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문과방송> 2009년 3월호 사람과 생각


언론사 갈등으로 상처난 동료애 치유를
제언-기자 사회의 동료애를 살리자


윤재석 국민일보 논설위원


대척 매체에 종사하는 동료, 또는 선후배끼리 상호간 뜨악한 태도를 보이거나, 심할 경우 공연한 설전이나 까칠한 트집으로 분위기 엉망이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과거에는 출입처 동료 선후배가 오히려 사내 동료 선후배가 보다 더 살갑고 돈독한 경우가 많았다.

언론계의 갈등과 반목은 이젠 불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형국이다. 이런 난맥상을 어서 해소하지 않으면 미구에 파국을 맞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우선 망가진 동료애부터 치유하자. 서로 손을 내밀자. 비록 대척 관계에 있더라도 우리끼리 만날 땐 철저히 동료가 되자.


자고새면 들리느니 우울하고 참담한 소식 일색이다. 작년 이후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미국 발 불황 쓰나미야 그렇다 치고, 들추면 들출수록 고구마 줄기에 고구마 엮여 나오듯 이어지는 강호순의 연쇄살인행각, 여기에 ‘이태백? 삼초땡? 친부남’으로 이어지는 고용관련 냉소적 낱말의 난무에다, 우리사회의 유일한(?) 정신적 기둥의 별세 소식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희망적인 것이 없다.

언론사간의 반목 심해
자연 뉴스를 다루는 ‘쟁이’들의 정서도 음울한 쪽으로 경도되기 마련이다. 하긴 우울한 뉴스를 다루는 것, 그것이 어쩌면 쟁이의 숙명일지 모른다. 자고로 뉴스는 감동적인 것보다 충격적인 것에 쏠리기 마련이고,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쏠리기 마련 아닌가!
 문제는 쟁이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다른 요인이 마치 사신(死神)의 그림자인양 언론계 기저에 편만(遍滿)히 깔려있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아내는 폐해가 너무도 심각한 점이다.
 근자들어 그 폐해는 심각성을 넘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바로 언론계 전반에 불고 있는 갈등과 반목의 어두운 그림자 말이다.
 공영방송과 이른바 ‘조중동’, 조중동과 이른바 ‘한경서’ 간에 벌어지는 날선 공방, 아니 거의 죽기 살기 식 쟁투. 그건 어느 면 각 조직의 사활이 걸린, 그래서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을 친 세력 간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활극이다.
 이 소모적 싸움질은 좀 더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건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집단 난투극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권이 제기한 ‘미디어관련법’이라나, ‘언론장악 7대 악법’이라나 하는 담론이 가뜩이나 삭막해진 언론계를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고담 시티(Gotham City)처럼 우울한 암회색으로 채색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구도다. 그도 그럴 것이, 한편에선 ‘미디어관련법 손질’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나 고뇌에 찬 연구 없이 ‘글로벌’ ‘고용창출’을 내세우며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려는 데 반해, 한편에선 “언론장악 7대 악법 관철시키려면 우리를 밟고 넘어가라”는 식으로 막무가내 대거리다.
 결코 양비론적 접근이 아니다. 같은 담론을 다루는 몇 건의 세미나(또는 토론회)에 참석하면서 겪은 체험적 고백이다.

‘쟁이’ 간 갈등이 더 문제
그런 구도에서 더 안타까운 것은 역시 쟁이들 간의 갈등심화다. 대척(對蹠)에 있는 매체 소속 쟁이 사이가 점점 소원해지는가 했더니, 이젠 불구대천의 원수 직전까지 다다랐다.
 소 닭 보듯 했으면 차라리 낫겠다. 별 이슈가 없는데도 대척 매체에 종사하는 동료, 또는 선후배끼리 상호간 뜨악한 태도를 보이거나, 심할 경우 공연한 설전이나 까칠한 트집으로 분위기 엉망이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 현장을 뒹구는 후배들의 전언이다. 심지어 언론계 모임에서도 유사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을 나 자신 수시로 목도하고 있다.
 일선 쟁이 시절을 되돌아보겠다. 예나 지금이나 출입처에서 첨예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지만, 그래도 그땐 쟁이들 간에 끈끈한 동료애가 넘쳤다. 정권의, 자본의, 경영진의 유무형 간섭과 압박이 여일했지만, 우리는 엽엽(曄曄)했다.
 특종과 낙종 사이의 간극이 버스표 한 장 차이임을 절감하면서, 관심 가는 인물과의 단독인터뷰나 이른바 ‘모찌(持ち)’를 위해 숨바꼭질과 연막전술을 칠지언정, 일단 일과가 끝나면 출입처 동료 선후배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다. 출입처 동료 선후배가 오히려 사내 동료 선후배가 보다 더 살갑고 돈독한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 지금까지 만나는 예전 같은 출입처 선 후배가 몇 있다.
 그 시절엔 그만큼 타사 기자와의 스킨십이 잦고 또 깊었다. 심지어 출입처 기자 간 과도한 동료애가 잘못된 카르텔로 발전해 촌지 수수, 이권 압박 등의 불미스런 사태를 파생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앞서 지적처럼 요샌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 전사를 자처하는 맹종적 부류까지 있을 정도다.



