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http://www.journalog.net/nambukstory)

주성하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기자들이 블로그를 안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시간이 없어서’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에 따른다면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가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독자가 많아지고 인기가 높아지면 없던 시간도 생긴다.

 나는 북에서 살다가 2002년 한국에 온 탈북자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40년 전의 과거에 살다가 하루아침에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사회로 뛰어든 ‘올드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 하필 40년 전인지 약간의 설명을 하면 한국에 와서 북한에서 살던 이야기를 할 때 적어도 1950~60년대를 살아본 사람들이어야 “아, 우리도 그때 그랬어” 하고 맞장구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살았던 북한은 아무래도 남한의 1960년대와 가장 흡사한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지금 ‘파워블로거’라고 이런 글을 쓸 줄은 몰랐다.

 하나원에서 사회로 나온 바로 다음날 집에 컴퓨터를 사놓았다. 여기선 다 인터넷이라는 것을 한다니 아무래도 나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내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집에 앉아서 이것저것 클릭하면서 “인터넷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컴맹’은 말로만 듣던 인터넷을 맛보기 시작했다.

컴퓨터 수리하러 세탁소에 들어가기도
 
 초기엔 아주 간단한 장애만 생겨도 어찌 할 줄 몰라 수리소에 본체를 들고 갔다. 물어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컴퓨터를 어디서 수리할지 몰라 ‘컴퓨터크리닝’이라는 간판만 보고 세탁소에 본체를 메고 들어가 컴퓨터를 수리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난 인터넷 세상에서 홀로 구인 사이트를 찾아냈고 첫 직장도 인터넷으로 원서를 넣었다. 입국 4개월 만에 한 주간지 기자가 됐고, 다음해인 2003년 동아일보 공채모집 광고를 보고도 인터넷을 통해 이력서를 넣었다.
남한에 온 지 10개월 뒤엔 포털 사이트 다음에 카페를 만드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몇 달 뒤 동아일보에 입사하면서 카페는 자연스럽게 접었다.

 블로그를 시작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나 각오가 있어서라기보단 순전히 입사 동기인 김 모 기자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가 동아일보 대표 블로그 서비스인 ‘저널로그’를 주도해 만들었는데 만만한 동기들부터 가입을 독촉했기 때문이다. 아니, 애원했다.
처음에는 “적어도 2~3일에 글 하나씩은 올려야 죽은 블로그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지금처럼 매일 글 하나씩 올리게 되는 날이 머잖아 올 줄 알았다면 절대로 블로그를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  주성하 기자가 운영중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

비결은 남과 다른 나의 이야기

 여기까지 읽고 ‘어, 살아온 이야기에도 보고 배울 것이 없고 블로그 시작한 동기도 별거 없잖아’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실망하실 분들이 있을까봐 미리 말씀드린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봐도 파워블로거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은 거의 없다. 블로거의 역할이니 의식이니 사회참여니 하는 식의 웬만한 파워블로거들은 줄줄 할 수 있는 말도 내겐 너무 어렵다. 하고 싶은데 정말 몰라서 못 쓰겠다. 그렇게 무식한 관계로 이 글에선 그냥 나의 이야기만 쭉 나열하려 한다.

 블로그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가 많이 알려진 비결 역시 남과는 다른 나의 이야기를 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북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으면 쓸 수 없는 글이기 때문에, 딱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글들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겐 “이렇게 해야 파워블로거가 됩니다”라고 알려줄 비결이 없다. 그렇다고 “북에서 살다가 오십시오”라고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블로그를 시작한 초기엔 글을 2~3일에 하나씩 올렸다. 10월 21일에 개설한 블로그는 정확히 지난해 1월 1일에 방문자 10만 명을 돌파했다. 그리고 5월 말에 100만 명을 넘었다. 개설 7개월 만의 일이다. 블로그 방문자가 급작스럽게 늘어난 것은 지난해 6월 블로그가 다음 뷰에 서비스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방문자 숫자가 많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8월부턴 매달 평균 100만 명씩 들어왔다. 올 4월에 1000만 명을 돌파했는데 방문자 100만 명에서 1000만 명이 되는데 걸린 시간은 10개월이었다.

