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피격 취재기

남상욱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

연평도가 불바다로 변했다. 북한은 군 시설은 물론 민간인 거주지에까지 무차별 포격을 했다. 우리 군 역시 곧장 대응 사격을 했다. 사실상 국지전(局地戰)이 벌어진 것이다.

그곳에서 정확히 10일을 보냈다. 지금도 사람들은 “솔직히 무서웠지?”라고 묻곤 한다. 연일 북한의 추가 포격 가능성이 제기될 때였다. 어떤 동료 기자는 “우린 볼모 신세”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추가 포격이 있을 때를 대비해 섬에 남아 있다는 생각에 다수가 공감했다.

어떤 이는 “먹고 자는 건 어떻게 했어?”라며 궁금해했다. 대부분의 주민이 떠나 섬은 텅 비어있었다. 식당도 숙박시설도 없었다. 어떤 기자는 “우리는 죽어도 시체가 썩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방부제 듬뿍 들어간 즉석 요리가 대부분의 식사였다.

실제로 나는 그곳에서 가끔은 무서웠고, 대부분은 배고팠고, 항상 추웠다. 하지만 정말 어려웠던 건 취재 과정이었다. 취재 대상은 한정적이었고, 제한이 많았다. 반면 지면은 항상 준비(?)돼 있었다. 아침 보고 시간이면 캡(경찰팀장)은 물었다. “오늘은 뭘 쓸 거니?”

통제선을 뚫고 섬으로 들어가라

“선배,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졌대요.” 2010년 11월 23일 오후 3시쯤. 후배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마감 시간의 압박이 온몸을 짓누를 때였다. 보통 때의 잡담이었다면 ‘지금 바쁘다’는 답을 했을 터. 그러나 분명 후배는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했다.

잠시 후 캡의 지시가 떨어졌다. “연평도로 가야겠다.” 바이스캡으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지금 바로 인천으로 출발해야 한다.”
옆자리의 동료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했던 기자실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나 역시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별다른 준비는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예견된 사건은 한 번도 없었다. 11박 12일 연평도 취재의 시작이었다.

인천여객선터미널로 가는 시간. 연평도의 주민들은 섬을 떠나고 있었다. 오후 3시 10분에 연평도를 출발한 배는 5시 조금 넘어 여객터미널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들을 먼저 만나야 했다. 포탄이 떨어지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에서는 서울에서 나를 포함해 2명의 취재 기자를 현장에 투입시켰다. 신문사 대부분 투입 인원은 비슷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인천 주재기자 2명까지 총 4명이 연평도 관련 취재를 해야 했다. 물론 국방부 취재 인력은 별도였다.

연평도를 빠져나온 이들은 “전쟁터”라고 말했다. 멀쩡한 하늘에서 포탄이 떨어졌으니 ‘날벼락’이었을 테다. 지금껏 평범한 그들의 주거 공간, 즉 민가에 북한의 공격이 이뤄진 적은 없었으니 “6・25 때도 이런 적은 없었어”라며 주민들은 울먹였다.

하지만 정작 현장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취재진이 섬으로 갈 방법은 없었다. 섬은 이미 군에 의해 출입이 통제됐다.

모든 관심은 ‘어떻게 섬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로 쏠렸다. 한 동료 기자는 “헤엄이라도 쳐야 하나”라고 중얼거렸다. 가능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결국 잠입밖에 답이 없었다. 누가 군의 눈을 속이고 들어가 ‘연평도=○○○기자’의 일보를 보도하느냐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누군가는 구호장비를 싣고 가는 화물선에 숨어들었다가 잡혀 나왔다. 누군가는 복구팀 직원으로 가장해 들어가려다 제지를 당했다. 나 역시 그랬다.

목표에 실패한 밤은 추웠다

목표에 실패한 밤은 추웠다. 한 명이라도 더 다른 사연을 듣기 위해 섬을 탈출하는 어선을 기다리고, 또 다른 주민을 인터뷰하는 일은 지루했고 갑갑했다. 늦은 시각 따뜻한 숙소를 구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운이 좋은(?)’, ‘실력이 뛰어난(?)’ 누군가는 성공하기 마련이다. 내가 아닌 게 불행일 뿐 독자에게는 좋은 기사였다.

아침 여객터미널에 다시 취재진이 모였다. 서로 인사를 했다. 아침 안개만큼이나 어투는 무거웠다.

