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_KBS드라마 '추노'
곽정환 KBS드라마제작국 프로듀서

 온통 고민은 '노비'였다. 천군만마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 나라를 세우거나 구한 불세출의 영웅도, 번쩍이는 용포를 입고 화려한 구중궁궐을 오가는 임금이나 왕후도, 다채로운 형형색색의 궁중요리를 만드는 궁녀도 아닌, 남루하고 초라한 노비들의 이야기. 연출은 괴로웠다. '추노'의 비주얼 콘텐트를 도대체 무엇으로 잡나? 시청자들의 시선을 매혹시키기 위해 시대를 불문하면서까지 사치스러우리만큼 호화로운 금색과 은색으로 극단적으로 과장스럽게 치장하여 화려한 볼거리를 만드는 사극 미술의 경향 속에서 노비와 같은 천민 계급 또는 천민이나 다름없는 상민 계급의 비주얼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시청자들이 이야기에 공감할 뿐 아니라 시각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 시각적 만족감을 위해서라면 논리적 개연성을 무시하는 과감함과 난데없이 불쑥불쑥 고증의 잣대를 들이대는 엄격함을 함께 지닌 변화무쌍한 시청자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방법.

'추노' 비주얼 콘셉트의 핵심은 '질감'

'백의민족'이라는 매우 강력한 고정관념에 따라 천민과 상민 계급에겐 주로 흰 옷을 입혀 온 관행을 '추노'가 따를 수는 없다. 색감과 비주얼이 획일화·단순화 되고 지루해진다. 가발을 한 명 씌우는 데에만 걸리는 시간이 얼만데 모든 인물에게 가발을 씌우게 되면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수고를 덜기 위해 주로 흰 머리띠를 둘러온 관행 역시 따를 수 없다. 흰 옷과 흰 머리띠를 대체할 '추노'의 비주얼 콘셉트는 과연 무엇인가.

 흰 옷을 입고 산으로 들로 논일과 밭일을 다니면 어떻게 될까? 몇 번이고 흙물과 풀물이 베어들고 빨아 입는 동안 흰 옷은 흙색과 풀색으로 얼룩지지 않을까? 몇 번이고 나뭇가지에 돌멩이에 농기구에 옷감은 긁히고 찢기지 않을까?



 왕족은 커녕 양반의 비단 옷에 비해서도 색감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갈색과 녹색 물이 배합되어 섞이는 정도를 다르게 하고, 물이 든 부위와 모양을 조금씩 다르게 한다면? 그렇게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르게 물든 옷을 또 제각각 다른 정도로 낡고 닳게 만들면? 게다가 또 조금씩 다르게 때를 묻힌다면? 비단 옷이기에 오히려 늘 깔끔하게 반짝이는 단순한 질감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질감의 세계가 펼쳐지지 않는가!

 표면과 끝처리의 세밀한 '질감'이 잘 살아나는 소재를 고르고 또 고른다. 낡고 닳았지만 대신 거칠고 터프하고 와일드한 멋을 마치 그런지 룩처럼, 빈티지 패션처럼 표현한다면! 그래서 천민과 상민 계급인 주연 배우들의 남성미와 야성미를 시청자들이 시각적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멋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거워 할 수 있다면!

 색감의 한계는 의상에만 있지 않다. '추노'에는 구조적으로도 화려한 미술을 활용할 수 있는 궁궐이나 양반가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구조가 심플하고 색감이라곤 오로지 갈색으로 이루어진 초가가 온통 배경이다. 계절적으로도 이미 녹음이 짙어진 후라 주로 산야의 하늘색과 녹색, 나무와 초가의 갈색, 바위의 회색이 색감의 전부다.

 그렇다면 세트와 소품에서 역시 제한된 색감과 구조를 오히려 심플함과 미니멀함으로 강조해 최근 사극 미술 경향에 역으로 거슬러 정반대되는 지점에 포인트를 잡고, 대신 다양한 질감으로 비주얼 콘셉트를 차별화하자! 초가마을과 나무, 마룻바닥과 방바닥, 벽과 기둥, 문짝과 창호지가 모두 비슷한 갈색이되 소재와 조직의 낡고 닳은 정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질감의 차이를 극대화하도록!

 RED ONE의 고해상도 화질, 명·암부 표현에 유리

 '추노'를 RED ONE 카메라로 찍은 이유는 바로 이 디테일한 질감의 차이를 묘사하기에 RED ONE이 4K 고해상도 화질이 명부와 암부 표현 모두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비들이 모여앉아 쑤군거리는 어두컴컴한 방안의 무너져 내린 흙벽, 온 방안에 어지럽혀진 지푸라기와 새끼줄은 모두 비슷한 갈색이지만 RED ONE의 4K 고해상도 화질로 촬영한 덕분에 저각각 자신의 질감을 뽐내고 있다. 노비들이 입고 낡고 해진 옷과 부스스한 머리카락, 얼룩진 피부 톤 역시 그 색감은 비슷하지만 하나하나의 질감이 차이가 난다. 자칫 단조롭고 밋밋한 색감의 화면은 이 모든 질감이 살아난 덕분에 비로소 영상미를 획득할 수 있다.



 RED ONE 카메라를 선택한 또 한가지 이유는 '추노'의 액션 연출 콘셉트 때문이다. 기존 사극에서 액션은 주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라는 대규모 몹씬의 거대한 스케일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시각적 쾌감을 주어 왔다. 게다가 수많은 중국 영화의 웅장하고 장엄한 액션을 보아 온 시청자들의 눈높이 수준은 높아질 만큼 높아진 상태. 반면 '추노'의 액션은 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대 일 싸움이다. 또 연출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견 초라해 보이기까지한 스케일의 차이에서 오는 약점을 극복하고 '추노'만의 액션을 차별화할 수 있는 콘셉트는 무엇인가?

