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간 언론인들 (상)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언론사

 광복 후 북한에서는 노동당을 점저으로 정보와 사상을 하향적·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언론 구조가 구축됐다. 남한에서도 정부와 권력의 통제가 있기는 했지만 비팡 기능을 지니는 언론이 존재할 수 있었다. 사회·경제적인 여건에 비해 과다한 신문이 난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복 직후의 해방공간이 그런시기였다. 하지만 북한은 남한과 사정이 전혀 달랐다. 북한을 장악한 공산주의 정권을 일찍부터 신문을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로 정비했다. 노동당의 '로동신문과 행정부 기관지 '민주조선'이 최정상에 위치하고, 하부를 구성하는 각 지방 도 단위 신문과 청년단, 직업동맹 등 직능별 기관지가 발행됐다.

광복 직후 북한의 신문

'로동신문'은 원래 '정로(正路)'라는 제호의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1945년 11월 1일에 창간됐다. 창간 당시에는 소형 2면의 주간신문으로 1회 1,000부 정도씩 발간되었는데 이듬해 1월 26일부터 일간으로 발전했고, 3월 14일부터는 타블로이드 4면이 되었다가 5월 28일에는 대판 2면으로 지면을 확장했다. ¹)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면서 '정로'와 신민당 기관지 '전위(前衛)'를 통합해 9월 1일부터 새롭게 출발하면서 제호를 로동신문으로 바꾸었다. 북한에서는 정로 창간일인 11월 1일을 출판절(出版節)로 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치른다. 로동신문은 '대중적 정치신문'으로 발행 부수도 10만 부 이상으로 증가하였으며, 11월 5일부터는 대판 4면으로 체재를 일신했다.²)

 각 도에서도 지방 당 기관지가 발행되었으나 로동신문이 창간된 후에는 모두 '도 로동신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방에서 발행되던 '바른 말'(평북도당 기관지), '정의'(함경남도 당 기관지), '횃불'(함경북도 당 기관지), '선봉'(원산시 당 기관지) 등은 모두 '도 로농신문'이 되었다. ³) 북한 전역의 노동당 기관지가 로동신문이라는 제호 아래 통일된 것이다.

 정부 기관지(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기관지) '민주조선'은 1946년 6월 4일 창간됐다.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의 '평안민보'(1945.10.15)를 발전시켜 민주조선으로 제호를 바꾼 것이다. '민주조선'도 지방행정기관이 발행하는 기관지의 정상에 자리 잡았다. 도단위 기관지들은 모두 '시,도 인민보'가 되었다. 지방에서 발행되던 '새길신문'(함북), '한남인민일보', '평북신보', '자유황해'(황해도), '원산인민보' 등은 모두 '인민보'로 이름이 바뀌었다. 민주조선의 역할이 높아짐에 다라 지방 행정단위의 기관지로 발행되던 신문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강화하고 지방 행정지관의 신문과 중앙신문이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한 조치였다. ⁴) 당과 행정기관이 신문을 직접 관장하면서 명칭을 통일하고 전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체제로 만든 것이다. 이 시기에 창간된 북한의 당보(黨報)들은 이른바 "당적 신문발전의 기초"를 축성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북한의 언론은 남한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데올로기 아래서 당의 노선을 선전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좌익지가 발행되면서 정부와 남한의 체제를 비판하는 논조의 신문이 존재했던 사실과 확연히 다른 언론환경이었다.


로동신문 1950년 6월 27일자, 6·25 남침 준비가 치밀했음을 보인다.

 초기 북한 신문의 주역들

 로동신문은 책임주필이 최고책임자로 그 밑에 주필, 부주필, 편집국장 등의 서열로 되어 있는데 초기 '로동신문'의 편집국장은 박팔양(朴八陽)이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5) 그는 1924년에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해 조선중앙일보, 사회부장, 만선일보 편집부장과 문화부장을 지낸 언론인이면서 시인이다.

 1946년 10월의 판권에 나타나는 책임주필은 태성수(太成洙)였다. 그의 전력은 알 수 없으나 북한에서 출판된 다음 저서가 있다.

 당의 정치노선 급 당사업 총결과 결정 - 당문헌집 1, 1946.
 민주출판물의 발전을 위하여, 로동신문사. 1947.
 교양론(상), 로동신문사. 1947.