“못 들어갔냐?”
“○○가 들어갔다는대요?”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수단 좋은 이들이 다시 섬으로 들어갔다. 일부 언론사가 정치인이 방문하는 길에 동승했다. 아침 일찍 들어가는 구호팀으로 가장하는 일이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예상대로 모 언론사의 ‘현장 르포’가 등장했다. 서울에서 오는 캡의 전화가 불편했다.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기자는 ‘무용(無用)’하다는 걸 대부분의 기자는 알고 있다. 캡의 목소리에는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현장 기자의 고단함을 알고 있다는 미묘한 어투가 깔려 있었다.

국방부에서는 여전히 취재진의 입도를 통제했다. 대신 몇 언론사를 추첨으로 뽑아 풀(취재한 내용을 다른 언론사와 공유하는 일) 기자단을 꾸렸다. 다행히도 한국일보가 포함됐다. 일단 입도는 가능해진 셈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날 아침 입도 통제가 풀렸다. 풀 기자단의 의미가 없어진 셈이다. 모든 언론사가 섬으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그에 앞서 일부 취재진은 풀 기자단과 함께 해양경찰청의 배를 탔다.

멀리 섬이 보였다. 2010년 11월 25일, 사건 발생 이틀이 지난 후였다. 한국일보는 취재 기자 2명, 사진 기자 2명이 섬으로 들어갔다. 라면 등 간단한 음식, 급히 산 장갑 등 방한 도구.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연평도 취재의 준비는 초라했다.

섬의 첫 인상은 일단 평범했다. 예상보다 조용했고,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러나 구석구석은 역시나 전쟁터였다.

섬에는 현지 주민보다 취재기자가 훨씬 많았다. 섬 안으로 오기 전에 확보한 주민의 전화번호는 무용했다. 모두 섬 밖으로 나갔다. 2010년 11월 26일 연평면사무소에 따르면 섬에 남은 주민의 수는 고작 20명이었다.

숙소를 구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일부는 초등학교에 짐을 풀었다. 그곳에는 난방시설이 없었다. 2010년 11월 말의 추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식사도 문제였다. 식당은 없었다. 지원과 복구인원을 위한 대한적십자사의 무료 배식이 있었다. 1,300인분의 식사를 준비해 온 이들은 단 세 끼 배식 후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했다.
현장에 투입됐으니 할 일은 현장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 기사로 쓰는 것이었다. 출입이 통제된 군 시설을 제외한다면 걸어서 1시간이면 섬을 다 돌아볼 수 있었다. 섬이 좁으니 두 명은 필요 없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취재 기자 한 명이 복귀했다.

그리고 2010년 11월 26일 오전 몇 발의 포성이 울렸다. 한 주민과 인터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주민은 바로 대피소로 달렸다. 주민들이 전화를 주고받았다. “어디에 떨어졌어?” 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포탄이 섬 안에 떨어졌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기자는? 나는?

사람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동료 기자와 함께 주민이 전하는 포탄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행동이었다. 정말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면 말이다. 며칠 후 다시 한번 ‘실제 상황’의 대피가 있었다. 그때는 재빠르게(?) 대피했다. 물론 대피 주민의 얘기를 듣기 위해 그랬다고 지금도 얘기 하곤 한다.

언제나 사건 사고의 현장을 찾는 기자의 촉수는 그곳 사람의 사연으로 쏠린다. 연평도도 마찬가지였다. 섬을 떠난 사람, 섬에 남은 사람, 그 사람들을 지원하는 이, 이들의 가족, 해외에서 찾아온 취재진. 모두가 취재 대상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얘기가 기사가 되지는 않는다. 특별한 뭔가를 가진 사람만이 소위 ‘기삿거리’가 되는 것이다.
선착장에서 만난 이남형(57) 씨 부부는 모두가 떠난 섬에 자발적으로 들어온 거의 유일한 외지인이었다. 섬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고 있는 맏아들 걱정에 경기도 안성에서 달려온 것이다.

해병대에 근무하는 아들 때문에 섬에 남았다는 신유택 할아버지. ‘깔깔이 아줌마’라고 불리던 이기옥 씨. 냉동고에 있는 꽃게를 못 팔 거라면 삶아서 다 먹어 치우겠다던 김정희 씨 등 섬 안의 남은 사람들. 이들의 얘기를 독자에게 더 많이 전하지 못해 아쉬웠다. 언제나 취재는 후회를 남긴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그날과 그곳은 나에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언젠가 누군가 연평도의 처참했던 포격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기억 속에 당시 상황을 전하던 한국일보의 기사가 있다면, 그게 나의 열흘간의 보람일 것이다.

2010년 12월 5일 나는 섬을 떠났다. 여전히 연평도에는 포격의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떠난 주민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배를 타고 점점 멀어지는 섬을 돌아봤다. 몇 번이고 돌아봐야 했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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