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스페셜 신년기획 ‘블루 이코노미 세상을 바꾼다’

이후락 KBS 다큐멘터리국 프로듀서

밤 12시, 다들 퇴근한 텅 빈 사무실. 오늘도 혼자 책상 앞에 골똘히 앉아 있다. “도대체 블루 이코노미가 녹색경제와 뭐가 다른 거야? 친환경 콘셉트면 당연히 녹색이라야 되지 블루는 또 뭐야? 단지 영어와 한자(漢字)의 차이인가? 아니면 군터 파울리 박사가 자기 책 ‘블루 이코노미’를 팔아먹기 위해 상술 차원에서 지어낸 용어인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팀 전체회의에서 신년기획 아이템이 ‘블루 이코노미’로 정해진 후 계속 따라다니는 고민이었다. 책에는 ‘녹색성장이 단순히 기존 방식보다 좀 더 친환경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블루 이코노미는 이를 넘어 지구와 인간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경제로 나아가자는 것이고 그 비결은 자연의 방식대로 자원을 확보하고 순환하는 생산체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블루 이코노미는 말의 상찬에 불과할 뿐, 친환경적 성장을 도모하는 ‘녹색경제’나 동식물의 기능을 벤치마킹하는 ‘생체모방 기술’의 아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기존 개념들과 차별화할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기획이 프로그램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고, 그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섬싱 뉴’라고 배워온 내게 ‘블루 이코노미’는 도대체 ‘섬싱 뉴’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블루 이코노미가 뭐야?

그러다가 어느 날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가는 게 있었다. “블루 이코노미의 ‘블루’는 ‘푸른색’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맑고 깨끗한 것’을 이를 때 쓰는 말이 아닌가? ‘푸른 나무’, ‘푸른 마음’에서 쓰이는 것처럼. 그렇다면 ‘블루 이코노미’는 단순히 친환경적인 요소가 들어간 경우를 지칭하는 ‘녹색경제’를 넘어 오염원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 ‘청정경제’를 건설하자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비결은 자연이나 동식물의 방식을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계에는 어떤 동물도 폐기물을 남기는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어떤 식물도 돈을 지불하고 에너지를 쓰지 않으니까 말이다. 즉 자연에는 무공해이면서 공짜로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있고, 동식물들의 지혜를 잘 배우면 인간도 오염 없는 경제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구와 인간이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블루 이코노미다.” 이런 관점에서 군터 파울리의 ‘블루 이코노미’를 다시 읽어 보니 여러 주장들이 뒤얽혀 다소 산만하게 느껴졌던 내용들이 ‘청정경제’라는 한 개념으로 굴비처럼 엮여지는 게 아닌가. 나는 답을 찾았다.

스웨덴 스톡홀름시 말름쇠초중등학교의 햇볕을 모아 난방에 이용하는 유리지붕(위).
건물의 지붕에 설치하면 햇볕을 통과시켜 열기를 모으는 유기기와(아래)

“덜 유독한 해결책은 여전히 유독한 해결책일 뿐이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져야 한다.” (군터 파울리, ‘블루 이코노미’ 저자, 제로배출연구소(ZERI) 재단의 설립자)
“우리가 자연을 모방할 수만 있다면, 결국 우리의 문명은 살아남을 것이다.” (레스터 브라운 지구정책연구소장)

이런 말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가슴에 와 닿았다. 남들은 내가 왜 그렇게 이해를 못하는지 한심해했겠지만 내 자신이 수긍이 안 되면 진도가 안 나가는 걸 어떻게 하랴. 차별되는 기획이라는 확신이 안 섰을 때 그 다음 단계인 구성, 촬영, 편집 콘티 작성, 편집, 원고 쓰기 같은 작업이 제대로 잘 진행돼 본 적이 없다. 이게 내가 그렇게 기획에 맘을 쓰는 이유다. 흔히 기획을 ‘콘셉트 잡기’라고 한다. 10여 년 전 당시 존경하던 한 선배는 프로그램이 성공하기 위해 콘셉트를 한 줄 내로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상 넘어가면 주제가 불분명해진다는 얘기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차별되는 핵심 콘셉트는 ‘청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편의 가제목은 ‘청정경제가 달려온다’, 2편은 ‘에너지 투입 없는 청정건축’이라고 우선 정했다. 이제 내식대로 콘셉트를 정확히 이해했으니 일의 70%는 끝났다. 이제 달리는 일만 남았다.

소용돌이 발생장치를 통해 기포제거한 물로 얼음을 얼려 운영비의 20%를 절감하는 스웨덴 말뫼아레나 아이스링크.