 전쟁 전 로동신문 책임주필이었던 태성수는 1956년 무렵부터 두 번째로 책임주필에 취임했다. 김일성 대학 부총장 겸 문화선전 부상(副相)을 지내게 되는 인물이다.
 
 1948년 3월부터는 소련 출신 기석복(奇石福)이 책임주필을 맡았다. 그는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었는데 로동신문 책임주필을 거쳐 1953년 7월에는 문화선전부상이 돼싸. 그러나 박헌영이 1955년 12월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였던 1956년 1월 해임되었고,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와 평론문화위원회에서 제명돼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기석복은 1950년 말 책임주필에서 물러났고, 북한군이 압록강까지 후퇴했다가 전세를 회복하고 있던 무렵인 1951년 1월부터는 박창옥(朴昌玉)이 잠시 '책임주필 대리'를 맡았다. 그는 북한 체제 건설 초기에 소련계 제 2인자로 1947년 초 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근로자'의 주필을 맡았던 인물이다.

 1951년 3월부터는 이문일(李文一)이 책임주필이 됐다. 이문일은 1956년 4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됐다.

 민주조선은 비평가 안함광(安含光)이 잠시 임시주필을 맡았으나 초대 책임주필에 소설가 한설야(韓雪野)가 취임햇다가 9월에 북조선노동당 중앙본부 문화부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한효(韓曉)가 임시주필이 됐다. 한효는 편집국장이었는데 한설야의 후임으로 임시주필이 되면서 김정도(金正道)가 국장에 취임했다. 김정도는 광복 직후 서울에서 조선인민보를 창간해 잠시 사장을 맡았던 사람이다. 한효가 조소(朝蘇)문화협회 서기장으로 전출하면서 한재덕(韓載德)이 책임주필을 맡았다. 6) 한효는 6·25 전쟁이 일어나던 때에는 '투사신문'의 책임주필이 돼 있었다. 투사신문은 6월 25일자 지령이 150호인 것으로 보아 이 해 초에 창간됐을 것이다.

6·25 전쟁 중의 좌익 언론인들

북한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후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서울 점령 4일 후인 7월 2일부터 두 개의 일간지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광복 직후 해방공간에서 발행하던 두 신문을 다시 발행한 것인데 제호만 같았을 뿐이고 이전에 발행된 지령은 무시하고 새로 창간하는 형식을 취했다. 신문을 이렇게 빨리 낼 수 있었던 것은 서울 점령 후의 남한 통치를 위해 치밀한 대비를 하고 있었던 확실한 증거였다. 점령 지구의 토지 개혁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던 것도 사전 준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는 현재의 한국언론진흥재단 자리에 있던 구 경성일보 (당시 명칭은 서울공인사)와 서울신문에서 인쇄했다. 일간지의 발행에는 편집진과 인쇄시설 및 인쇄기술자를 비롯한 업무 지원 인력과 용지, 잉크 등의 물자가 필요하다. 평시가 아니라 생사가 갈리는 긴박하고 혼란스러운 전쟁의 와중에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도 불과 4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준비를 마치고 신문을 발행한 것이다.



 해방일보의 편집국장은 이원조(李源朝)였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동생이다. 문학평론가 6·25 전쟁 전에 월북해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지만 남로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남반부 공작의 본거지인 해주에서 '해주노력자'의 편집국장으로 있다가 전쟁 발발 후 서울로 와서 해방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을 맡았다. 이원조는 1953년 남로당의 대거 숙청 때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1955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이승엽, 임화 등은 간첩 협의로 사형이 선고됐으나 기소된 12명 가운데 징역 15년형이 선고된 윤순달과 이원조만 사형을 면했다.

 평양에서 발행되던 로동신문과 민주조선도 남침에 대비한 사전 준비가 치밀했음을 보여 준다. 두 신문은 6월 27일자 1면에 똑같은 기사를 실었다.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호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김일성 장군의 방송연설'이라는 제목이었다. 1면 전체를 김일성의 연설문으로 완전히 채우고 중앙에 김일성의 사진을 크게 배치한 편집이었다. 서울의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도 첫 호에 같은 기사를 실었다. 평양과 서울의 네 개 신문이 제목과 내용을 한 자도 다르지 않게 만들었다. "리승만 역도들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내전을 반대하여 우리가 진행하는 전쟁은 조국의 통일과 독립과 자유와 민주를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선전이었다. 김일성은 연설에서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라고 선동하면서 남한의 문화인과 인텔리들에게는 대중적 정치 선전대열에 적극 참가하여 대중적 폭동조직의 선동자적 역할을 다하라고 요구했다.

