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일본인 발행 신문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언론유사’는 1996년 1월부터 <신문과방송>에 연재를 시작했었다. 2년 3개월 후인 1998년 3월까지 25회에 걸쳐 언론사 연구와 관련된 일화와 새로 밝혀진 언론비화 등에 관해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해서 썼다. 연재가 끝난 뒤 내용을 보완하고 묶어 <언론유사>(커뮤니케이션북스, 1999)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했다.

책은 독자들의 호응이 괜찮은 편이었던지 2001년에는 2쇄를 찍었고, 2004년에는 새로운 내용들을 추가하거나 보완하여 <고쳐 쓴 언론유사>로 제목을 바꾸어 개정판을 발행했다. 인기 있는 저자들의 책이라면 재판 정도야 별로 자랑거리가 아니겠지만 학술적인 내용으로 독자층이 그리 넓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2쇄 3쇄까지 나가는 책은 대박이라 할 수 있다. 제목에 ‘고쳐 쓴’이라는 말은 독립된 항목을 새로 집어넣어 신설하기도 하고 이전에 썼던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완하였기 때문이었다. 초판과는 책의 이름이 달라졌고, 내용을 대폭 개정한 것이다.
 
개정판에 추가한 항목 가운데는 납북 언론인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돌아오지 못한 언론인들’을 비롯하여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인덱스 작업 이야기도 있다. 초판을 낸 후 5년 사이에 이룩한 나의 연구 성과들을 새로 집어넣은 것이다.

최초의 여기자 이각경의 비극적 최후도 밝혀내어 추가했다. 초판에 썼던 내용에 더하여 그 후에 발견된 사실을 보완한 것이다. 최초의 여기자였고, 그때까지는 드문 직업이었던 보통학교 교사로 시대를 앞서가던 신여성이 가정불화로 음독 자살을 기도한 사건의 전말을 살펴본 이야기였다.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 마현경이 서울을 떠나 1938년부터 8년간 조용히 전북 정읍군 태인소학교 교사 생활을 했던 사실도 추가했다.

그런 내용들로 새로운 장을 만들어 넣으면서 초판에 있던 장과 절의 위치를 바꾸고 조정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새로운 책을 만든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분량도 상당히 늘었다. 원래의 제목 ‘언론유사’에 ‘고쳐 쓴’이라는 단어를 보탠 것은 그런 변화 때문이었다. 재판에 이어 개정판까지 낼 수 있었던 것은 딱딱한 논문체를 피하고 읽기 편한 문장에 흥미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으므로 언론사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자료연구회 제21회 총회 참가자들. 일본신문박물관 로비에서.

요코하마 신문박물관

초판 언론유사를 출간한 지 5년 만에 개정판을 냈는데, 그로부터 이제 또 6년이 흘렀으니 두 번째로 고쳐 쓴 유사가 나올 때도 되었다. 그동안 특별히 언론유사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은 채 유사에 해당하는 글을 여러 편 썼다. 작년 6・25전쟁 60주년을 맞으면서 ‘6・25전쟁 60년 : 언론사 탐구’라는 제목으로 <신문과 방송>에 연재했던 글이 그런 종류였다. 이번에 시작하는 ‘현대사 속의 언론’도 에세이 스타일과 학술 논문의 형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글을 써 보고자 한다.

일본에는 ‘신문자료연구회’라는 모임이 있다. 2010년 7월 10일에 요코하마 소재 일본신문박물관에서 제21회 대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가 보기로 했다. 조선일보 정보자료부장을 지낸 뒤 지금은 문화사업단에 근무 중인 최정태 기획위원과 KBS 진품명품 전문위원으로 출연하고 있는 ‘시간여행’ 김영준 대표가 일행이었다.

대회가 열리는 요코하마의 신문박물관은 가나가와 현청 바로 옆에 있는데 전에도 가 본 적이 있었다. 박물관이 들어 있는 건물의 명칭은 ‘요코하마정보문화센터’이고 뉴스 역사의 공원이라는 뜻으로 뉴스 파크(News Park)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문박물관은 정보문화센터 건물 5층을 차지하고 있다. 지하철에서는 도보로 10분, 버스는 ‘현청 앞’에서 1분 거리의 코앞이다.
 
