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발견된 한성주보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학


한성주보는 1886년 2월 25일 첫 호가 발행되어 1888년 7월 14일경에 발행이 중단된 신문이다. 그보다 먼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1883. 10. 31~1884. 10. 9)가 폐간된 뒤에 복간 형식으로 발행된 신문이 한성주보였다. 순보와 주보는 제호가 다르기 때문에 별개의 신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같은 신문이 제호를 바꾸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한성순보는 열흘에 한 번 발행하였기 때문에 ‘순보(旬報)’지만, 한성주보는 일주일 단위로 발행 간격이 빨라졌으므로 발행 주기(週期)를 제호에 반영하여 ‘주보’로 바꾸었던 것이다.

순보와 주보는 같은 신문

순보와 주보는 정부가 신문 발행을 위해 설립한 박문국에서 발행되었다는 공통점이 있고, 발행 목적도 같았다. 별개의 새로운 신문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성순보와 주보는 1983년에 관훈클럽에서 한문 기사 전문을 번역하고 여러 곳에 소장된 지면을 영인하여 발간한 바 있다.

순보•주보는 한말 개화사를 비롯한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주보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고 지면이 불완전하게 보존된 상태이기 때문에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남아 있는 모든 지면을 하나로 묶어 학계와 언론계에 제공하자는 것이 영인본 발간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이와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적으로 훼손될 우려가 큰 귀중 자료를 복각(復刻)하여 영구히 보존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도 있었다. 영인 작업은 필자가 담당하였다. 국내의 공공 도서관, 대학도서관, 개인 소장본 등을 가능한 대로 모두 수소문하고 협조를 얻어 순보 창간 100주년이었던 1983년에 영인본을 발행하였던 것이다.

한성순보는 전체 지면이 순 한문이었고, 주보는 한글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주보의 한글 사용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영인본을 발간하기 전까지 순보는 한문 전용, 주보는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발행된 지면을 순차적으로 정리해 본 결과 주보를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단순히 말하는 것은 잘못이었음이 밝혀졌다. 주보 기사는 3종류로 되어 있었다. ①한자 전용 ②국한문 혼용 ③한글 전용 기사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주보에 한글 기사를 넣었던 것은 물론 더 많은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작상의 이유도 있었다. 국한문 혼용, 한글 전용 기사는 모두 국내 기사가 아니라 외국 소식을 번역한 기사였다. 외국 소식을 전하는 번역 기사는 한문보다는 국한문 혼용이나 한글 전용 기사로 작성하는 것이 편리하고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생소한 외국 지명과 인명, 서양의 역사, 복잡한 과학 기사 등은 한글 기사로 작성하는 편이 손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독자들은 한글 기사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대중들이 신문을 부담 없는 가격으로 구독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소수 지식층에 편중된 구독자들은 한문 기사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고, 사회적인 공용 문자로 통용되지 않았던 한글 기사를 오히려 불편하게 여겼던 것 같다. 구독자들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했던 상류층 또는 지식층이었다. 초기에는 비중이 높았던 한글이 날이 갈수록 점차 줄다가 완전히 사라진 이유는 독자들의 불편 때문일 것이다.

주보의 한글 기사를 분류해 보면 제1호와 제2호에는 국한문 혼용 기사가 10건 이상씩 실려서 한글 전용 기사와 합하면 순 한문 기사와 거의 대등한 숫자를 차지한다. 거기에 한글 기사는 대개 분량이 길기 때문에 지면을 차지하는 비율이 한문 기사보다 더 많다. 하지만 제3호 이후에는 국한문 기사가 없고, 순 한문과 한글 전용 기사만 남아 있다가 제22호에서 제28호까지 다시 국한문이 나타난다.