 전쟁 전에 월북했거나 전쟁 후 북한에 동조했던 언론인들은 누구였을까. 서울 점령 직후 서울시인민위원회는 '고시(告示)제3호'를 공포해 정당과 사회단체의 등록을 지시했다. 등록대상은 정당과 사회단체에 국한되지 않고 학술, 문화, 체육, 종교, 기술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됐다.

 등록 단체의 기록은 당시의 서류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자료를 영인한 것이 '1950.9 서울시인민위원회 정당·사회단체등록철'(한국안보교육협회·1990)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많은 등록 단체 가운데 '조선신문기자회'와 '남조선문학가동맹',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언론인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에는 문인들이 언론인을 겸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신문기자회

 조선신문기자회가 7월 5일자로 제출한 등록 서류에 의하면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의 편집국장을 중심으로 급조된 단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제대로 된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대표는 서강백(徐康百)이었고, 위원장단은 무동표, 이상호, 정진석, 양재하, 김기림이었다. 위원은 진학주, 서광제, 배은수, 안덕근, 최명소의 이름이 들어있다.

 서강백은 일제시대 조선중앙일보 정경부 기자로 출발해 매일신보 정치부 기자(1939.10)를 거쳐 1944년 무렵에는 정리부 차장 겸 논설부에 근무하면서 친일적인 글을 남겼다. 광복 후 서울신문 편집부장과 편집국 차장을 지냈다. 전쟁 후 해방일보 창간 당시에는 정치면 편집 담당이었는데 편집국장 이원조가 주필로 승진하면서 편집국장이 되었다. 7) 9·28 서울 수복 직전에 서울을 떠나 평양에서 며칠 동안 평남 도당 기관지 발행에도 참여했으나 북으로 쫓겨 가던 중 평안남도 북단에 있는 개천(价川)에서 국군에 포위당했을 때 아내와 딸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고, 8) 자신고 고장(古場)과 풍장(豊場) 사이에서 비행기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 9)



해방일보 1950년 7월 2일 창간호.

 이상호(李相昊)는 전쟁 중 조선인민보 편집국장이었다. 6·25전에 '중앙신문'과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의 편집국장을 지냈는데 전쟁이 터진 후에 서울에 왔던 것이다. 대구 출생으로 니혼대한(日本大學)과 호세이대학(法政大學) 문과를 졸업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했고, '중앙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다. 광복 후 '중앙신문'(1945.11.1 창간) 편집국장 재직 때인 1946년 9월 6일 중앙신문, 조선인민보, 현대일보가 동시에 발행 정지당할 때 구속됐다가 13일 일단 석방됐으나 9월 26일 재판에 회부돼 1년 6개월 형이 언도되었는데 하지 중장의 특명으로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10) 그 후 남로당이 발행한 '대중신보' 편집인이었다가 이 신문이 '노력인민'으로 바뀌면서 편집궂강을 맡았다. 1947년에 월북해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51년 6월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에 임명됐지만 1953년 8월 남로당 계열로 숙청됐다. 시인 장영창(張泳暢)은 조선인민보를 발행하던 서울신문사에서 '좌익의 극렬분자로 알려진' 편집국장 이○○를 만났다고 썼는데 11) 바로 이상호였을 것이다.

 문동표(文東彪)는 민족사학자로 일제시대 조선일보 편집고문이었던 문일평(文一平)의 장남이다. 1936년 조선일보 입사해 1947년 5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나 1948년 12월 하순 갑자기 자취를 감췃다. 그의 월북 사실이 드러난 것은 한참 후 였다. 문동표는 일제 때 방응모 장학금을 받아 교토제대 법학과를 나왔다. 방응모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모여 만든 단체 이심회(以心會)의 회보(1934년)는 그에 대해 "온순한 가운데 예직한 이론과 성벽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평가했다. 문동표는 일제시대 조선일보 서무부, 출판부, 정치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폐간 당시에는 조사부장이었다. 폐간 후 '조광'에도 근무했다. 광복 후 1947년 3월에 창관된 '대중신보(大衆新報)' 편집국장이었다가 두 달 뒤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동표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하면서 좌익을 지지하는 단체였던 조선신문기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12)

 정진석(鄭鎭石)은 광복 직후 1945년 10월 5일 창간된 자유신문의 발행 겸 편집인을 지냈다. 예술통신을 계승한 문화일보의 편집고문으로 참여했고 연희대학 강사로 조선신문학원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6·25 이전에 월북해 송도정치경제대학장을 지냈고 1956년 10월 문화교류계획에 따라 조선교육시찰단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한 일도 있다.


