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종군기자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언론사

첫 종군기자 훈련은 전쟁 1년 전인 1949년 7월 7일 시내 각 신문 기자 32명을 대상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있었다.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제1기 종군기자 훈련을 받은 기자 21명에게 국방부에서 수료식을 갖고 ‘종군기자증’을 수여했다. 첫 종군기자 훈련은 7월에 실시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10월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은 기자를 1기 종군기자로 불렀던 것이다.

 남북한 양측에서 ‘종군기자’들도 전장에 나가 취재하고 전황을 알리는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종군기자 훈련은 전쟁 1년 전인 1949년 7월에 시작되었다. 7월 7일 시내 각 신문 종군기자 32명이 육군사관학교에 입대하여 1주일간 훈련을 받은 후 14일에 수료식을 가지고 최초의 종군기자가 탄생한 셈이었다. (평화일보, 1949. 7. 15)

 전쟁 전의 종군기자 훈련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제1기 종군기자 훈련을 받은 기자 21명에게 국방부에서 수료식을 갖고 ‘종군기자증’을 수여했다. 첫 종군기자 훈련은 7월에 실시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10월에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은 기자를 1기 종군기자로 불렀던 것이다. 이는 당시 경향신문, 서울신문 등 여러 신문이 보도했다. 이때 훈련받았던 기자 가운데는 자유신문의 이혜복 기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김진섭(동아일보), 박성환(경향신문), 이지웅(연합신문), 임학수(대동신문), 한규호(서울신문) 등이 있었다.[각주:1], 1984.6. " valign="top"> 종군기자단과 국방부 출입기자단은 항공기 기금 2만 820원을 헌납했고, 국방부 보도과장 이창정 대위는 종군기자 훈련을 받은 기자들을 인솔하여 강릉, 원주, 그리고 38선 접경지대 군 부대를 순회시찰 하도록 했다. 제2기 종군기자는 1950년 2월 14일에 육사에서 입교식을 갖고 27일에 수료식을 가졌다.[각주:2] 5월 8일부터 18일까지는 부산 시내 일간신문 군 출입기자 8명이 10일간 육군 제5729부대에 입대하여 종군기자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기사도 있었다.[각주:3]
 
 기자들이 종군하면서 작전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한 시초는 1948년 10월 중순의 여순반란사건 취재를 비롯하여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 지구와 제주도에서 있었던 공비토벌작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 당국은 국방부 출입기자들도 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 하며, 최소한의 군사훈련을 익혀 두는 것이 공비토벌부대 종군에도 유익할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각주:4] 

 종군기자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6·25 전쟁이 일어난 후였다. 그러나 전쟁 발발 직후에는 기자들이 전쟁터로 달려가서 취재할 여유도 없이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전쟁보도 첫 번째 기사는 모든 신문이 한결같이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이 25일 정오에 발표한 담화를 그대로 실으면서 서울의 민심은 평온하다(동아, 6. 26)고 보도했다. 27일자 신문은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라는 제목으로 역시 국방부 보도과의 발표를 1면 머리에 크게 실었다. 동아일보는 김진섭 특파원이 개성 방면에서 보낸 기사에서 ‘적 주력부대 붕괴, 공비 임진 도강 수포화’를 곁들였다. 27일 오후에 28일자로 발행한 마지막 신문도 국방부 보도과가 27일 오전 10시에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여 ‘제공권 완전 장악, 국군 의정부를 탈환’을 톱으로 실었다. (조선, 6. 28) 

 


국방부 정훈극장 명의의 보도증과 종군기자증에 대한 공고(경향신문, 1950.11.4 광고)



친일작가 장혁주는 검은 안경을 쓰고 한국을 방문하여 취재했다(조선일보, 1952.11.2)

 전쟁 후 국방부가 주는 자료에 의존하여 전황을 보도했던 신문들은 본의 아니게 오보를 하게 되어 국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중령(전사 후 대령 추서)은 정동에 있던 KBS 라디오를 통해 6월 27일 밤 12시에 전황을 알리는 보도를 마치고 방송국의 주요 시설을 영등포 전신국으로 옮기고 이튿날 오전 2시 30분에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이미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진주하였던 때였다. 오전 5시경에 방송국에 돌아왔으나 현관에는 북한군 탱크가 들어와 있었다. 지프차에서 내려 방송국으로 들어가자 아나운서 윤영로(尹英魯)와 직원 김주선(金柱善)을 억류하고 있던 북한군이 누구냐고 하자 보도과장이라고 말하면서 북한군을 향해 권총을 쏘았으나 북한군이 쏜 다발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그 직후에 방송국 직원 이중근(李重根)이 현관 문 앞에 떨어져 있는 김 중령의 권총을 줍는 순간에 북한군이 그를 쏘아 숨지게 했다.[각주:5]

 기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야 했다. 피살, 납북되거나 북한군에 협조하는 언론인도 있었다. 치밀한 전쟁준비를 한 다음에 침략했던 북한은 사전에 선전에 활용할 종군기자를 대비하고 있었다.