 또다시 극단적인 대척점에서 방법을 찾아냈다. 매크로할 수 없다면 마이크로하게! 거대한 집단적 스케일 대신 액션 동작 하나하나에 담긴 섬세한 감정을 고속촬영을 통해 세밀하게 표현하는 것! 타격점을 중심으로 한 액션 행위 자체를 정확히 보여주기 위한 고속촬영이 아니라, 타격점 이전에 액션 행위를 시작하는 인물의 감정과 눈빛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고속촬영! 그래서 기계적으로 교차되는 동작의 합과 합이 아니라, 고요하게 숨죽인 나지막한 숨결과 점차 가빠지는 거친 호흡이 느껴지는, 때로는 격렬하게 달아오른 그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는,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의 몸과 몸이 부딪히는 액션! 신분과 계급으로 인한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오로지 가진 것 몸뚱이 하나로 끈질기게 견디며 버텨낸 천민과 상민들의 처절한 몸짓으로, 그들의 육체에 흐르는 땀방울이 저잣거리의 흙먼지와 연기와 재와 뒤범벅되어 딴딴한 가슴팍에 꿈틀거리는 팔뚝에 끈적거리며 달라붙어 흘러내리는 절규로 느껴지는 액션!

 '추노'의 마이크로한 액션 콘셉트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속촬영 카메라가 화두가 된다. 기존의 방송용 카메라에는 고속촬영 기능이 없다. KBS에서 보유한 고속촬영 카메라는 자연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주로 활용되고 있으므로 매주 드라마 촬영만을 위해 독점할 수 없다. 때문에 촬영 회차 마다 별도로 고가의 비용을 들여 고속촬영 카메라를 임차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고속촬영 카메라는 고속 프레임 수를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고속 프레임 수를 높일수록 엄청난 광량이 요구되는 등 작업 난이도가 높고, 작업현장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다.



 마이크로한 액션 콘셉트를 살리기 위한 고속촬영

 꽃이나 곤충이 아닌 사람을 찍는 경우 앵글이 넓어진 만큼 많은 광량이 필요한데, 고속촬영 화면에서 종종 화면이 어둡게 보이거나 깜빡거리는 플리커링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광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경우 어렵게 고속촬영을 한 컷이 다른 고화질의 컷들과 이질감이 느껴져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반면, RED ONE 카메라는 초당 120프레임까지 제한적이긴 하지만 고속촬영 기능이 자체 내장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요구되는 광량도 적을 뿐 아니라 버튼 하나로 고속촬영 전환이 바로 이루어지고 촬영 후 손쉽게 리플레이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작업이 매우 용이한 장점이 있다. 고속촬영 카메라보다 RED ONE 카메라의 고속촬영 기능이 모든 면에서 앞선다는 의미가 아니다. 초당 120프레임이라는 프레임 수의 한계가 가져오는 고속촬영의 한계와 그 느낌의 차이에 대한 확인과 결정이 필요하다.

 영화와 광고에 비해 작업 시간이 늘 부족한 드라마 촬영현장의 특성을 고려하여 '추노'는 최대한 작업이 용이한 방식을 선택한 대신 초당 120프레임 이내의 고속촬영으로만 모든 액션 씬의 긴장감을 조절해 내야 했다.

 카메라보다 컴퓨터에 가까워

 다행히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으로 초당 120프레임 고속촬영의 한계를 또 어느정도 보완할 수 있었다. 촬영의 용이함에 비해 꽤 효과적인 RED ONE 카메라의 고속촬영 기능은 '추노'에서 때로 액션 씬이 아닌 감정 씬을 묘사하는 데에도 동원되었다.

 RED ONE 카메라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카메라라기보다 컴퓨터에 가깝기 때문에 부팅하는데에 걸리는 시간이 다소 길게 느껴지는 사소한 문제점에서부터, 한겨울 기온이 매우 낮으면 뷰파인더가 오작동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 모니터에 갑자기 에러 표시가 뜨면 원인을 알 수 없지 만 어쩔수 없이 재촬영해야 한다는 점, 에러가 몇차례 반복되면 껐다가 켜는 것이 때론 좋은 해결책이 된다는 꽤 심각한 문제점들까지 단점 또한 무수히 많다.

 '추노'가 영화 같다고? 정말 몇몇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지 RED ONE이라는 영화용 카메라를 썼기 때문일까? RED ONE카메라는 우수한 장점을 가진 반면 민감하고 까다롭다. 수 없이 많은 스태프들의 섬세한 손길들이 모일 때 비로소 RED ONE의 장점은 빛이 난다. 마친 4K 고해상도 화질에 대한 연구를 통해 RED ONE 카메라의 도입 기회를 모색중이던 김재환 촬영감독의 제안으로 사용하게 된 RED ONE은 결국 연출의 고민이었던 '추노'의 비주얼 콘셉트와 액션 콘셉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준 일등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KBS 내부에 없었던 Tapeless 제작시스템과 워크플로우를 '추노'를 위해 만들어 낸 김종연 조감독이 없었다면 RED ONE 촬영으로 인해 색보정 등 후반작업의 수많은 기술적인 난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재의 질감을 시각적으로 도드라지게 살려내기 위해 영화나 광고에서 주로 쓰는 대형 라이트를 매고 밤낮으로 애쓴 조명팀의  고생도 심했다. 그 질감을 살려내느라 유독 자주 불려다닌 의상팀, 분장 미용팀 등 미술팀과 특수효과팀의 공도 컸다. '추노'가 영화같았다면, 그건 RED ONE 카메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관행에서 벗어나 한 차원 높은 완성도를 지닌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땀을 흘린 스태프들에게 돌아갈 칭찬이다.
Posted by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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