 매일 평균 3만 명 이상의 독자가 방문하니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졌다. 매일 찾아와도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보여 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겨난 것이다. 바빠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블로그를 안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시간이 없어서’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에 따른다면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가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독자가 많아지고 인기가 높아지면 없던 시간도 생긴다.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 등 멀티플레이어

 기자가 바쁜 직업인 것은 틀림없다. 특히 나는 기자 중에서도 가장 나와바리(영역)가 넓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전 세계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다 살펴봐야 한다. 땅만 아니라 바다와 우주까지. 실제로 내가 쓴 우주 관련 기사도 꽤 된다. 여기까진 다른 국제부 기자들도 하겠지만 여기에 더해 북한까지 나의 영역이다. 매일 국제 뉴스도 살펴봐야 하고 북한 관련 뉴스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 봐야 한다. 너무 범위가 넓어 뉴스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참 어렵다.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보망을 활용해 새로운 북한 정보를 얻어냄과 동시에 매주 끊임없이 각종 기획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고심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나는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 라디오 등 언론에 속하는 모든 매체에 관여하는 이른바 ‘멀티 플레이어’ 노릇까지도 하고 있다. 매일 기사를 쓰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많을 때는 한 주에 라디오 방송 3개씩 진행하고, 매달 잡지에 연재를 해야 한다. 마이크를 쥐고 거리에 나가 카메라 앞에서 동아 뉴스스테이션을 위한 방송 뉴스 리포트까지 만들 때도 있다. 여기에 강연, 세미나와 같은 외부활동도 적잖게 한다. 그래서 늘 시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빠서 블로그를 못 하겠다”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콘텐츠가 없어 글을 못쓸까봐 걱정일 뿐.
다행스러운 것은 직접 쓴 북한 관련 기사나 잡지, 방송 원고를 블로그에 올려놓기 때문에 블로그용으로 매일 글을 써야 하는 부담은 크게 해결된다. 하지만 요새 흐름이라고 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는 실천하지 못한다. 아무리 형식을 달리했다고 해도 같은 내용을 블로그에 두 번 실을 순 없기 때문이다. 방송에 나간 글이든, 잡지에 나간 글이든, 기사로 나간 글이든 형식에 상관없이 다 다른 내용으로 하려 노력한다.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잡지나 방송용으로 가공하면 편하겠지만 그렇게 못하고 있다.

 이것저것 하는 것이 많으면 희생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저녁 술자리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거의 갖지 못한다. 1주일에 2~3시간 자는 날이 이틀 정도는 된다. 


< 태국 취재 중인 필자 >


 그러면 블로그란 것이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열심히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솔직히 자기 나름의 이유가 없다면, 사명감에 사로잡히거나 중독이 되지 않는다면 하기 힘든 일인 것 같다. 매일 방문자 몇 만 명이라는 숫자도 익숙해지면 무덤덤해진다. 정치인도 아니고 광고가 붙는 전문 블로그도 아니면 더욱 열정을 갖기는 쉽지 않다.

원칙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사랑

나 역시 남한에 북한을 알린다는 일종의 사명감 비슷한 마음이 없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덤으로 이미 쓴 각종 북한 관련 글들을 사장시키지 않고 나만의 공간에 시기별로 게시한다는 점도 좋다.

북한은 남한에서 이념갈등이 특히나 첨예한 분야다.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 관련 글에는 악플마저 살벌하다. 그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내 블로그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시사 블로거들은 적아를 딱 나누고 특정 성향의 독자들을 끌어들여 세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북한 관련 블로그야말로 이렇게 편 가르기 식으로 운용하면 정말 편안하다. 극으로 빠져나가면서 목소리를 높일수록 주목을 끈다.