가장 센 놈 잡기

콘셉트가 명확히 만들어지면 그 다음은 해당 콘셉트를 뒷받침할 사례를 확보해야 한다. 양에서 질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우선 최대한 많은 케이스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블루 이코노미’ 책에 나온 사례들을 일일이 뽑았다. 그런데 의외로 별로 참신하지 않은 사례가 많았다. 이미 알려져 있는 사례들 말이다. 그래서 미래의 기술이나 산업을 소개하는 책, 인터넷 등에서 블루 이코노미의 사례가 될 만한 것들을 더 뽑았다.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센 사례를 찾아 나갔다.

처음에 눈에 확 들어온 사례는 ‘폭격수풍뎅이를 모방한 가스 없는 추진체’였다. 영국의 앤디 매킨토시 교수가 개발한 장치다. 폭격수풍뎅이는 개미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엉덩이에서 순간적으로 뜨거운 기체를 방출하는 능력이 있다. 즉 이를 잘 응용하면 추진가스 없이도 내용물을 분무 상태로 분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심각한 오존층 파괴의 주범이 추진가스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추진가스를 쓰지 않고도 헤어스프레이나 청소용품, 항히스타민제, 살균제 등 수많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블루 이코노미의 확실한 사례인 것처럼 보였다. 추진가스라는 환경오염 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청정성이 있고, 동물의 지혜를 모방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기술은 스웨덴의 한 벤처기업에 의해 시제품만 만들어져 있을 뿐 전혀 매출이 없었다. 우리는 ‘블루 이코노미’라는 표현에 어울릴 정도로 현재 어느 정도 경제적 이익을 내는 제품이나 장치를 원했다. 블루 이코노미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대형 의료기기 업체 데루모사에서 개발한 아프지 않은 주사바늘 ‘나노패스33’도 흥미로운 제품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배제되었다. 나노패스33은 모기가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고 사람을 물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기초해 만들어졌다. 모기바늘처럼 주사바늘의 끝을 가늘고 길면서도 점점 넓어지게 만든 것이다. 2004년 특허승인을 받은 이 제품은 현재 당뇨병 환자들의 일상품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성공적인 제품이 되었다. 나노패스33 역시 동물의 지혜를 모방했고 특히 경제성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제품이 청정경제의 모범사례인지는 모호했다. 이 제품은 ‘생태모방 기술’로 탄생한 효율적인 제품인 것은 확실하지만, 오염 없는 청정경제라는 콘셉트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엄격하게 사례가 선정되었다. 단순한 효율성을 넘어 오염 없는 성장을 가능케 하는 청정성의 콘셉트와 부합하면서도 경제라는 말에 걸맞게 비용절감 효과나 시장성이 현재 있고, 특종성이 있으며, TV라는 영상매체에 적합한 비주얼한 영상이 있는지 등이 주된 고려 변수였다.

실제 이 프로그램은 기획과 사례 선정에 들어간 시간에 비해 촬영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듬직한 후배인 남진현 PD에게 미국 중서부, 캐나다 취재를 부탁하고, 영국의 간단한 인터뷰는 런던의 코디네이터에게 맡겼다. 스위스, 미국 동부, 일본 취재는 각 지역 PD 특파원에게 일임했다. 나는 가장 중요한 취재가 몰려 있는 유럽 4개국(스웨덴, 스페인, 독일, 덴마크)을 3주간 돌며 취재했다. 하지만 아무도 취재 방향에 대해 헛갈려 하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명확히 해석된 주제와 사례를 그들에게 정확히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스페인 엘 이에로섬에서 식물을 모방해 안개로 물을 모으는 안개수집기.


하늘의 방해 극복하기

그러나 하늘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자연의 무료 에너지를 이용하는 건물이나 시설들은 주로 태양에 기댄 것들이다. 건물 지붕에 유리기와를 설치해 햇볕으로 난방을 하는 건물, 건물 남쪽에 설치한 온실의 수증기로 냉난방을 하는 건물 등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는 곳마다 햇볕이 나지 않는 거다. 스웨덴과 독일, 덴마크에선 계속 눈이 내렸다. 특히 독일에선 눈 때문에 비행장에서 2일이나 기다려야 했다. 한 해 햇빛이 나는 날이 300일 이상이라는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서도 취재 기간 내내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씨였다. 엘이에로 섬에서 다음 목적지로 옮길 때는 스페인 최초로 비행장 관제사들이 파업을 해 또 하루 일정을 공쳐야 했다. 야속한 하늘!

