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상에 관한 보도, 후손이 바로잡을 수 있을까?
       언론관련 핵심판례(11) TV조선왕조실록 ‘효종의 북벌론’ 보도사건
                                                                       양재규(언론중재위원회 조정중재팀장,변호사)

A; 보도의 대상이 된 인물이 죽은 후 30년이 채 경과되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비교적 쉽게 정정보도청구 등의 권리구제절차를 수행할 수 있다. 당사자 사망 후 30년이 경과된 후에는 그 인물이 누구의 선조인지를 알 수 있는 표현이 사용되었어야 후손들은 비로소 해당 보도에 대해 정정보도청구 등을 할 수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다. 여기서 이름이란 그 사람에 대한 세상의 평가, 다른 말로 하면 '명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평가되는 한, 사람은 죽더라도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그의 명예, 평판이 남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의 명예 혹은 평판이란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온갖 치적을 들먹이며 용비어천가를 부르다가도 세상이 바뀌면 결점들을 찾아내고 긁어모아 깎아내리는 것이 인심이다. 물론, 예외는 있을 수 있다. 당대에 역적으로 몰려 멸시와 천대 속에 쓸쓸한 죽음을 맞지만 훗날 재조명되어 명예를 회복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풍조가 변덕스럽다는 것은 경험칙상 진실이다. 이 조변석개하는 세상풍조 앞에서 신세한탄이나 늘어놓으며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기 전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의 윤곽은 점점 희미해져 왜곡을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특히, 당사자가 사망한 후에는 어려움이 더욱 커진다. 이때는 후손이 나서서 조상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법적인 어려움이 존재한다. 과연 선조에 대한 잘못된 보도를 후손들이 바로잡을 수 있을지를 대법원 2000년 2월 25일 선고 99다12840 판결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 사건 개요

1) ‘TV 조선왕조실록’의 북벌론 보도
1997년 당시, 한국방송공사(KBS)는 1시간짜리 ‘TV 조선왕조실록’이라는 프로그램을 절찬리에 방영하고 있었다. 그 해 11월 18일 밤에는 조선조 효종 대에 추진된 북벌 문제가 다루어졌다. 여기서 잠시 사건의 배경이 되는 조선의 제17대 임금인 효종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효종(즉위 전 봉림대군)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병자호란 이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인물이다. 당시 효종의 나이는 만 18세였다고 한다. 10대 후반에 남의 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효종의 마음속에서는 울분과 함께 적개심이 자랐을 것이다. 이로 인해 훗날 효종은 반청주의자가 된다. 한편, 효종과 함께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전혀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청이라는 거대한 실체를 인정했고 조선이 살 길은 청나라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보았다. 소현세자는 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단순히 분출하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현실주의자였다.

8년여의 볼모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당시 조정을 움켜쥐고 있던 대신들의 눈에 위험한 인물 내지는 변절자로 비쳤다. 이와는 반대로, 반청주의자 효종은 아버지 인조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과 이념적으로 통했다. 결국, 소현세자는 반청주의자들에 의해 죽어갔고, 반청주의자인 봉림대군(효종)이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을 대신해 그 자리를 이었다(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231쪽).

왕위를 이을 적통이 있었음에도 효종이 왕 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반청주의’라는 그의 이념적 성향이 크게 기여한 것 같다. 이런 효종에게 ‘북벌’이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귀결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효종에 의해 추진된 이 ‘북벌’이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적 상황 속에서 실현가능한 일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사건 프로그램의 초점도 여기에 맞춰져 있었고 기축봉사, 악대설화, 북벌밀찰, 초구발 등의 사료를 토대로 북벌의 가능성을 심도 깊게 다루었다. 이 과정에서 효종의 어린 시절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송시열 또한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2) 방송에 대한 후손들의 이의제기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 송시열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종중(은진 송 씨 송자각하 종친회)에서 방송 내용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유인즉, 사료를 종합해보면 송시열은 효종에게 북벌에 필요한 정책을 건의하는 등 북벌에 적극 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프로그램에서는 실패할 것이 두려워 북벌을 반대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종중은 KBS 측에 반론보도를 요구했으나 KBS는 응하지 않았고 사건은 결국 법정으로 넘어갔다.

이 사건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종중 주장과 같이 이 사건 방송에서 송시열이 실패가 두려워 북벌을 반대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는지 여부가 첫 번째 쟁점이었고, 두 번째는 송시열의 후손들로 구성된 종중이 과연 죽은 지 300년이 넘은 조상을 다룬 이 사건 방송에 대해 반론보도를 청구할 자격이 있는지 여부였다.


3) 소송 경과

소송은 종중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종중 측이 제기한 반론보도청구는 1심과 2심, 그리고 3심에서 모두 기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기각의 사유는 심급마다 조금씩 달랐다. 1심 법원은 종중 주장과는 달리 이 사건 프로그램에서 송시열이 북벌 반대론자로 묘사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다른 사정을 살펴볼 필요도 없이 종중의 청구를 기각했다.