나는 편을 의식하지 않고 들어와도 눈살이 찌푸려 들지 않는 블로그를 만들고 싶었다. 스탠스를 그렇게 잡고 나가니 실제로 블로그에 각이한 성향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독자들은 전 세계에 널려 있고 북한 현직 외교관들까지 찾아와 보고 있다.

내가 북한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세우는 원칙은 단 하나. 북한 주민들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이 있으면 이를 짓밟는 자들에 대한 분노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나 한국에선 편이 없이 산다는 게 너무 힘들다. 특히 탈북자에겐 더욱 그렇다. 왼쪽에선 북을 탈출했다고, 오른쪽에선 정체성이 의심된다며 이상하게 본다. 여기에 각종 협박까지 자주 받는다. 차라리 어느 편에 붙으면 살기 편하겠지만 그러진 못하겠다. 이것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헤쳐 온 내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존중이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최소한 침묵하기만 해도 될 것을 참 힘들게도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블로그를 막 시작했을 때 한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얼마나 끌고 갈 수 있냐”는 질문에 “한 3년쯤” 하고 대답했다. 물론 2~3일에 글 하나를 올린다고 가정하고 한 대답이다.

모든 블로그에는 상승기와 하락기가 있다. 개인 콘텐츠의 한계 때문이다. 아무리 우수한 선수도 은퇴를 한다. 물러남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내게도 언젠가는 블로그를 접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북한만큼은 어차피 함께 가야 할 운명이다. 지금도 아무리 국제 기사를 많이 써도 북한 기사를 한동안 안 쓰면 회사 간부들이 “요새 왜 기사 안 써” 하고 묻는다. 국제부 기자이면서도 북한 기사를 안 쓰면 존재감이 사라지는 그런 기자인 셈이다.
수습 때 처음 돈 라인이 서초, 강남, 강동이 포함된 ‘강남 라인’이었다. 서울에서 자란 다른 동기들도 있지만 나를 제일 힘들다는 코스부터 집어넣은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그때가 한국에 온지 1년 반째. 집이 지방에 있다 보니 강남이나 강동이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고 그때 처음 가 봤다.

제일 기억나는 것은 사교육 열풍과 관련해 대치동 최고의 학원장을 인터뷰하라는 지시였다. 하라니 했다. 원장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무지하면서도 용감하게 질문을 퍼붓는, 연변 말투의 이상한 동아일보 기자를 앞에 두고 적잖게 당황했다. 지금도 그 원장에게 미안하다.



< 북한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토론하고 있는 필자 >


 그때 온갖 ‘갈굼’을 견디다가 어느 술자리에서 선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산에서 살다가 도시에 내려온 타잔이다. 숲속에선 맨발로 누구보다 잘 달릴 순 있지만 아스팔트 위에서 운동화를 신고 남만큼 달릴 순 없다.”

그때로부터 7년. 이제는 아스팔트 위에서도 남만큼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여담이지만 지난달 중순 방콕에 파견돼 반정부 시위를 취재하면서 39도의 열기에 화끈 단 아스팔트 위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 관련 글을 쓸 때면 숲속에 돌아온 타잔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블로그는 나에게 숲과 같은 존재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는 나에게 숲과 같은 존재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해주는 곳이다. 블로그를 시작할 때 솔직히 이런 느낌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블로그에 있는 글들은 북한에 다시 돌아가는 날 고향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내보일 내 생의 흔적이자 연대기이다. 죄를 짓거나 배가 고파서 내가 북한을 떠났던 것은 아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인민의 참상에 가슴을 치다가 떠났던 길이다. 훗날 그대들이 신음할 때 나 역시 그 아픔을 세상에 알리려 최선을 다했음을, 그래서 길을 떠난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블로그다. 나는 오늘이 아닌 내일을 위해서 글을 쓴다.

Posted by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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