북한의 종군작가와 종군기자

 북한은 신문의 성격상 종군기자와 종군작가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 전쟁 직전 북한 정권을 대변하는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에는 문인들이 이른바 ‘평화적 조국통일’을 주장하는 글을 집중적으로 게재하였다. 이들은 김일성 정권의 위장 평화공세를 선전하는 글을 싣다가 전쟁 직후부터는 남한과 미군에 대한 증오와 전의를 불태우는 기사를 연달아 게재했다. 별표에서 보듯이 홍명희, 한설야, 이기영, 이태준, 김남천, 오사량 등은 전쟁 전과 직후에 평양의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에 글을 실었고, 임화는 서울이 함락된 후에 발행된 해방일보에 시를 썼다<표>.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1952년 1월까지 평양의 로동신문, 민주조선, 서울의 해방일보, 조선인문보를 조사해 보면 이태준 16회, 한설야와 이기영이 각 8회로 세 사람이 제일 여러 차례 글을 실었다. 시인 민병균은 ‘진격의 대오에서, 전선종군기’를 6회 연재(1950. 8. 26 - 8. 31)했다. 조사할 수 있는 신문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가 되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표를 읽어야 할 것이다. 

 소설가 이태준은 전쟁 후 옹진을 거쳐 서울에 왔다가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했다. 시인 임화, 극작가 박웅걸도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하였고, 시인 박팔양, 이용악, 소설가 김사량, 극작가 남궁만의 종군기도 실려 있다. 직업적인 언론인에 비해 문인들의 종군기가 많은 것이 당시 북한 신문의 특징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박웅걸(朴雄傑)을 들 수 있다. 그는 해방일보에 ‘락동강 적전 도하기(루포루타쥬)’를 2회 연재(9. 3-4)했다. 그는 ‘종군작가’라는 직책으로 민주조선에 ‘잔학한 미 침략군들이 패주하면서 감행한 야수적 만행’(9. 7)과 ‘전선일기, 영동에서 김천까지’(9. 11)도 실었는데 특정 신문에 소속되지 않은 작가였다. 

 김정도(金正道)는 광복 후 서울에서 창간된 ‘조선인민보’의 사장을 잠시 맡았다가 중외신보(中外新報 1946. 4. 19 - 1947. 8. 27)의 편집국장이 되었다가 월북하여 북한 정권 기관지 민주조선 편집국장에 취임했던 인물이다. 광복 전에는 총독부 일어기관지 ‘경성일보’에 근무한 경력도 있었다. 그는 1947년 1월 ‘북조선 신문사정’이라는 글에서 “우리 북조선의 언론출판의 자유는 곧 우리 북조선의 발전을 위한 자유이며 새 조선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 북조선의 언론기관은 진실한 인민의 조직자이며 교육자인 것이다”라고 규정했다.[각주:6], 1947. 1?2 합병호, p.21." valign="top"> 이는 김정도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공산당의 신문이론을 그대로 옮긴 것이므로 새로울 것은 없다. 그는 북한에는 기관지 이외의 신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 인민을 위한 진정한 신문은 기관지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작가들의 종군기가 많았고, 전쟁을 독려하는 글을 쓴 작가들이 많았던 것도 북한의 이 같은 언론관이 반영된 것이다. 

종군기자들의 본격적인 활동은 전쟁 직후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국방부는 부산지구 계엄사령부 출입기자를 종군기자로 인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군경을 막론하고 부산지구 계엄사령부 보도부장의 사전 승인 없이는 문초하거나 구속할 수 없도록 하는 특혜를 부여했다. 종군기자들은 서울 수복 후에 중앙지들이 다시 발행되면서 실질적인 종군활동을 할 수 있었다.


종군기자들의 활동
 
 종군기자들의 본격적인 활동은 전쟁 직후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국방부는 부산지구 계엄사령부 출입기자를 종군기자로 인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군경을 막론하고 부산지구 계엄사령부 보도부장의 사전 승인 없이는 문초하거나 구속할 수 없도록 하는 특혜를 부여했다.(부산일보 50.8.17, 18) 

 종군기자들은 서울 수복 후에 중앙지들이 다시 발행되면서 실질적인 종군활동을 할 수 있었다.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한 후 서울에는 다시 우리의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발행된 신문은 10월 1일자 서울신문이었다. 서울신문은 가장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속간도 타 신문에 비해 수월했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속간되었다. 
 
