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의 언론 탄압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학


일본은 만주사변에 이은 중일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던 1930년대에 언론 통제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언론 통제를 관장하는 기구가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였다. 일본은 총리대신 직속기구로 설치한 내각정보부(1937. 9. 25 칙령 제519호)가 언론 통제의 본산이었다. 정보와 사상을 통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언론을 전쟁 수행의 자원이자 무기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었다. 중일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국내와 외국을 향한 선전과 언론 통제가 긴요해지자 1940년 12월 5일에는 정보부를 정보국으로 격상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매일신보에 실린 ‘반전기사’ 필화

조선에서는 전쟁 이전에 경무국이 담당했던 언론 통제를 1940년 무렵부터 조선주둔군 사령부가 간여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실질적인 통제권이 군으로 넘어가는 형국이 되었다. 언론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드넓은 중국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로 장기전을 치르는 한편 태평양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럽에서 제2차 대전이 터지기 두 달 전인 1939년 7월 8일 총독부는 국민징용령을 공포하여 전투병 확보를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9월 17일 소련군이 동부 폴란드에 진출하였지만, 독일군의 공중 폭격으로 바르샤바가 함락되어 전쟁의 검은 구름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1940년 1월 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김진섭의 글 ‘아즉은 염려 업다’가 필화를 불러일으킨 때는 이처럼 전쟁의 불길이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조선 주둔 일본 헌병대가 김진섭의 글이 ‘반전(反戰)사상’을 지닌 내용이라는 이유로 필자를 소환 조사하자 총독부 경무국도 이를 기화로 매일신보 문화부장 조용만, 편집국장 김형원, 사회부장 김기진(김팔봉)에게 책임을 추궁하였고, 신문사를 떠나도록 했다. 파동이 큰 필화 사건이었는데 이 필화에 관해서는 내가 주한 일본 헌병대가 작성한 자료를 발굴하여 상세한 경위를 밝히고 사건의 전모를 재구성하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2005년 6월 호 ‘문학사상’에 실린 글이다.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수필가 김진섭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 중이었다. 문제가 된 글은 200자 원고지 10장의 짧은 분량이었다. “전쟁은 설사 그것이 정의를 위한 불가피의 전쟁일 경우에 있어서도 문화의 두려운 파괴자인 것은 두말할 것이 없으니…”로 시작한 글은 육탄과 폭약이 ‘국가의 가장 고귀한 자본인 인간’의 생명을 무수히 살상한다. 그리고 인간 노력의 결정인 문화재를 여지없이 파괴하는 것이 실로 전쟁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에는 국가가 시민의 생활을 규제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의견 발표, 경제적 활동도 제한받고 식료품의 소비까지도 그 통제하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은 개인의 광범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고 썼다. 김진섭은 전쟁의 참상을 강조한 글로 볼 수 있는 논지를 이어 나갔다.

김진섭의 ‘아즉은 염려 업다’가 실린 매일신보 1940년 1월 6일자.

유럽에서 일어난 2차 대전에 관해서도 “우리가 여기 문화의 장래를 생각하게 될 때 금차(今次)의 구주대전은 식자(識者)를 우려시키는 바 적지 안흔 것이 잇다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을 기습 공격하는 태평양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던 일본 군부의 눈에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반전사상을 유포하는 글로 비쳤을 것이다.

도서과의 기준과 헌병대의 시각

글이 처음 신문에 게재되었던 1월 6일에 검열을 담당했던 경무국 도서과는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던지 그대로 지나갔다. 그러나 군의 관점은 달랐다. 조선군 헌병대는 글이 전쟁을 전면적으로 배격한 것으로 해석했다. 전시 체제에 대한 항의로, ‘반전사상’을 내포하였으며 암암리에 중일전쟁을 저주하는 취지라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김진섭을 소환하여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경무국 도서과도 그대로 있기 어려운 입장이 되었다. 도서과장 쓰쓰이(筒井竹雄)는 매일신보 부사장 이상협과 학예부장 조용만을 불러 책임을 추궁했다. 이리하여 앞서 말한 대로 문화부장 조용만은 부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여파였는지 편집국장과 사회부장까지 신문사를 떠나는 사태로 번졌다.

