일괄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방안은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관련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는 진실위의 권고를 따르는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개별적인 문제는 소속되었던 언론사와의 관계도 있기 때문에 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1980년의 통폐합은 ① 통신사의 통합과 단일화, ② 지방지의 1도 1사 원칙, ③ 신문과 방송의 경영분리 및 방송의 공영화, ④ 중앙 일간지의 정비 및 재편으로 진행되었다. 이 같은 통폐합은 인쇄매체와 방송매체에 다른 후유증을 남겨주었다.

1987년의 언론자율화 선언 이후에 신문 진입의 장벽은 완전히 무너졌다. 발행의 자유를 가로막았던 장애요소는 제거되었다. 요건만 갖추면 누구나 신문을 발행할 수 있다. 오히려 신문은 숫자가 과다하다는 비판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통신사도 마찬가지다. 이제 새로운 통신사를 설립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 세계를 인터넷이 연결하는 시대다. 그런 차원에서 통합되거나 폐간되어 없어진 신문과 통신에 대한 보상은 현실성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당시와 현재의 언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요한 이슈는 방송사의 문제가 된다. 방송사의 통폐합은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① 신문과 방송을 겸영했던 경우와, ② 지방에서 독립된 방송을 소유했던 경우이다. 신문사와 방송사가 겸영했던 경우는 경향신문-MBC, 동아일보-DBS, 중앙일보-TBC가 있었다. 이 문제는 오늘의 현실에서 신문과 방송을 포함한 언론환경을 염두에 두고 국가의 언론정책 차원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새 미디어법에 따라 종편채널을 허가해야할 시기가 임박했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언론통폐합은 정권 장악을 위한 부당한 조치였다”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결론에 필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비록 순수하지 못한 동기였다 하더라도 결과에는 수긍할 부분이 있다. 특정 신문사와 방송이 하나의 회사로 운영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었던 심각한 불균형과 특혜를 방지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이 만들었던 신문법(신문등의자유와기능보장에관한법률: 2006.7.28)이 도입했던 ‘시장지배적 사업자’(제17조)라는 것은 신문에 대해서만 규제를 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이 하나의 회사로 통합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면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1980년도에 신문과 방송을 분리했던 조치는 적어도 30년 동안은 신문-방송의 경영으로 인한 시장지배는 방지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통폐합의 결과가 가져온 긍정적 측면이었다. 통폐합 이후 30년 동안 과점형태의 방송구조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파 방송 3사는 엄청난 특혜를 누려 왔다.


방송은 국민의 자산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는 동안 방송을 둘러싼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케이블 방송, 위성 방송, 인터넷 방송 등으로 전파의 희소성은 거의 해소된 상태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으로 수많은 방송 채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한 법이 새 미디어법이다. 전파는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차원에서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부끄러운 상처를 반복해서 드러내는 과거사 정리 수준에서 머물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는 교훈과 언론정책 추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미디어 산업의 국제 경쟁과 매체간의 균형발전 문제가 국가 사회적인 중대 현안이라는 관점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로 과거사 문제를 해석해야 할 시점이다.



월간<신문과방송>2010년 2월호 '언론현장'편


Posted by 정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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