 서울신문 10월 1일 (지령 15,177)
 경향신문 10월 4일 (지령 1,205)
 동아일보 10월 4일 (지령 8,310)
 조선일보 10월 23일 (지령 8,379)

 네 신문은 시설과 인적 손실이 막심했다. 조선일보는 사장 방응모(方應謨)가 북으로 끌려갔고, 경향신문 편집국장 신태익(申泰翊), 동아일보 편집국장 장인갑(張仁甲)도 납북되었다. 동아일보는 10월 4일 을지로 2가에 있던 서울공인사[대한공론사]의 별관에서 속간 첫 호를 발행했다. 속간 호에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사원들의 가족은 즉시 본사로 연락해 주기 바란다는 ‘사고’를 게재했을 정도였다.

 각 사는 종군기자를 파견하여 전황을 보도하였다. 국군의 북진을 따라가면서 종군기자들은 감격적인 기사를 송고했다. 당시에는 기자의 이름을 밝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지만 종군기자가 보낸 기명기사가 실린 지면의 대표적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혜복(경향신문) 10월 19일 ‘평양 대동강에서’ 보낸 기사 ‘세계 전사상(戰史上)에 경이적 작전! 국군 정예 선착도하’ 21일자 1면.
김진섭(동아일보) 10월 19일 평양에서 ‘괴뢰 질서 없이 패주, 김일성 도당은 희천에 도망’ 21일자 1면. 
 
 모든 신문이 타블로이드 2페이지의 빈약한 분량이었으나 전쟁의 참담한 상황을 생생히 알려 주고 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38선을 돌파하고 원산, 함흥, 흥남으로 진격하는 동시에 평양에 진격하는 승전보를 숨 가쁘게 전하고 파괴된 시설과 건물의 복구에 관한 밝은 소식도 많이 다루었다. 

 전선을 따라 종군하던 기자들은 서울 시공관에서 보고대회를 열어 전황을 직접 알리기도 했다. 1950년 10월 30일 국방부 종군기자단 주최로 정훈국장 이선근 준장을 비롯한 5명이 ‘평양지구 종군기자 귀환보고대회’를 연 것이 그런 행사였다. 경향신문은 10월 1일부터 서울에서 신문을 발행하면서, 10월 30일에는 평양에서 ‘전선판’(前線版)을 발행하기 시작하였으나 7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을 중단했다. 중국의 침략으로 전세가 불리했기 때문이다. 평양 발행 전선판은 현재 남은 실물이 없다.

종군기자 보고회와 표창

 종군기자는 종군기자증을 지니고 가슴과 모자에 종군기자 표시를 부착했다. 서울수복 후인 1950년 10월에는 이전의 모든 증명서와 기장(紀章)을 무효로 하고 정훈국 보도과에서 다시 발급했다. 종군기자를 정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3개월 후 서울이 또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신문 발행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월 4일 후퇴를 앞두고 네 신문 모두 1월 3일까지 신문을 발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1월 초의 지면이 남은 신문은 조선일보의 1일자와 2일자밖에 없다.

 1.4후퇴 후인 1월 10일에는 ‘군보도취급규정’(국방부훈령 제5호)을 공포했다. “군보도에 관한 취급기준을 확립하여 군 보도의 정확과 통일을 기함으로써 군 보도의 임무를 완수함을 목적으로”(제1조) 제정된 규정은 군 보도를 ‘작전보도’, ‘행정보도’, ‘일반보도’의 3종으로 구분했다. 이 규정은 군사 관련 공식담화 또는 기자단 회견 시 발표를 요하는 사항은 “국방부장관이 발행한 종군기자증의 교부를 받은” ‘군 출입기자’를 통하여 발표하도록 하였다(11조). 종군기자를 포함한 국방부 출입기자로 한정한 것이다. 그 직후 2월에는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 발행한 증명서 가운데 종군기자증, 보도요원증, 종군작가증 등을 제외한 각종 증명서는 다시 검인을 받도록 하고 검인받지 않은 증명서를 계속 소지한 자는 엄중처벌하도록 하여 혼란한 전시에 군 관련 증명서의 정비를 실시하였다. 종군기자는 군복 착용이 허용되었고, 종군기자 기장을 달도록 되었다. 
 
 이런 가운데 가짜 종군기자도 횡행했다. 6월에는 PRESS라는 표시를 단속했다. 정훈국장 이선근은 길거리에 PRESS라는 마크를 달고 다니는 가짜 종군기자가 민폐를 끼치며 국군과 유엔군을 현혹시키는 자가 많은데 종군기자의 위신을 보장하기 위하여 가짜 기자의 횡행을 관계당국과 연락하여 엄중단속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동아일보, 1951. 6. 10). 그러나 가짜 종군기자는 근절되지 않았고, 단속은 10월에도 실시되었다. 종군기자를 가장한 불법 군복 착용으로 군기 확립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군 취 당국에서 철저한 단속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9. 12, 동아일보, 서울신문, 9. 25)

