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ABU 국제 공동제작 다큐 ‘CARE’

이건협 KBS 다큐멘터리국 프로듀서

국제 공동제작이라…. 꽤나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막상 업무 지정을 받은 프로듀서의 입장에서는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는 그간 호흡을 맞춰 온 능숙한 스태프들과 일해도 제대로 만들기가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말도 다르고 제작 수준조차 다른 외국 프로듀서들과의 공동 제작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간의 전례를 보더라도 국제 공동제작이란 참가사들이 알아서 제작한 꼭지들을 모두 모으는 정도이거나 한 참가사가 주도하고 다른 참가사들은 현지 코디나 자료 조사를 해 주는 수준에 머무는 정도였다.

열일곱 색깔 무지개 만들기

심지어 제작 도중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고자 했다. 비록 수준 차는 나더라도 참가사들이 적극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제작에 참여하도록 하고 그 속에서 최대한의 결과물을 얻고자 했다. 물론 열일곱 나라의 프로듀서들이 한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고 그걸 해결하느라 전화와 이메일을 붙잡고 싸우다 보니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아시아를 바꾸고 지구를 구하자’(Change Asia Rescue the Earth).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제목을 붙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열일곱 색깔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국제 공동제작의 첫 단계는 주제를 선정하는 것과 참가사를 모으는 일이다. 주제는 예상 참가사들이 모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보편적이어야 했다. 다행히 KBS 국제협력실에서 유엔의 새천년개발목표(MDGs : 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제안해 주었다.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을 반으로 줄이자는 큰 주제 아래 질병 퇴치, 모성 보호, 지속 가능한 환경 보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전 세계적 캠페인인데 인류의 보편적인 행복을 증진시키자는 것이어서 국제 공동제작의 주제로서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 다음 숙제는 주제에 걸맞은 제목 찾기였다. 주제를 연상시키는 단어를 찾아 영어 사전을 수십 번 뒤적이다 번쩍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CARE였다.

체아 파니스 캄보디아 TVK 프로듀서와 허정 KBS 카메라 감독이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CARE… 돌보다

누구를 돌본다는 뜻, 이보다 더 주제와 딱 들어맞는 적절한 단어는 없었다. 거기다 지역적 특색을 담기 위해 ‘아시아를 바꾸고 지구를 구하자’는 의미까지 포함시켰다. 참가 대상을 아시아태평양 지역 공영 방송사로 정하고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ABU) 측에 공식 제안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방송사들의 모임인 ABU 측에서도 국제 공동제작을 활성화하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에 흔쾌히 ABU의 공식 프로젝트로 채택됐다.

가능한 한 많은 방송사를 참여시키는 것과 함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HD 제작이었다. 아직 대부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방송사들은 HD 송출은 물론 HD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방송사들을 위해 KBS가 HD 제작 인력과 장비를 지원하면 프로그램의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재교육 기회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참가 안내와 접수는 국제협력실에서 담당해 주었고 나는 1차 프로듀서 회의 준비에 착수했다. 아이템은 방송사별로 준비할 것이지만 다소 부족한 아이템을 가지고 올 경우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따로 자료 조사원을 두고 국가별로 주제에 맞는 사례 조사를 마쳤다.

2010년 10월 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차 프로듀서 회의.


그렇게 약 두 달간의 준비 끝에 2010년 10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제1차 프로듀서 회의가 열렸다. 경비는 모두 KBS가 부담했는데 아시아태평양 방송사들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아 예산이 부담되면 참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KBS를 포함해 모두 17개 사의 프로듀서가 참가했다. 그런데 절반이 넘는 프로듀서들이 환경 관련 소재를 가지고 왔다. 빈곤 등 자국의 좋지 않은 내용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썩 내키지 않은 것 같았다. 자칫 환경 다큐멘터리가 될 판이었다. 나와 김영선 PD는 미리 준비해 간 자료를 토대로 사흘 동안의 진지한 토론 끝에 빈곤, 질병, 환경, 여성 등 4개 범주를 나누고 범주별로 방송사 배정까지 조정해야 했다.

KBS를 제외한 16개 사 중 HD 송출을 하고 있는 국가는 일본, 중국, 호주 등 모두 5개사였고 송출은 하지 않지만 HD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방송사가 4개사였다. 나머지 7개사의 아이템은 KBS가 HD 인력 및 장비를 지원해 제작하기로 했다. 참가사들은 10분 분량의 취재물과 대본을 KBS에 제출하고 제작편집 및 더빙은 프로젝트의 통일성을 위해 KBS가 전담하기로 했다.