 대한언론인회 이태영 부회장과 정운종 사무총장, 홍원기 회장, 문명호 고문 (사진왼쪽부터)은 2010년 3월 25일 현인택 통일부 장관(사진 가운데)을 방문해, 6·25전쟁 때 납북된 언론인 총 238명의 생사 확인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냈다.

 양재하(梁在廈)는 1930년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하여 1933년 10월 동아일보로 옮긴 뒤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경제부와 사회부에서 근무했다. 광복후 10월 5일 '신조선보(新朝鮮報)'를 창간하여 주간을 맡았다가 1946년 2월 한성일보의 편집자 겸 발행인이 되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외근 기자, 논설 기자, 편집 기자 등 어느 분야나 능통했던 재사형이었다.

 광복 후 많은 잡지가 원고를 청탁할 정도로 그의 글은 인기가 있었다. 한국마사회 부회장을 역임했는데 1950년 5월 경북 문경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9월 16일 납북되었다. 당시 그는 제2대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조선신문기자회에 올라 있는 것은 납북 전에 신변 보장을 위한 방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납북 후 1956년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의 집행위원으로 되었다.

 김기림(金起林)은 1930년 4월 조선일보 공채 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를 거쳐 1940년 학예부장을 맡았다. 기자 생활과 시인 활동을 병행하면서 주지주의(主知主義) 문학론을 도입하여 문단에 새로운 시와 시론을 가지고 모더니즘 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1946년 3월 25일 현대일보가 창간될 때에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공립통신 편집국장이 되었다. 1950년 7월 21일 을지로 4가 도로상에서 인민군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 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진학주(陳學柱)는 일제시대 동맹통신 기자로 출발해 광복 후 해방통신을 거쳐 공립통신 편집국 차장이 됐다. 본격적인 성악가 못지않은 테너의 명수였다. '볼가강의 뱃노래', '오 솔레미오' 같은 가곡과 '천안삼거리'도 잘 불렀다. (슬포산인, '현역기자 100인평)
서광제(
徐光霽)는 광복 후 발간된 독립신보의 편집국장이었다. 이 신문은 1946년 5월 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신민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백남운(白南雲)을 고문으로 하여 1947년 3월 제주폭동 때에는 격렬한 좌익 논조로 기울었다. 서광제는 원래 영화인이었는데 일약 신문사의 국장이 된 사람이었다. (나절로, '신문인 100인 촌평')
배은수(裵恩受)는 일제시대 매일신보 사회부에서 근무했고, 광복 직후 자유신문(1945.10.5 창간) 사회부장이었다. 사장은 정인익(鄭寅翼), 발행 겸 편집인·주필은 정진석이었다.
안덕근(安德根)은 후쿠오카(福岡) 일일신문 기자로 근무하다 광복 후 독립신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신문 문장이 우수한 것으로 정평 났었다(나절로).
최명소(崔命韶) 일제 치하에 형무소에서 지내다 광복 후에 풀려났다. 조선통신에 근무하다가 고려통신 정경부장을 지냈다.(슬포산인)

 '남조선문학가동맹'(1950.7.5 등록)의 대표(제1서기장)는 안회남(安懷南)이었다. 1933년에 개벽사에 입사해 '제일선', '별건곤'의 편집을 맡은 적이 있고, 1946년에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장과 농민문학위원회 서기장을 겸했다. 1948년 8월쯤 월북했다가 전쟁 후 서울에 돌아와 위의 단체를 결성했으나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54년 숙청설과 1966년 숙청설이 떠돌 뿐이다. 이 단체의 선전부장 이용악(李庸岳)과 사업부장 이병철(李秉哲)에 관해서는 지난 호에 소개한 바 있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이 실린 해방일보 1950년 8월 15일자. 모든 신문이 같은 기사, 같은 모양으로 편집됐다.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은 위원장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부위원장은 시인 임화(林和), 서기장은 김남천(金南天)이었다. 김남천은 1935년 조선중앙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던 중 이듬해 신문의 정간으로 그만두게 됐고 1939년에 '인문평론'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광복 후에는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설립했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으로 활동했다.