2심 재판에서는 위에서 제시한 두 번째 쟁점, 즉 후손들이 선조를 다룬 보도에 대해 다툴 수 있는지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2심 법원의 최종 판단은 부정적이었다. 반론보도청구를 하려면 보도로 인한 피해자여야 하는데 이 사건 보도에서 송시열의 후손들로 구성된 원고 종중은 전혀 언급되거나 암시된 바도 없었다는 것이다. 원고 측의 상고로 개시된 대법원의 판단 역시 1, 2심 법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2000년 2월 25일 선고된 대법원의 상고기각판결로써 사건은 원고 측 패소로 종결되었다.



○ 판결요지

이 사건 프로그램에서 원고 종중이 거론된 바가 없고, 그 내용 가운데에 우암이 원고 종중의 선조임을 알 수 있는 어떠한 표현(예를 들면 은진 송씨)도 사용된 바가 없으므로 그 보도내용과 원고 종중과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없고, 이 사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와 보도내용 특히 그것이 조선 후기의 역사에 관한 고찰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 보도내용과 원고 종중 사이에 간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하기 어려우며, 나아가 원고 종중의 목적과 이 사건 프로그램의 성격과 기획의도 및 주된 시청자 층의 수준 등 제반 사정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프로그램에 의하여 원고 종중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저하되었다고도 볼 수 없고, 특히 안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우암의 견해가 성급한 효종의 견해보다 신중하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는 자료 즉 당시의 피폐한 경제상황과 백성들의 입장에 관한 자료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으므로 이 사건 프로그램의 방영에 의하여 우암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저하된다고도 단정할 수 없는바, 따라서 원고는 이 사건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방송법 제41조 소정의 '피해를 받은 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 기사 쓰기에의 적용

우리나라에서 조상의 명예회복을 위해 후손들이 발 벗고 나서는 일이 흔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도 아니다. 이미 역사가 된 사건, 인물에 대해서는 비평의 자유가 좀 더 자유롭게 인정되어야 하겠지만 선조에 대한 후손들의 존경심 내지는 추모의 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한정 후손들에 의한 역사바로세우기를 허용할 수도 없을 텐데 과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현행법상 선조에 관한 보도에 대해 후손들이 정정(반론)보도를 청구할 수 있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망인의 인격권 보호에 관한 규정인 언론중재법 제5조의2에서 정하고 있는 요건을 충족할 때이다.

제5조의2 (사망자의 인격권 보호) ① 제5조제1항의 타인에는 사망한 자를 포함한다.
② 사망한 자에 대한 인격권의 침해가 있거나 침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이에 따른 구제절차를 유족이 수행한다.
③ 제2항의 유족은 다른 법률에서 특별히 정함이 없으면 사망한 자의 배우자와 직계비속에 한하되, 배우자와 직계비속이 모두 없는 경우에는 직계존속이, 직계존속도 없는 경우에는 형제자매가 되며, 동순위의 유족이 2인 이상 있는 경우에는 각자가 단독으로 청구권을 행사한다.
④ 사망한 자에 대한 인격권 침해에 대한 동의는 제3항에 따른 동순위 유족의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⑤ 다른 법률에서 특별히 정함이 없으면 사망 후 30년이 경과한 때에는 제2항에 따른 구제절차를 수행할 수 없다.

본래 사람은 죽는 순간, 모든 권리를 잃게 되며 그 중 일부만이 상속에 의해 후손에게로 승계된다. 특히, 재산이 아닌 인격적 가치를 보호하는 권리들은 당사자의 사망으로써 소멸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예외가 존재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위에서 제시한 규정이다. 위 규정에 따라 보도의 대상이 된 인물이 죽은 후 30년이 채 경과되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비교적 쉽게 정정보도청구 등의 권리구제절차를 수행할 수 있다. 만일 후손들이 다수일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일단, 사망한 사람의 자녀라든가 손자손녀, 배우자 중 아무나 할 수 있다. 법문에 '각자'가 '단독으로' 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럿이라고 해서 공동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배우자, 직계비속이 모두 없는 경우에는 직계존속이, 직계존속도 없는 경우에는 형제자매 순으로 할 수 있다.

그러면, 당사자 사망 후 30년이 경과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판결요지에 나타난 표현을 최대한 활용하자면 '은진 송씨'라든가 '남원 양씨'와 같이 그 인물이 누구의 선조인지를 알 수 있는 표현이 사용되었어야 후손들은 비로소 해당 보도에 대해 정정보도청구 등을 할 수 있다. 사망 후 30년경과 전에 비해 매우 제한적인 상황 하에서만 정정보도청구 등이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이 경우 누가 정정보도청구를 할 것인지도 문제다. 이번 사안의 송시열과 같이 이미 사망한 지 300년도 더 지난 인물이라면 그 직계비속의 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권리구제의 절차적 명확성을 위해 해당 종중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쉽게도 대상 판결에서 해당 종중의 청구를 기각하는 바람에 이 부분에 대한 법원의 입장을 확인할 길이 없다.

이상의 논의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사후 30년이 지난 인물은 이미 과거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고 보아 원칙적으로 당사자의 명예나 인격권 보호보다는 역사연구의 자유 내지는 비평의 자유를 더욱 두텁게 보호하는 것이 현재 우리 법의 태도라 하겠다.


월간<신문과방송>2010년 2월 '법을 알고 기사 쓰기(47)'

Posted by 정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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