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신문상 수상작 중앙일보 ‘사라진 조선 국보 일본 왕실에 있다’

김현기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기자 생활 18년이 됐지만 늘 느끼는 것은 ‘쉬운 취재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과는 다른 취재환경 속에서 기자 생활을 해야 하는 특파원의 경우는 더 하다. 일단 언어 소통이 한국 같지 않다. 그보다 더한 건 취재 환경이다. 어딜 가나 제약이 많다. 사전에 취재 허가를 얻어야 하는 건 필수고, 그나마 승낙받으면 운이 좋은 경우다. “한국 같았으면 당장에…”란 말이 늘 튀어나온다. 그러나 어떡하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사고의 회로를 일본에 가능한 한 맞추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은 걸. 사고의 튜닝이 필요하다.


‘잡담’에서 시작된 기사

하지만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공통된 진리는 있는 법. 바로 ‘사소한 곳에서, 일상 속에서 특종은 비롯된다’는 것. 또 하나, ‘아주 가끔 필요에 따라선 저돌적 취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기사의 출발점도 ‘잡담’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1월 중순 토요일 오전으로 기억한다. 국제행사 참석차 일본에 온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수행원 몇 명과 호텔 로비에서 차를 함께 했다. 잡담의 화제는 “올해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인데 어떻게 하면 원만하게 넘어갈까”였다. ‘천왕의 방한’부터 시작해 ‘무라야마 담화 2’ 등 온갖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총동원됐다. 그러던 중 누군가 “미래의 상징인 ‘왕세자’가 과거의 상징인 ‘조선왕실의궤’를 갖고 한국을 찾게 하는 건 어떨까”라고 했다. “푸하, 꿈같은 이야기구먼”이라며 다들 웃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때 내 머리를 ‘띵’하고 스쳐가는 게 있었다. “뭔가 조선왕실의궤 관련해서 움직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었다. 잡담이 끝나고 ‘왕세자-조선왕실의궤’ 이야기를 했던 당국자를 그의 방으로 따로 끌고 갔다. 그리고 유도신문을 시작했다. 그랬더니 “실은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놓고 당국자들끼리 좀 이야기가 오고 가는데 쉽지가 않네”라는 것이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입사 후 ‘문화부’ 문턱에도 가지 못한 난 그때까지 조선왕실의궤가 구체적으로 뭔지, 그리고 그게 일본 왕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당장 집에 돌아와 자료를 검색해 봤다. 대충 의궤가 뭔지 알게 됐다. 이미 2006년과 2009년에 김원웅 전 국회의원과 ‘문화재환수운동위원회’의 혜문 스님이란 분이 한 차례씩 일본 궁내청 서릉부를 찾았다는 기록도 나왔다. “아, 일본 궁내청이라고 해서 100% 못 들어가는 건 아닌 모양이네.”


중앙일보 2010년 3월 24일자 1・4・5・6면.

일본 궁내청에 진입 성공

무한한 호기심이 일었다. 일단 우리 문화재가 일본 왕실 도서관에 어떤 모습으로 소장돼 있는지를 확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늘 말로만 문화재 반환을 외쳤지 정작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보도해야 하는 언론의 임무를 외면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도 있었다. 검색을 해 보니 궁내청 서릉부로 흘러들어온 우리 사료의 리스트는 두루뭉술하게 파악은 돼 있었지만 그 실체는 언론을 통해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어떻게 열람 신청을 할 수 있는지 일본 궁내청의 홈페이지와 자료들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취재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부닥쳤다. “일본 학자들도 절차가 까다로워 두 손 두 발 다 들고 좀처럼 접근을 안 하고, 못하는 곳”(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이라 하더니 정말 그랬다.

서릉부 관계자에게 전화를 해 “열람 신청을 하고 싶다”고 하니 돌아온 답은 “열람을 원하는 자료의 정확한 명칭, 분류번호를 열람 희망일 최소 2주 전까지 해당 기관장의 승인을 얻어 문서로 제출하라. 그러면 궁내청의 ‘내부 심사’를 통해 ‘열람허가증’을 발급할지를 결정할 것”이란 답이었다. 하지만 나로선 분류번호 같은 걸 알 도리가 없었다. 첫 번째 벽이었다. 그만둘 것인가. 하지만 오기가 발동했다.

한국 내 도서 전문가들을 수소문했다. 대부분은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퍼즐 맞추기를 해 갔다. 퍼즐은 1주일 만에 풀렸다. 일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장례 기록을 담은 사료의 명칭은 ‘국장도감의궤’. 분류번호는 ‘305-87’. ‘경연’(經筵)에 쓰인 역사서 ‘통전’(通典)의 분류번호는 ‘400-1’. 이런 식이었다. 일단 아는 것만 써내기로 했다.

열람 신청서를 제출한 지 열흘가량이 지나 궁내청 서릉부로부터 ‘열람을 허가한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열람실에서 사진 촬영은 물론 복사도 금지되며 연필 한 자루 외의 모든 필기도구는 지참을 금지한다는 단서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쾌재를 불렀다. 일단 진입작전은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열람이 허가된 날짜까지 이틀. 온갖 작전을 구상했다. “몰래 소형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찍을까”, “서릉부 관계자에게 슬쩍 이야기를 걸어 인터뷰로 소개해 볼까” 등등 여러 복잡한 생각에 잠을 설쳤다.

열람일 당일. 궁내청 북문에서 출입허가증을 발부받은 뒤 걸어서 왼편으로 2~3분 들어가니 4층짜리 서릉부 건물이 나타났다.

1층 왼쪽 끝 방이 열람실이었다. 일단 복도에 있는 사물함에 모든 소지품을 맡겨야 했다. 휴대전화나 카메라, 그리고 볼펜•샤프•지우개도 금지였다. 신발도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했다.