스페인의 엘이에로 섬은 비가 거의 안 오는 사막 기후지만 물 걱정이 별로 없다고 했다. 섬의 나무들이 잎에 묻은 안개를 이용해 살아가는 것을 모방해 안개 수집기를 만들어 물을 확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 찾아갔다. 그런데 역시 내가 갔을 때는 안개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방문한 그때가 1년 중 안개가 제일 적을 때란다. 그래도 취재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아니 믿는 구석이 있어서 느긋한 마음도 있었다.

블루 이코노미의 콘셉트를 명확히 알고 있고 적확한 사례를 확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사례의 콘셉트가 잘 드러나도록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선배들에게 배운 대로 현장에서의 연출력으로 극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안개는 없지만 안개로 만들어진 물을 떠서 맛있게 먹어도 보고, 그 물에 웃통을 벗고 세수도 했다. 숲 속에 설치한 안개 수집기는 관계자에게 부탁해 바닥에 흘려도 보고 제작된 모형으로 직접 안개 수집도 해 봤다.

도시의 눈 쓰레기를 모아 두었다가 여름 냉방에 사용하는 스웨덴의 순드스발병원에 가서는 직접 눈구덩이 속에 들어갔다. 엄청 모여진 눈 속을 푹푹 빠지며 걸어도 가 보고 중간 중간에 생긴 얼음덩이는 도끼로 깨서 만져도 보고 하는 식이다.

연출이란 조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얼핏 보면 주위의 잔가지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본줄기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주위를 정리하는 작업일 것이다. 물론 잔가지를 본줄기라고 우겨선 안 된다. 그것은 연출자의 양식이다.

어려운 고비 고비를 넘기고 방송은 나갔다. 그리고 나는 이 제작기를 쓰고 있다. 최선을 다한다면 넘기지 못할 고비는 없다.

역사적 전환점을 직접 취재하는 즐거움

정말 우여곡절이 많은 힘든 취재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큰 소득이 있었다. 정말 블루 이코노미가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간 많은 사람들처럼 나 자신도 지구와 환경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하고 있었지만 변화의 바람이 과연 불어올까 하는 생각이 많았다. 과연 성장만을 외치는 이 천박한 사회에서 장식이 아닌 진정한 친환경적 변화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유럽은 이미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 대안적 삶이 아니었다. 이미 주류로 진입하고 있고 이에 대한 다양한 부가가치가 생기고 돈을 벌고 고용을 창출하고 있었다.

스웨덴 말뫼 시의 말뫼아레나아이스링크는 다른 아이스링크와 달리 항상 스케이터로 붐빈다. 게다가 주된 운영비인 전기료도 20% 이상 절감하고 있다. 이유는 소용돌이 발생장치를 통과한 물을 쓰기 때문이다. 물이 소용돌이를 거치면 물속 작은 기포들이 빠져나가 더 투명하고 단단한 얼음이 된다. 게다가 이 물은 얼릴 때 열전달을 방해하는 기포가 사라졌기 때문에 만드는 비용도 줄어든다.

기름(디젤, 에탄올 등)을 만들어내는 녹조류가 새로운 청정 바이오에너지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외에도 어떤 바닥 위를 기어도 깨끗함을 유지하는 달팽이를 모방해 탄생한 ‘스스로 깨끗해지는 변기와 타일’을 만든 회사, 더러운 물에서 자라는 녹조류를 키워 석유를 대체할 바이오디젤을 생산하는 기업 등 전 세계는 동식물이나 자연계의 원리를 모방한 ‘블루 이코노미’ 기술들을 속속 개발해 이미 돈을 벌고 있다. 이런 기술들은 생태계가 진화를 통해 수억 년 동안 스스로 최적화해 온 방식이기 때문에 이를 모방할 경우 매우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친환경적인 제품이 될 수밖에 없다. 건축에 필요한 모든 요소 역시 자연에서 찾아내 필요를 충족시키는 청정 블루 이코노미 기술들이 속속 실용화되고 있다.

특히 선진국들은 국가가 직접 청정경제 건설에 나서고 있다. 청정에너지의 경연장으로 불리는 덴마크의 롤란드 섬, 2015년까지 지역재생에너지로만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스페인의 엘이에로 섬도 그중 하나다. 이곳에서 청정 기술을 적극 시험함으로써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에너지를 절감하고 기업성장의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국가적 경쟁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미 형성되고 있다. ‘블루 이코노미’의 거대한 흐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전환점을 내가 직접 취재하고, 먼저 알게 된 사실을 국민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제작자로서 큰 즐거움이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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