 마침내 10월에는 종래의 종군기자단을 해체하고 새로운 종군기자단을 결성하기로 되어 15일에 열린 발기총회에서 국방부장관 이기붕은 이혜복(경향신문) 등 21명에게 표창장, 현역 종군기자 58명에게는 감사장을 수여했다. (부산일보, 1951. 10. 17, 국제신보, 10. 12) 

 종군기자의 일선취재 ‘보고강연회’ 또는 ‘귀환보고대회’는 국방부 정훈국 주최로 여러 차례 열렸다. 최신 뉴스 영화를 상영하고 군악대의 주악연주, 이화여대 합창단의 합창 등을 곁들여 기자들의 종군 실황을 보고하는 강연으로 국민의 사기를 진작하고 선전을 겸한 목적이었다(경향신문, 1951. 2. 27 광고, 부산일보, 3. 8 광고). 종군기자 보고대회는 서울에서 1952년에도 개최되는 등 계속되었다.

 종군기자에 대한 표창도 여러 차례 있었다. 1955년 1월 15일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로 종군기자 26명과 종군작가 4명에게 금성화랑훈장을 수여했다(조선일보, 1955. 1. 16, 기자들의 소속사는 훈장 수여 당시와 전쟁 중과 달라진 경우가 많음). 

종군기자 崔慶德 崔元珏(동아일보) 金禹鎔 鄭順觀 李蕙馥(서울신문) 張明德(합동통신) 李志雄 成澤雲(동양통신) 趙龍河(경향신문) 沈鍾求 卞兢植(평화신문) 尹宗鉉 崔起德 李月俊(연합신문) 金鎭燮 朴聖煥 朴重任(중앙일보) 芮庸海(한국일보) 金君瑞(국도신문) 金喜鍾 趙昌燮(시사통신) 鄭承奎(자유신문) 林學洙(종군기자단) 文濟安 全東天 方樂榮(조선일보) 종군작가 崔象德 金八峰 具常 朴榮濬

 세계 각국의 외국 종군기자가 취재하여 6?25 전쟁 중에 17명이 순직하였다. 전쟁 중에도 일본 기자들에 대한 반감은 거세었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열리는 정전회담 취재를 위하여 200여 명의 외국 기자들이 몰려온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국내 기자 16명이 문산(汶山)에 도착해 보니 일본 기자 18명이 종군기자 마크를 달고 회담장에 나타나 취재하고 있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항의했고, 유엔군사령부는 18명 가운데 허가받지 않고 온 일본 교도통신 특파원 2명에 대하여 도쿄 귀환을 명령했다. (조선일보, 1951. 7. 16, 22) 

일본 교도통신 특파원 귀환 명령

 정부는 일본 기자 가운데 유엔 종군기자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한 자라도 정부의 정식 입국허가를 받지 않은 자는 체포 또는 추방할 것이라고 언명(서울신문, 1952. 10. 13)하여 반일감정이 높았던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 주었다.

 1952년 10월에는 친일작가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장혁주(張赫宙, 일본명 노구치 미노루-野口稔)가 일본 여성지 ‘부인구락부’ 소속 유엔 종군기자 자격으로 한국에 와서 취재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이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조선일보는 ‘검은 안경으로 변장한 장혁주(張赫宙), 노구치(野口)로 개명하여 극비의 “조국” 여행’이라는 3단 기사를 실었다. 수난의 조국을 배반하고 스스로 일본에 귀화한 작가인 장혁주가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10일 동안 유엔 종군기자로 극비밀리에 왔다 갔다는 사실이 일본 신문 보도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그가 한국에 왔다는 풍설이 떠돌았는데(동아일보, 1952. 10. 24) 10일 동안 서울과 부산 거제도까지 여행하여 한국의 그릇된 인상을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게재하고 일본에 귀화하였다는 것이다. 요미우리 기사에 의하면 그는 이 여행을 극비밀리에 계획하여 검은 안경을 쓰고 유엔군 기자 패스포트로 돌아다녔다는 것으로 이 여행에서 두 개의 장편소설 소재를 얻었다고 말하고 한국인으로서 듣기 거북한 여러 말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1952. 11. 2)

 

 




  1. "이혜복, [본문으로]
  2. 경향신문, 1950.2.15, 한성일보, 2.26. [본문으로]
  3. 자유민보, 1950.5.20. [본문으로]
  4. 이혜복, 위의 글. [본문으로]
  5.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1950. 11. 10. 거의 동일한 내용이었는데 동아일보는 11일까지 2회 상세히 보도했다. [본문으로]
  6. "김정도, [본문으로]
Posted by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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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건강지킴이 2010.09.24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ㄹㄷ⑮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과 행복이 깃드시기를 기원합니다.
    건강 지킴이 내 병은 내가 고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