박물관은 일본신문협회가 1987년부터 설립 준비를 시작하지만 요코하마 시의 협조로 부지를 확보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 때는 1997년이었다. 이듬해에는 박물관을 관리할 일본신문교육문화재단을 발족시켜 자료 수집과 개설 작업이 시작되었고, 2000년 10월 13일 개관했다. 개관 특별 기획으로 20세기의 호외 전시회를 가졌다.

요코하마는 도쿄에 앞서 신문이 발행된 도시였다. ‘나이가이신문(內外新聞)’(1865)이 첫 신문인데 원래는 일본인이었지만 미국 국적을 가졌던 조지프 헤코(Joseph Heco)가 일본인들의 협력을 얻어 요코하마에서 발행하였다. 외국 신문 번역이 주된 내용이었다. 일본 최초의 일간지 ‘요코하마 마이니치신문(橫濱每日新聞)’은 1871년 1월 28일(음력으로는 그 한 해 전인 메이지 3년 12월 8일)에 창간되었다. 이 신문이 발행된 장소에는 ‘신문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는데 가 보지는 못했다.

신문박물관은 연면적이 1,600여 평에 달한다. 1층 현관에는 대형 윤전기가 전시되어 2층과 3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박물관은 크게 ‘역사 존(zone)’과 ‘현대 존’ 두 파트로 나뉘어 있다. 3층 역사 존은 신문 발생기로부터 다매체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문의 역사를 6개 시대로 나눠 보여 준다.

신문 수집가인 하지마 도모유키(羽島知之) 신문자료연구회 회장은 신문박물관 개관 때에 10만여 점의 수집품을 양도했던 인물이다. 신문박물관의 수장품은 그가 수집한 신문이 대종을 이룬다. 그는 일본신문교육문화재단 학예부 특별전문위원을 지냈다. 중학교 시절인 1949년 국어 교사였던 담임 교사의 영향을 받아 신문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시작한 신문 수집은 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에 입사하였을 때 본격화되어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고서 경매시장을 찾아다니고, 일요일에는 우천에도 불구하고 첫 전차를 타고 고서점을 순방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왼쪽부터 신문자료연구회 하지마 회장, 정진석 교수, 김영준 시간여행 대표.

하지마는 신문 수집에 그치지 않고 방대한 자료를 편저로 출간했다. ‘호외’ 시리즈(12권), ‘신문광고 미술체계’(17권), ‘신문의 역사’(3권), ‘매스컴문헌대사전’(3권) 외에도 많은 자료집 성격의 편저를 엮었다. ‘전시하의 생활(戰時下の暮らし)’은 ‘태평양전쟁하의 일본: 1941~1945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일본 ‘신문자료연구회’ 총회

신문자료연구회 제21회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그 가운데는 명함에 ‘신문수집가’라는 타이틀을 붙인 사람도 있고, 고서점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백발의 나이 든 사람부터 젊은 대학원생까지 연령대의 폭도 넓었다. 학문적인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신문 수집 취미를 가지고 있거나 고서와 고신문을 파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회의 시작 전에 회의장 다른 편에 참가자들이 가지고 온 신문 자료들을 늘어놓고 누구나 살펴볼 수 있도록 넓은 회의 테이블 위에 전시해 두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자료를 가지고 왔는지 미리 살펴보도록 하였다가 저녁 시간에 예정된 ‘교환회’에서 구입할 사람이 관심 있는 자료를 점찍어 두도록 하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신문협회 사무국장의 환영 인사 후 참석자들의 자기소개와 근황발표 등으로 대회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내 관심을 끄는 것은 회의 내용이 아니라 참가자의 수집품으로 전시되어 있는 진귀한 신문이었다. 하기와라(萩原紀住)라는 사람이 소장한 자료 가운데는 1892년 7월 16일자 조선신보(제73호)가 들어 있었다. 하지마 회장 소장품인 1898년도 발행 조선신보 2점(6월 7일자: 638호, 6월 9일자: 639호)도 전시되어 있었다. 1892년 7월 16일자는 118년 전에 발행된 지면이다.

                  

    

조선신보(1898.6.9)에 실린 광고들.                                        조선신보(1898.6.7) 지면.