국제 공동제작에서 사전 프로듀서 회의는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일단 안면을 익혀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회의 기간 동안 쌓아 놓은 인간적인 친분이 이후 프로그램 진행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저작권에 관한 문제도 반드시 합의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문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경우 참가사별 제작물의 저작권은 해당 사가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하고 권리는 ABU와 모든 참가사가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제작 과정 중 특히 신경을 썼던 분야는 PI(Prog-ram Identity)였다. 프로그램 로고 및 타이틀, 예고, 포스터 등 프로그램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성을 담기 위해 KBS 콘텐츠특수영상부에서 아트 디렉터를 배정받았다. 수차례의 회의를 거쳐 아이를 포근히 감싸는 어머니의 모습을 이미지화했다.

틀림 혹은 다름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 자체 제작이 가능한 9개사로부터는 구체적인 촬영 대본을 제출받아 검토한 후 보완 의견을 제시해 주었다. 몽골 MNB의 프로듀서 뎀칙은 나의 요구대로 혹한 속에서 불법 금광에서 일하는 여성의 지하 작업 장면을 촬영하다 폐렴에 걸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프로듀서들은 기존 프로그램 제작을 하면서도 성실히 촬영에 임해 주었다. HD 장비가 없는 나머지 7개사의 촬영을 위해 나와 김영선 프로듀서가 각각 촬영 팀을 구성해 현지로 날아갔다. 사전에 촬영 콘티를 제출받아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도록 요청했다. 현장 촬영은 현지 프로듀서가 KBS 카메라맨과 진행하도록 하고 필요할 경우 우리가 조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각국별 자료조사와 현장 섭외는 참가사 프로듀서의 몫이었는데 제대로 준비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촬영 당일 즉석에서 섭외가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촬영 방식도 달랐다. 대부분의 방송사들은 인터뷰 위주의 제작에만 익숙해 있었다. 그림은 대부분 내레이션을 덮어 주는 밑그림에 불과했다. 제작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인정하기에는 나중에 나올 결과물이 심히 걱정될 정도였다. 불가피하게 개입이 필요했다. 장소별로 현지 프로듀서가 촬영을 마친 이후 필요한 그림과 상황을 추가로 취재했다. 편집도 문제였다. 그래서 HD 장비가 없는 7개사 프로듀서들을 수원의 KBS 인재개발센터로 초청했다. NLE 장비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자신이 직접 편집을 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방송사들은 프로듀서들이 직접 편집을 하지 않고 편집 기사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프로듀서가 직접 편집을 해야 할 이유를 설득했고 나중에는 오히려 유익했다는 감사를 받기도 했다. 현지 촬영과 편집에 KBS가 인력과 장비를 지원한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프로그램만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다소 제작 여건이 불비한 방송사들을 위한 재교육의 기회가 된 셈이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다카의 버나니 빈민촌에서 살고 있는 무잠멜(10세),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먹여살리고 있다.

김현수 KBS 카메라 감독과 킹가 펜조르 부탄 BBS 프로듀서.

무한한 가능성의 보고 국제 공동제작

최종 편집본과 대본을 모두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가별로 포맷이 달라 일일이 컨버팅을 해야 하는 건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SD로 보내오거나 현장 음이 아예 삭제된 채 온 경우도 있었다.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다가 심지어 방송 하루 전에야 편집본이 와 속이 새까맣게 타 버리기도 했다.

그간의 국제 공동제작 분야는 거의 NHK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느낀 건 국제 공동제작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해외 취재는 현지 한국인을 통해 자료조사와 섭외가 이뤄진다. 현실적으로 유일한 방법이지만 분명 한계도 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 담긴 소재들은 모두 현지 프로듀서들이 찾아낸 것들인 데다 외국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부분까지 접근이 가능했다. 그만큼 현장 취재를 더 충실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지 전문가인 이들을 잘 활용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을 발굴해 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현지 프로듀서들은 내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몇몇 아이템을 제시하고 가능하다면 공동제작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공동제작 덕에 아시아 전역에 열여섯 명의 새 친구가 생겼다. 제작 기간 중 첫딸을 낳은 파니스(캄보디아 TVK)는 일주일 만에 한국으로 날아와야 했다. 생전 눈을 보지 못한 푸아소피스(태국 NBT)와 로힘(인도네시아 TVRI)은 내 덕에 한국에 와서 생애 처음 눈을 보는 감격까지 누렸다. 자동차를 너무 좋아해 두 번째 부인이라 불렀던 펜조르(부탄 BBS)에게 자동차용 페인트를 구해 주기 위해 수원의 부품 골목을 누비던 일, 한국 사람들보다 더 폭탄주를 좋아했던 군도간(터키 TRT)의 환한 얼굴도 생생하다. 이제 우리들은 페이스북 친구일 뿐 아니라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국제 공동제작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아쉬운 점도 물론 있다. 프로그램의 깊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단순히 아시아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담는 수준에만 머물렀다. 욕심 같아서는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만든 구조적인 문제까지 담고 싶었지만 시간과 예산이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후속 프로그램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이 부분까지 담아 주기를 동료 프로듀서들에게 당부해 본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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