필화의 원인을 제공했던 김진섭은 조선군 헌병대 본부에 출두하여 취조를 받은 후에 1월 13일자로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다. 김진섭이 일어로 쓴 ‘서약서’의 요지는 이렇다. 사변하의 중대 시국에 처하여 일반 민중을 지도해야 할 대학도서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잊어버리고 외국인이 저술한 문서를 발췌하여 일견 중일전쟁[支那事變]을 비방하는 것으로 보이는 글을 발표한 것은 잘못되었다. 뉘우치고 당분간 근신할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앞으로 집필할 경우에는 충분한 주의와 함께 더욱 국책적(國策的) 견지에 입각하여 문필보국(文筆報國)에 매진할 것이다. ‘문필보국’은 흔히 사용되던 용어였다. 글로써 나라에 보답한다는 말이다.

김진섭은 조사과정에서 상당한 곤욕은 치렀지만 더 이상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그가 취업을 원했던 경성중앙방송국의 제2방송부에 입사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제1방송은 일본어 방송이었고 제2방송은 조선어 방송이었다. 필화가 일어나기 직전에 김진섭은 경성제대 도서관의 사서를 사임하고 경성방송국에 취직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헌병대나 경찰이 방송국 입사를 방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헌병대는 엄격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김진섭이 사상적으로 용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의 글은 자신의 학력을 과신하여 신문사의 청탁에 응하여 외국인의 저서를 무비판적으로 발췌 집필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범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별 문제가 아닌 글을 끄집어내어 필자를 불러 조사를 벌이고, 여파로 매일신보의 핵심 편집진을 갈아치우도록 압박한 것은 언론에 대한 예비적인 위협이었다.

헌병대 참모장 가토는 육군성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식량 문제가 첨예화하고 있는 상황이며, 조선의 민중 가운데는 반전 기운이 싹틀 우려도 있기 때문에 사태의 발생을 미연에 엄격히 경계 중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기관지가 이런 종류의 반전적 논설을 게재한 것은 묵과할 수 없으므로 문제 삼았다고 말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글은 추호도 허용하지 않을 방침임을 명백히 하고 사전에 위협을 가하려던 차에 김진섭의 글이 걸려들었음을 참모장 가토의 보고서는 설명해 주고 있다. 김진섭을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종류의 ‘반전사상’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언론인과 문인들에게 확실히 알려 준 효과는 있었다. 언론은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토의 보고서에서 주목할 다른 대목이 또 있다. “식량 문제가 첨예화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구절이다. 군량미 조달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던 당시로서는 쌀을 비롯한 곡물이 크게 부족했다. 총독부는 1939년 2월 중국에 대한 쌀 수출을 제한하기로 결정했고, 8월에는 미곡 최고판매 가격 제도를 실시하였다. 10월에는 ‘조선미곡임시증산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이해 쌀 수확고는 1,435만 5,973석이었는데 5년 뒤에는 55%를 증산하여 2,600만 석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조선군 총참모장이 작성해 육군 차관에게 보낸 김진섭 수사 기록 표지(왼쪽). 김진섭의 ‘서약서’. 경성 헌병대장에게 써 준 것이다(오른쪽).

쌀 부족은 심각한 민생 문제였기 때문에 쌀은 총독부의 엄중한 통제 대상이 되어 있었다. 쌀은 마음대로 사고팔 수도 없었다. 쌀을 사 준다는 말에 속아 사기당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때에 인천에 사는 한 어린이가 조선일보에 투고한 ‘쌀’이라는 작문이 압수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조선일보는 매주 일요일에 어린이 대상 부록을 발행했는데, 미리 작문 주제 2개를 설정하여 2주일 단위로 기한을 주어 응모하는 난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5월 5일자 어린이 부록에 ‘쌀’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5월 16일까지 응모하도록 하여 19일 신문에 당선작과 가작을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쌀이라는 주제로 모집한 작문의 입선자는 3명이었다.