조선신보는 1890년 1월 28일 제물상보(濟物商사에서 창간한 ‘인천경성격주상보(仁川京城隔週商報)’에 뿌리가 닿아 있다. 서울의 독립신문보다 6년 앞서 일본인들이 경인 지역에서 발간한 신문으로는 최초였다. 부산에서는 1881년 12월부터 ‘조선신보’라는 또 다른 신문이 발행된 적이 있는데 오래 발행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그러나 인천의 조선신보는 제호를 조선신문으로 바꾸고 발행지를 서울로 이전하여 1942년까지 발행되었다. 일본인 발행 신문을 대표하는 신문이었고 가장 긴 수명을 지녔다. 창간 초기의 신문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후에 ‘조선신보’로 이름을 바꾸어 발간된 지면과 체제가 비슷했을 것이다. 일본 상인과 무역상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사와 광고가 실렸다. 

‘인천경성격주상보’는 1891년 8월 15일 제44호까지 발행된 후 9월 1일부터는 ‘조선순보(朝鮮旬報)’로 제호를 바꾸었다. ‘순보’는 열흘에 1회, 월 3회로 발행 간격이 약간 빨라졌다. 그러나 조선순보는 1892년 4월 5일까지 22호를 발행한 후 열흘 뒤인 4월 15일부터는 제호를 ‘조선신보(朝鮮新報)’로 또 한 번 바꾸었다. 발행 간격을 제호로 삼는 신문은 간격이 달라지면 제호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천경성격주상보’(월 2회)로 출발하여 ‘조선순보’(월 3회)→‘조선신보’(주간)→‘조선신문’(격일간에서 일간)으로 바뀌고 연중무휴, 조석간 발행으로 발전한 신문이 조선신보였다.

조선신보의 실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지면은 도쿄대학 ‘메이지신문잡지문고(明治新聞雜誌文庫)’에 소장된 1892년 5월 15일자, 지령은 제66호이다. 1892년 발행 신문으로는 5월 25일(67호), 6월 5일(68호), 9월 2일(80호) 등 4호가 소장되어 있다. 1906년 9월부터는 일본 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인천의 화도진도서관이 마이크로필름을 입수하여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에 위탁하여 영인본을 출간했다.

‘조선신보’ 1892년 지면 공개

이 영인본에는 필자가 ‘메이지신문잡지문고’로부터 마이크로필름을 입수한 초기 조선신문 11호를 앞에 넣고 ‘해제’를 썼는데, 1906년 9월부터 1921년 3월까지 인천에서 발행되다가 서울로 이전한 직후까지의 기간을 모두 수록했다. 하기와라가 소장한 1892년 7월 16일자 조선신보(제73호)와 하지마 회장이 소장한 1898년도 발행 신문 2점(6월 7일자: 638호, 6월9일자: 639호)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지면이었다. 조선신문 지면은 이틀 치 지면(1911.3.23, 1923.12.30)이 더 있었으나 이 시기의 신문은 국내에서 영인한 지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기와라는 일인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발행한 다를 신문도 몇 점 소장하고 있었다. 하기와라가 소장한 신문의 연혁을 정리해 본다.

하기와라 소장 신문(괄호 안은 발행지와 발행일)

北韓新報(청진, 1911.7.4) 1906년 7월 ‘北關新日本’이라는 제호의 석판 인쇄로 출발했다. 당시 청진은 개항 전이었고, 거주하던 일본인은 1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07년 4월 1l일 북한신보는 주식회사로 조직하고 활자와 기계를 구입하여 제호를 북한신보로 바꾸었다. 1912년 무렵에는 제호를 ‘북한일보’로 다시 바꾸었다.

元山每日新聞(원산, 1911.7.8) 1909년 1월 1일 창간. ‘북한실업신문’이라는 제호였다가 원산매일신문으로 개제했다. 원산을 중심으로 러시아 지역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까지 보급 범위에 포함되는 신문이었다.

朝鮮時報(부산, 1934.5.1) 1892년 7월 ‘釜山商況’으로 출발하였다가 ‘동아무역신문’을 거쳐 ‘조선시보’(1894년 11월)로 바뀌었다.

釜山日報(부산, 1938.5.18, 1939.5.23) 부산에서 발행된 대표적인 일본어 신문. 1905년 2월에 창간된 부산일보였다.