 1947년 3월 예술통신의 지령을 계승해 창간된 '문화일보'의 편집고문을 맡았으나 1947년 이태준, 임화, 안회남 등 남로당 계열 문인들과 함께 월북해 이듬해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6·25전쟁 때에는 서울로 내려와서 활동하다가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가 취재 겸 종군했으며 이듬해에는 남북한의 문화예술 단체가 통합된 '조선문학예술동맹'의 서기장이 됐다.

 북한에서 활동한 언론인들

 북으로 간 언론인 가운데는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활동이 알려진 사람들도 있다. 가장 센세이셔널하게 알려진 인물들은 남로당 계열로 체포돼 재판 끝에 숙청된 사람들이다. 시인 임화(조선인민보 주필), 조일명(趙一明 일명 趙斗元 : 해방일보 편집국장, 노력인민 주필), 박승원(朴勝源, 1937년 매일신보 기자, 광복 후 서울신문 창간 때 정치부장, 1946년 6월 월북해 해주 제1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다 1948년 말부터 부주필, 주필), 설정식(薛貞植, 시인, 번역문화가, 영문학자)이 있었다. 재판 결과 이원조(징역 12년)를 제외한 4명이 사형에 처해졌따. 13) 김남천은 1947년 말에 월북해 해주 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 남조선노동당의 대남 공작활동을 주도했으나 1953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월북 언론인은 두 부류가 있다. 6·25 전쟁 전에 북으로 갔던 사람들과 전쟁 후에 월북한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정부는 전쟁 직후에 월북 문인과 예술인의 작품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하는 조치를 내렸다. '월북'과 '납북'을 판정해 작품의 유통과 판매에 따르는 기준을 제시했다.

 1951년 10월 서울시경은 작품발매를 금지하는 월북 작가의 명단을 관할 각 경찰서에 시달했다. 상부의 지시에 의해 작성한 명단은 ① 전쟁 이전 월북 작가 ② 전쟁 이후 월북 작가 ③ 자진 월북 여부가 애매해 내용을 검토 중인 작가로 대별했다.
 
 명단에는 언론인 다수 포함돼 있지만 언론인이 아닌 문인과 예술가도 있었다 ('서적단속을 강화, 월북작가 저서는 판금처분', 조선일보, 1951.10.70. 이들은 작품 발표의 무대가 언론이며 언론과 많은 관련이 있는 문화인들이다.

 6·25 이후 월북 인물 가운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북으로 끌려갔는데도 '자진 월북'으로 분류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규제를 완화하는 단계를 거쳐 1987년 6·29 선언 이후에는 이들의 작품에 대한 규제를 대부분 해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1988년 10월 27일 정부는 납북 또는 월북한 예술인의 작품 가운데 1948년 8월 15일 이전에 발표된 순수 예술작품에 한해 해금을 발표했다. 현재는 거의 모든 규제가 해제된 상태다.

* 주석

1. 리용필, '조선신문100년사', 김일성종합대학 출판사, 1985(나남출판사에서 1993년에 재출판, p.209). 북한의 공식 역사는 이 신문이 12월 17일부터 일간으로 바뀌어 5만 부를 발행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24, 현대편, 과학, 백과사전 출판사, 1981, p. 463).
2. 리용필, 앞의 책, p. 209.
3. 앞의 '조선전사' 24.
4. '조선전사', 24. 1981, pp. 464 : 리용필, 앞의 책, p.215.
5. 김정도, 북조선 신문사정, '민성(民聲)', 1947.12 합병호, p. 21
6. 김정도, 앞의 글.
7. 김가인, '패주5천리', 태양문화사, 1952, pp. 39~40.
8. 김가인, '패주5천리', p.78.
9. 김가인. p.135.
10, 자유신문, 1946.10.4 : 조선일보, 10.2.4 : 서울신문 10.5 : 동아일보 10.5.
11. 장영창, '서울은 불탄다', 동지사, 1978, pp. 65~66.
12.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편', pp. 230-234.
13. 김남식, '남로당연구', 돌베개. 1984. <부록 5~6> pp.572~599.
Posted by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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