우등 동광심상소학교 6학년 여학생 민형숙
가작 경성수송심상소학교 5학년 남학생 조택동
가작 경성혜화심상소학교 4학년 남학생 김태완

5월 19일자 지면에는 위의 세 어린이 글이 실렸고, 그 다음에 이어 기사가 삭제된 공란이 남아 있었다. 당시 신문에 흔히 나타나는 검열의 흔적으로 보이는 좁은 공란이었다. 그 자리에 무슨 글이 실렸다가 깎인 자국인지 독자들은 알 수 없었고, 관심을 끌 정도로 표가 나는 자리도 아니었다. 기사가 사라진 자국이 남아 있는 상태로 세월이 흘렀다.

삭제된 어린이 작문 ‘쌀’

어린이 부록에서 기사가 깎인 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60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졌다. 삭제된 글은 총독부 경무국이 발행한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이라는 비밀기록에 남아 있었다. 검열에 걸려 깎인 자리에는 원래 조영희(趙英喜)라는 어린이의 작문이 실려 있었다. 글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일본어로 전문이 번역되어 있었다.1)

쌀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작년은 흉년으로 우리는 쌀이 부족해서 매우 곤란했습니다. 특히 인천에서는 그 무렵 돈이 있어도 쌀을 사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각 동회 사무소에서 집집마다 사람의 수를 조사해서 앞으로 쌀을 살 수 있는 전표가 나왔기 때문에 약간 편리해졌지만, 우리가 사는 금곡정(金谷町)에는 아직 전표가 나오지 않아서 오후 3시경부터 쌀가게 앞에는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는 것처럼 혼잡했습니다. 서로 먼저 사려고 죽을힘을 다해 밀고 당기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애를 써도 쌀 한 되와 보리 한 되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조차도 좀 늦게 간 사람들은 쌀이 모두 없어져서 사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1년의 흉년으로도 이처럼 쌀 사기가 어려웠는데 올해도 비가 오지 않아서 큰일이라고 어른들이 매일 걱정하고 있습니다.

쌀 부족이 심각했던 궁핍하고 암울한 사회상을 어린이의 눈으로 묘사한 글이었다. 작문 뒤에는 “평범한 작문입니다. 좀 더 재미있게 써 보십시오”라는 선자(選者)의 ‘심사평’이 붙어 있었다. 글을 선발한 심사위원이 보기에 그저 평범한 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총독부의 검열관은 이 글에 압수 처분을 내렸다. “어린이의 작품으로는 명랑하지도 않고 내용 역시 온당하지 않다”는 것이 압수 이유였다. 신문사는 이런 글을 가작으로 게재했을 뿐 아니라 심사를 맡은 사람은 더 재미있게 써 보라고 평하는 등 “시국에 근신하지 않은 필치”라는 것이 검열관의 잣대였다.2)

어린이 작문 ‘쌀’이 삭제된 지면(아랫부분 2단). 조선일보 1940년 5월 19일자.

당시 신문은 쌀 부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사를 거의 매일 실었다. 인천에서는 쌀 부족으로 배급이 원활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은 중류 이상 여유 있는 가정이 매점(買占)하기 때문이라면서 인천경찰서가 나서서 일주일 이상 먹을 곡식을 쌓아 둔 가정은 남는 곡식을 강제로 쌀집으로 운반시켜 쌀을 팔게 한 후에 다 같이 사 먹도록 하고, 쌀을 사서 감춘 자는 용서 없이 처벌한다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했다.3) 같은 날 사회면에는 서울에 3월 하순부터 외국 쌀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매일 2,000석이 배급되는데도 충분한 양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각 싸전에는 매일 쌀자루를 든 사람들의 행렬이 계속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기사도 실렸다. 서울에서도 식구 수에 따라 쌀 구매표를 발급하는 등의 방안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일보가 ‘쌀’이라는 주제로 작문을 모집했고, 가작으로 뽑힌 어린이의 글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총독부의 비밀 자료에 들어 있던 작문

총독부 경무국은 1932년 6월에 비밀 자료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3권을 발행했다. ‘언문신문’은 조선어 신문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차압기사’란 압수한 기사를 의미한다. 압수한 한국어 신문의 기사를 모은 비밀 자료집을 발행한 것이다.