“주문 왔을 뿐이고~ 조졌을 뿐이고~”
작년 말 한 신문의 오피니언 면을 보다가 그야말로 충격 먹었다. ‘특정 방송을 작살내는’ 칼럼 위에 내밀고 있는 얼굴 사진을 보고서 말이다. 젊은 시절의 지근(至近)에서 그를 지켜본 바, 나름 성실하고 실력 있는 후배로 평가했던 터라 충격은 더했다. 같이 근무하는 그의 연배들이 웅얼거렸다. "현업에 있을 때 이미 알아봤다고, 어쩌구 저쩌구.”
 난 동의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집필) 차례가 왔을 뿐이고, (위에서)주문이 왔을 뿐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썼을 뿐이고’가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 또한 거대한 패싸움의 희생양 아니었을까. 난~,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극히 일부, 오너 자제가 경영수업 차원에서 기자직이나 관리직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쟁이는 종업원(또는 노동자)이다.
 그 뻔한 얘기를 왜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사실(fact)이다. 그리고 우리가 매체 간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서 총알받이 역할을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결정적 단초이기도 하다.

조직만큼 동료애도 소중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 충성하는 것은 물론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소속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고유 업무 외에 가욋일을 할 경우도 더러 있다. 심지어 기업체 지인에게 광고나 협찬을 의뢰하거나 호의적인 보도를 해줌으로써 확인사살을 하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 없는 패륜적 행태로 질타당할 행위까지 시도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조직을 위해 분골쇄신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젠 대리전 전사(戰士)에 총알받이라니?
 까놓고 말하자. 종업원인 우리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가 누군가. 또 우리가 보듬어야 할 대상이 누군가. 바로 동료 쟁이들 아닌가! 그러니 제발 더 이상 그러지 말자. 조직이 추구하는 방향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 그게 언론의 본령에, 사회 공익에 부합하기나 하는 건지, 심각한 고민이나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조직에 대한 맹종자나 특정세력을 위한 부역꾼으로 전락한다면, 마피아나 조폭의 똘마니와 다를 게 뭐 있나? 조직에 반기를 들라는 게 아니다. 잘못된 풍토를 개선하고 화기애애한 미풍양속을 되찾자는 거다.
 돌아보면, DJ 정권 시절부터 서서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언론계의 갈등과 반목은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 첨예화되면서 중증으로 악화되더니 이젠 불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형국이다. 대명천지 21세기에 말이다.
 이런 난맥상을 어서 해소하지 않으면 미구에 파국을 맞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거의 고민없이 사회의 갖은 병리현상을 질타하는 저널리스트의 성정(性情)임에랴. 사회가 기사나 칼럼을 통해 설파하는 꾸짖음이나 처방대로 개선될 것이라 믿는 어리석은 저널리스트의 성정임에랴. 더욱이 자신의 중병도 치료하지 못하면서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선 의사의 자기모순과 일맥상통하는 저널리스트의 성정임에랴.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만 더 하자. 다른 집단은 오래 전부터 기금이다 연금이다 해서 잇속 챙기기로 실속 차리고 있는데 쟁이들 당신은 그런 거 신경이나 쓰나?
 폐일언하고, 우선 망가진 동료애부터 치유하자. 서로 손을 내밀자. 비록 대척 관계에 있더라도 우리끼리 만날 땐 철저히 동료가 되자. 70~80년대 식 카르텔로 약간 회귀하면 또 어떤가. 이젠 촌지 관행도 없어지고, 이권 압박도 불가능한 풍토 아닌가.

언론단체 나서서 치유 프로그램을
개별 언론사가 나서리라 기다리는 건 삶은 콩에 싹 나기를 기다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다른 방도를 찾자. 그렇다. 언론단체가 나서서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자. 이 잡지의 발행처인 한국언론재단이 앞장서서 해주면 더욱 좋고.
 우선 출입처 단위로 호프데이를 만들거나 세미나를 열어주자. 호프데이, 또는 말랑말랑한 주제의 세미나 뒤풀이로 피처 한 잔 부닥치며 쌓인 앙금 거둬내고, 피처 두 잔 부닥치며 금간 우애 봉합하고….
 어느 주말 1박 2일로 나들이를 가는 건 어떨까. 출입처는 어떻게 하라고? 2진이나 다른 출입처 기자에게 ‘가케모찌(掛持)’ 좀 시키면 안되나? 하루쯤 비운다고 경천동지할 게 뭐 있나? 그보단 덧나서 진물이 심해진 상처의 치유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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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멋진백작 2009.04.02 0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슨 소리요? 경쟁하지 말고
    기자들끼리 모여 짝짜쿵이라도 하라고?
    참 웃기는 제언이군요...

    지금 기자들이 싸움이라도 하나요?
    참 나 원... :(

    국민일보 농설이군...
    논설위원씩이나 하는 자의 수준하고는
    딱 폭탄주 스탈이구만. 쩝.

  2. 어린뿔1 2009.04.02 0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작님 의견 감사합니다.

    제언 형태로 투고를 받아 실은 원고입니다. 백작님 말씀대로 기자들이 자나치게(?) 단합해서 '짝짜꿍'을 한다면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과거나 혹은 현재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요.

    하지만 동전도 양면이 있듯, 너무 흩어지다보니까 오히려 소속 언론사 입장과 논리에 빠지게 되어 기자의 사명이나 저널리즘적 본질까지 희미해지게 된 현상황을 비판하는 투고로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원고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현장에서는 소속사의 정파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기자들끼리 반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언론이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한다면, 우선 기자들부터 그들 사이의 갈등을 조절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안 되는데 사회의 갈등을 조절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필자는 그점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초점을 제대로 편집하지 못해서 독자들에게 오해를 드리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백작님 블로그도 종종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