한글 전용 기사는 처음부터 꾸준히 게재되었으나 제24호 이후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제31호와 제32호에서 한 건씩 게재되었고 제47호 이후에는 완전히 한문 기사만으로 제작되었다. 결국 이때까지 한글은 신문 제작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보는 1주일 간격으로 매주 월요일에 발행되었는데, 제2호와 제3호 사이에 1주를 건너뛰어 2주 만에 발행되었고, 제23호와 제24호 사이에는 한 달 넘게 5주를 건너뛰었다.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결호가 생긴 이유는 제2호와 제3호 사이에는 구정 명절이 끼여 있었고, 제23호와 제24호 사이는 한여름이라 콜레라가 유행하여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인본 발행 당시 주보는 국내의 모든 소장본을 모아본 결과 41호가 확인되었다. 발견된 마지막 호는 1888년 3월 12일자 제106호였다. 이로부터 주보가 폐간된 이해 7월 14일까지 빠짐없이 발간되었다면 마지막 지령은 제123호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물이 남아 있지는 않기 때문에 정확한 마지막 호수는 알 길이 없다. 폐간 무렵에는 제대로 발간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제120호까지는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성주보(제61호) 표지와 표지 뒷면

1888년 7월(지령 120호) 폐간

주보가 1888년 7월 14일까지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1888년 7월 14일 내무부(內務府)가 박문국을 철폐한다는 뜻을 왕에게 아뢰었다는 기록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왕에게 아뢰기를 “박문국을 설치한 지 몇 해가 되었는데 빚을 갚기 위하여 외읍(外邑)에서 ‘주보 구독료를’ 징수하는 것은 사세(事勢)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지만, 폐단을 끼칠 뿐만 아니라 실효도 없으니 박문국을 교섭아문(交涉衙門)에 넘겨 교섭아문으로 하여금 적당히 일을 처리하게 하고 주사(主事) 가운데서 이조(吏曹)에서 벼슬에 임명한 사람은 이조에서 처리하게 하고, 박문국이 임명한 사람은 임시로 사과(司果•현직에 종사하지 않은 문관)에 붙여 두었다가 차차 6품 벼슬로 옮겨 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허락하였다는 것이다(『고종실록』, 음력 1888. 6. 6, 양력은 7월 14일).

박문국 설립 후에 순보와 주보의 구독료를 지방 관서에서 징수하여 서울의 경주인을 통해 납부하였는데, 이로 인한 폐단도 크며 실효도 없으므로 아예 박문국을 폐지하자고 아뢰자 왕도 허락했다는 것이다. 박문국이 임명했던 주보 제작 인원은 보직 없는 관리로 남겨 두었다가 6품 벼슬로 임명하도록 할 예정이라는 내용이다.

이리하여 박문국이 폐지되었으니 주보도 자연히 더 이상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주보의 폐간을 1888년 7월로 보는 이유다. 어쩌면 그 이전 어느 기간부터 주보 발행이 이미 중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박문국이 폐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983년에 영인본을 만들면서 조사해 보니 남아 있는 주보의 마지막 지령은 이해창 교수가 소장했던 제106호였다. 그러나 제106호는 기사는 없고 표지만 남아 있었는데, 표지 뒷면에 기재된 발행 일자는 1888년 3월 12일이었다. 이때부터 매주 한 호씩 빠뜨리지 않고 발행되었다면 7월 14일 무렵에는 제123호까지 나왔다는 계산이 된다.


 

남아 있는 마지막 지령은 제106호

발행일은 월요일이었는데 7월 9일이 월요일이었고, 이날까지 결호가 없었다면 지령은 제123호가 된다. 어쨌건 남아 있던 마지막 지면은 제106호이고, 그것도 본문 없는 표지만 남아 있다.
한성순보와 주보는 중요성에 비해 연구 자료로 널리 보급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영인본 출간 이후 20년의 세월이 흐르자 영인본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이 되었다. 새로운 연구자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영인본을 인쇄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쇄된 영인본보다는 데이터베이스로 컴퓨터를 활용하는 방법이 더 시대적인 추세에 맞는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컴퓨터의 보급으로 간편한 검색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순보•주보의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이 이루어져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데이터베이스 사업을 맡은 동방미디어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다양한 자료의 데이터베이스를 제작한 실적이 있었고, 독창적인 노하우를 지닌 회사였다. 영인된 순보•주보의 지면 1,642 페이지를 스캔하여 이미지로 담고, 2,817건(한성순보 1,557건, 한성주보 1,260건)의 기사 전체를 입력하여 계층별로 분류했으며, 중층 구조로 구성하여 검색이 가능하도록 제작하였다. 1883년 창간, 100년 후 영인본 출간,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3년의 데이터베이스화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세 번째로 변신한 것이다. 