고등경찰과와 도서과는 민간지 창간 이후에 매일 발행되는 신문을 철저히 검열하고 기사를 삭제 또는 압수하면서 문제가 된 기사를 보관했다가 10년 치 분량을 일어로 번역해 동아일보(조사자료 제29집), 조선일보(제30집), 시대일보・중외일보(제31집) 등 3개 신문사의 압수 기사를 묶은 자료집을 발행한 것이다.

언론 통제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고 조선 통치의 자료로 활용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후로도 총독부는 세 차례에 걸쳐 압수 기사를 모은 자료집을 발간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 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일층 강화하고 체계화하였음은 위에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언론의 논조가 1920년대에 비해 훨씬 위축되었다. 그 결과로 압수당하는 기사 건수는 오히려 크게 줄었다. 언론 통제가 심해지면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기사가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총독부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 2년간의 압수 기사를 묶은 비밀 자료를 한 권으로 만들어 발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료는 아직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937년 5월에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4년간 3개 민간지의 압수 기사를 한 권에 모은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을 편찬했다. 압수기사집록의 세 번째 자료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3개 신문의 기사 4년 치를 합쳐도 74쪽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1940년 8월에는 네 번째로 마지막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을 발행하였다. 8월 10일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었으므로 더 이상 발행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총독부가 일본어로 번역한 압수기사 ‘쌀’.

압수기사의 비밀자료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발행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차:3책 발행(1920~1930년의 압수 기사)
   동아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29집: 1932년 9월 발행) 574쪽.
   조선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30집: 1932년 12월 발행) 512쪽.
   시대일보•중외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31집: 1932년 6월 발행) 311쪽.
제2차:1931~1932년의 압수 기사를 한 책으로 발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자료는 찾을 수 없음.
제3차:1933~1936년 사이의 3개 신문 압수 기사를 한 권으로 발행. 1937년 5월 발행. 74쪽.
제4차:1937~1940년 8월 사이의 3개 신문 압수 기사를 한 권으로 발행. 1940년 8월 발행. 48쪽.

1940년에 발행된 제4차 자료 ‘언문기사차압집록’은 2003년 일본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국내에는 어느 도서관에서도 본 적이 없고 개인 소장본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2003년 무렵에야 아사히신문 서울 특파원을 지낸 오다가와 고우(小田川興) 씨가 일본 의회도서관에 한 권이 있는 자료를 발견하여 내게 알려 주었다. 그 가운데 조영희라는 어린이의 삭제된 ‘쌀’이라는 작문이 들어 있었다. 이로써 삭제된 글이 어떤 내용인지 알게 되었다. 어린이의 작문이 다시 햇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1940년 판 ‘조선출판경찰개요’에도 같은 글이 실려 있었지만 이 자료도 그 무렵에야 내가 처음 보았다.

조영희의 ‘쌀’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일보가 마지막으로 압수당한 기사였다. 그해 8월 10일에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당할 때까지 3개월이 조금 모자라는 기간은 압수당한 기사가 없었다. 1940년은 김진섭의 매일신보 ‘반전기사’ 필화에서 조영희의 ‘쌀’ 압수까지 총독부와 헌병대의 언론 탄압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주>
1) 소화 15년 8월 ‘諺文新聞差押記事輯錄’, p.48.
2)‘1940년 조선출판경찰개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1940, pp.110-111.
3)조선일보, ‘買藏한 糧米는 回收, 다시 米店에서 分賣’, 1940.4.12.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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