平壤每日新聞(1939.9.1 호외) 1920년 4월 창간과 동시에 진남포에서 발행되던 ‘西鮮日報’를 통합하여 평양, 진남포 두 도시를 거점으로 황해도와 평안남북도를 보급 대상으로 발행되었다.
全南新報(1942.8.7) 1909년 5월 9일 광주에서 창간.

總力全南(1943.2.1) 국민총력 전남도연맹에서 매월 1일 발행.

서울에서 발행되던 다음 신문의 지면도 있었는데 국내에도 있는 자료들이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京城日報(서울, 1914.5.2)
京日小國民新聞(서울, 1942.9.15)
朝鮮中央日報(서울, 1934.5.10)
每日新報(1938.7.16, 석간)

하지마 회장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1898년도 발행 조선신보 2점(6월 7일자: 638호, 6월 9일자: 639호)과 마산에서 발행된 ‘南鮮日報’(1914.7.21) 한 호를 소장하고 있었다. 남선일보는 1907년 10월 마산에서 ‘마산신보’라는 제호로 격일간으로 창간되었다가 1909년부터 일간으로 발전하였고, 1911년 3월에는 제호를 ‘남선일보’로 바꾸었다. 한때 서울의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가 경영을 맡았다가 다시 개인 소유로 되었다.

일본의 신문 수집가들이 한말과 일제 치하에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신문 가운데 몇 부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신문자료연구회에 참석했던 성과였다. 그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하던 19세기 이후 식민지가 된 뒤에는 각 도에서 신문을 발행했던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실물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몇 년 전에 도쿄대학 메이지신문잡지문고에 한말 일본인들이 발행한 신문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와서 관훈클럽의 ‘관훈저널’(2006년 봄호)과 ‘월간조선’(2006년 5월호)에 이를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신문 가운데는 마키노(牧野富太郞)라는 식물학자가 식물 표본을 채집하면서 흡습지(吸濕紙)로 사용한 조선신보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여러 신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과 그림 중심의 ‘신문의 역사’ 전3권. 하지마 편저

역사의 1차 자료를 모으는 사람들

이번에는 ‘신문자료연구회’라는 동호인 모임에 가지고 나온 신문을 보면서 일본인들은 무슨 물건이건 매우 소중하게 보존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기와라는 시즈오카 현 후지에다(藤枝市)에서 ‘신문라이브러리’를 가지고 있다고 명함에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큰 규모는 아닐 것이다. 같이 갔던 김영준 대표가 하기와라에게 소장품을 양도할 의향이 없는지 물어보았는데 한마디로 거절했다. 일본인 발행 신문은 문헌상으로는 존재가 알려져 있지만 실물은 보기 어려웠는데 낱장으로 남은 몇 종류의 신문이라도 당시의 신문사 연구를 위해서는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에는 도쿄에 있는 하지마 회장 댁에서 소장품들을 경매 형식으로 사고파는 ‘교환회’가 있었다. 각자 가지고 온 자료를 내놓으면 구매를 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이 기재된 카드 뒷면에 가격을 적어 내고, 소장자가 카드를 모아 가장 높은 액수를 기재한 사람이 당첨되는 경매 방식이었다. 신문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신문 판매를 위한 광고지, 판촉을 위한 각종 전화카드를 수집한 것, 특정 사건에 대한 호외를 모은 것, 시골 오지에서 발행된 오래전의 지역 신문 등 다양한 물건들이 나왔다. 김영준 대표는 이 자리에서 하지마 회장이 수집했던 조선신보 2점과 마산의 ‘남선일보’를 구입했다.

우리나라는 신문 호외가 없어진 지 오래다. 방송과 인터넷이 종이신문보다 훨씬 전달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지금도 호외를 발행한다. 베이징 올림픽 때 여러 신문이 발행한 호외 모음 같은 것을 들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호외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신문자료연구회 ‘연차대회’라기에는 초라한 모임이었다. 신문 수집에 관심과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자신이 가진 자료를 공개하고 교환하는 동호인 모임에 해당하는 성격이었지만 우리도 이런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을 아끼는 마음과 신문이 역사를 기록하는 소중한 자료라는 인식은 풀뿌리 일반인들의 의식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사료의 보존은 학자나 도서관 같은 공식적인 소장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문을 보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신문자료연구회 올해 모임에서도 새로운 자료가 많이 발굴될 것을 기대해 본다.
 

Posted by inhana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