이제 순보와 주보의 영인본을 만든 때로부터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영인본에 싣지 못했던 9호가 새로 나타났다. 자료의 소장자는 아단문고(5호), 박정규 교수(3호), 중국 상하이 푸단대학(1호)이다. 주보의 지면이 불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현실에서 그동안 존재를 몰랐던 지면이 새로 나타났으니 지면을 널리 공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다. 영인본을 처음 기획하고 작업을 진행했던 사람이 나였으니 영인본 만들 때 빠졌던 지면을 추가하는 영인본 보유편(補遺編) 작업도 내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새로 확인된 지면은 숨어 있는 상태로 빛을 보지 못하는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나는 관훈클럽에 이 사실을 알리고, 새로 나온 지면을 추가로 영인하자고 건의했다.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회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사업 진행을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영인본 보유편 제작이 진행되었고, 번역이 끝나는 대로 출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주보의 지면 9호는 어떻게 새로 발견되었나. 아단문고(雅丹文庫)에 소장된 주보 5호는 백순재(1927~1979. 7. 9) 선생이 수집한 것이다. 백순재 선생은 잡지 연구가이자 수집가였다. 백 선생이 한성주보를 수집한 일화는 이광린 교수의 논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에 대한 일 고찰’(한국 개화사 연구, 일조각, 1974, 88쪽)에 기록되어 있다. 백 선생은 1970년 5월 어느 날 동대문 근처 골동품상에서 병풍에 배접되어 있는 한성주보 제103호와 제104호를 발견했다. 103호는 1888년 2월 20일, 104호는 2월 27일에 발행되었다는 것이었다.

병풍에 배접된 헌 신문지는 작품 안쪽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병풍을 새로 수리하지 않는 한 다시 햇빛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숨어 있었다. 더구나 병풍을 수리할 때에는 앞쪽의 작품은 조심스레 다루지만 배접된 종이는 뜯어서 폐지로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하찮은 쓰레기로 사라져 버렸을 신문을 건져 내었으니 언론사의 가려진 역사적 사실을 규명할 단서를 찾아준 사건이었다. 없어질 운명에 처한 개화사의 소중한 자료가 백순재 선생의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인해 다시 살아난 것이다.

1983년에 영인본 발간을 준비하면서 나는 소장된 주보가 있다면 모두 찾아다녔는데 고인이 된 백순재 선생 자료를 수록할 생각으로 유족에게도 연락해 보았다. 선생 댁은 외국어대 맞은편 골목에 있는 한옥이었다. 우선 전화로 부인에게 주보가 있는지를 물어보았으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찾을 방법도 없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상자 속에 넣어 둔 많은 자료들은 본인만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유족들은 그 내용을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선생이 생전에 수집했던 그 많은 자료를 정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선생이 수집했던 자료는 모두 한화그룹이 운영하는 아단문고에 양도되었다. 아단문고에서 최종적으로 정리한 백순재 선생의 장서 목록을 보면 잡지 1,544종 1만 1,095책, 단행본이 4,744책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우리나라 최대의 잡지 수집가로서 유실될 운명의 잡지를 전문적인 안목으로 수집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서지(書誌)와 잡지 연구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백 선생이 소장했던 주보는 아단문고에 잠자고 있었는데, 지난해 12월에 아단문고의 박천홍 실장이 내게 주보의 소장 사실을 알려주면서 이를 적절한 방법으로 사회에 공개하여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도 좋다는 뜻을 밝혔다.

한성주보 뒤 표지. 주보의 발행소는 교동의 박문국

병풍 그림 뒤에 숨어 있던 지면

백순재 선생 수집 주보 지면이 영인본이 발간된 지 27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난 것이다. 찾아가서 확인해 보니 완전히 보존된 지면이 3호였고, 호수를 알 수 없는 지면이 상당수 있었다. 보존된 완전한 지면은 다음과 같다.

제13호(1886. 4. 26) 표지
제14호(1886. 5.3) 표지
13호와 14호는 표지와 낱장 지면 20페이지만 남음.
제49호(1887. 2. 17)
제62호(1887. 5. 2)
제64호(1887. 5. 23)

순보와 주보의 형태는 한 호 20페이지를 책자 형태로 묶었는데 표지 뒷면에는 기사가 없고 발행 날짜가 적혀 있다. 표지 뒷면에 적힌 날짜 말고는 본문 각 페이지에는 발행 날짜가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묶어진 한 호를 풀어 흩트리면 본문이 어느 날 발행된 지면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제13호, 제14호의 표지와 함께 남아 있는 본문 낱장이 어느 호수에 포함되었던 것인지 고증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낱장 가운데는 이전에 영인된 지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에 발행된 영인본과 모두 대조하여 이전 영인본에 들어 있는 지면을 제외하고 보니 낱장 지면 20쪽이 남았다. 한 호 분량 기사 16쪽 외에 4쪽이 더 남은 것이다. 주보 한 호 20쪽 가운데 기사가 들어가는 지면은 16쪽인데(앞표지 2쪽, 뒤표지 2쪽은 기사가 없음) 검토해 본 결과 낱장 20쪽은 13호와 14호의 내용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낱장 지면은 13호, 14호의 표지와 함께 병풍 속에 배접되어 있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 묶어진 주보를 풀어서 표지와 함께 병풍 배접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광린 교수는 백순재 선생이 병풍에서 뜯어낸 한성주보는 103호(1888. 2. 20)와 104호(1888. 2. 27)였다고 논문에 썼다. 그러나 아단문고에는 그 호수가 없다. 그 대신 제13호와 14호 표지가 남아 있다. 어쩌면 제13호와 14호를 103호와 104호로 잘못 기억했다가 논문에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둘째, 낱장 지면은 한글 전용 또는 국한문 기사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32호 이전의 것이 확실하다. 제32호 이후에 발행된 지면은 몇 달치가 빠지고 제47호(1887.1.24)가 남아 있는데 그 이후에는 한글 기사를 완전히 배제한 지면이 제작되었다. 기간으로는 1886년 10월 11일 이후 1887년 1월 사이에 한글 기사를 배제한 지면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글은 더 이상 주보에 사용되지 않았다. 낱장으로 남은 지면에는 한글이 사용되었으므로 13호와 14호의 지면일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무역론’(4)이라는 기사도 13호와 14호의 지면일 것이라는 근거가 된다. 주보 첫 호인 1886년 1월 25일자「사의(私議)」란에 실린 ‘논학정(論學政)’은 2월 22일까지 3회 연속 기사였다. 뒤이어 실린 ‘논화폐(論貨幣)’(2. 22~3. 1)는 2회까지 남아 있다. 제7호에서 15호까지 9호가 빠진 상태이므로 그 사이에 ‘무역론’이 게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시리즈로 연속되는 「사의」는 그 이후에는 없다. ‘논학정(論學政)’ 제4회는 이런 이유로 13호나 14호에 실렸을 개연성이 높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백순재 선생이 수집하여 현재 아단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낱장 지면은 13호 또는 14호의 지면으로 본 것이다.

박정규 교수가 주보 3호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2010년 12월에 우연히 알았다. 12월 10일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가 개최한 연구모임에서 만난 박 교수로부터 자신이 한성주보 2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무심결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아단문고의 주보 소장 사실을 알고 나서 확인해 보았더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제100호(1888. 1. 30)와 101호(1888. 2. 6)를 박 교수가 소장하고 있었다. 제50호 표지도 있었는데 기사는 아주 불완전하게 2쪽이 남아 있었다.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지만 부족한 대로 제50호를 영인에 포함시켰다. 중국 푸단대학(復旦大學) 도서관은 주보 제16호를 소장하고 있다. 어떤 경로로 한 호의 지면이 중국에 건너갔는지 알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나의 책 ‘고쳐 쓴 언론유사’(커뮤니케이션북스, 2004)에 상세히 기술하였다.

1983년에 한성주보를 영인할 때에는 국내의 모든 소장처와 개인의 협조를 얻어 모두 41호를 묶은 후로, 28년 만에 제2차로 보유편을 영인하면서 9호를 더하게 되어 한성주보의 지면 50호가 영인된 것이다.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전기 완성기념 전람회 목록에는 한성순보 2호(8호, 9호)와 주보 4호(1, 2, 3, 4호)가 들어 있었다.

전시회는 후쿠자와가 설립한 게이오의숙(慶應義塾•현 慶應大學) 도서관이 개최하였는데 순보와 주보는 모두 후쿠자와의 제자로 박문국에서 순보•주보 발간을 도왔던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출품한 것이었다. 그가 출품한 순보•주보의 지면은 영인본에 들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원본이 일본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또 새로운 주보가 나타나서 당시의 120호(또는 123호) 지면을 모두 복원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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