카메라를 몰래 호주머니에 넣어 갈까 순간 망설였지만 ‘우리 조선왕실의 도서를 주인인 한국 사람이 와서 보려 하는데 법을 어기고 카메라로 몰래 찍는다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소지품을 맡기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고 바로 입장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열람 자료를 넘기는 손이 깨끗해야 한다며 복도 끝 화장실에서 한 번, 그리고 열람실 입구 안에서 또 한 번 손에 소독약으로 세척을 받아야 했다.

열람실에 들어가니 내부에는 4인용 테이블이 4개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다 앉아 봐야 총 16명. 서릉부 직원 4명가량이 열람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면서 서가와 열람실을 오가고 있었다. 열람실 직원은 열람 허가증과 열람희망 도서 리스트를 전달하자 기다렸다는 듯 옆에 준비해 놓았던 열람 자료를 건네줬다. 자리를 잡고 포개진 순서대로 도서들을 펼쳤다.

“이럴 수가….” 제일 위에 놓였던 도서를 본 순간 갑자기 숨이 꽉 막혔다. 조선시대 왕세자 책봉 시의 행사가 어떻게 치러졌는가를 기술한 ‘왕세자책례도감의궤’. 이 의궤는 고동색 표지가 거의 다 찢겨 나가고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훼손 상태가 너무 심했다.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서릉부의 한 직원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책장을 넘길 때 조심하세요”라고 신신당부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망설여졌다. 자칫하다 종이가 찢겨 나가거나 바스러질 것만 같아 차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채 일본의 왕실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는 조선의 사료를 보게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

조선의 의학과 관습, 군의 역사 등을 소개한 귀중한 유형문화재인 ‘제실도서’(帝室圖書)도 눈에 띄었다. 제실도서의 대표적 도서인 12권짜리 ‘주역전의구결’(周易傳義口訣)을 폈다. 책을 펴는 순간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주역의 본문에 1466년 세조가 한글로 구결을 달아 놓은 책이었다. 궁내청 왕실도서관에서 한글로 돼 있는 자료를 보게 되다니 억장이 무너졌다.


왕세자책례도감의궤 : 조선시대 왕세자 책봉 시의 행사가 어떻게 치러졌는가를 기술한 도서(왼쪽)와 명성왕후의 국장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일본 직원에 ‘대리촬영’ 신청

거의 얼이 나간 채 4시간 동안 열심히 자료의 내용과 특징을 취재수첩에 연필로 쏜살같이 써 내려갔다.

취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열람을 마치고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직원에게 다가가 “내가 한국에서 온 사람인데, 너무나 감격했다. 꼭 복사본을 얻고 싶다”고 졸랐다. 곰곰이 내 얼굴을 쳐다보던 직원은 “복사는 불가능하다. 대신 ‘대리촬영 신청’을 서면으로 하면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내 신청이 궁내청에서 허가될 경우 궁내청 전속 외부 촬영 기관에 해당 페이지의 촬영을 의뢰하고, 그 촬영 필름 사본을 신청인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대리촬영 신청이 허가될 가능성, 소요 기간은 ‘예상할 수 없다’는 답뿐이었다. 현상 비용도 컬러 사진 12장이 1만 2,600엔(약 16만 원)이나 됐다. 일일이 도서 이름과 촬영하고 싶은 페이지 수를 적어야 하고 시간이나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칼을 뽑은 이상 그냥 거둘 순 없었다. “이제 정말 열람실 문을 닫아야 한다”고 독촉하는 직원을 세 차례나 달래 가며 신청서를 제출한 건 열람실 문 닫는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겨서였다. 때로는 프로토콜에 구애받지 않는 저돌성이 필요함을 새삼 깨달았다.

이후 사진은 몇 차례의 신경전 끝에 신청 3주 후에 도착했다. 하나 마지막 관문이 또 있었다. 신문에 게재하기 위한 ‘출판 및 게재 신청서’를 제출해 궁내청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모든 것이 우편으로 오가야 했다. “전화나 메일로 하면 될 걸”이라고 몇 번이나 항의도 했지만 “싫으면 그만두라”는 말에 꼬리를 내렸다. 이 작업에 또 열흘 정도 걸렸다. 끈기와 오기를 시험하는 두 달이었다.

이 기사는 중앙일보 1면 톱은 물론 4•5•6면의 전면에 배치됐다. 한 선배는 “중앙일보 다닌 이래 한 기사가 이렇게 많은 지면을 차지한 것은 처음 봤다”며 놀라워할 만큼 기사의 파장도 엄청났다. 외교부는 물론 여야 정치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이 문제에 달려들었다.

일본왕실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의 외부 사진.

간 총리 담화’에
조선왕실 도서반환 넣도록 설득

이제야 밝히는 에피소드지만 간 나오토 총리 등 일본 정부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8월 10일에 발표한 ‘간 담화’에 ‘조선왕실 도서반환’을 포함시킬 생각이 당초에는 없었다. 주일 한국대사관도 막판에는 손을 놓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다. 기자가 할 일은 아닐지 모르나 ‘결자해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화 발표 1주일 전 집권당인 일본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에게 SOS를 쳤다. 조선왕실 도서가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고, 그것이 ‘간 담화’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절박함을 한 시간에 걸쳐 호소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중진 의원은 나름 내 주장에 감화돼 바로 간 총리와 센고쿠 요시토 관방장관에게 반환 필요성을 설득했다고 한다. 물론 도서반환 협정까지 이어지게 된 것은 물밑에서 여러 사람이 애쓴 노력의 결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뿌듯한 건 기사의 첫 기획 단계부터 기사가 나간 후 기사의 지향점이기도 했던 도서반환까지 운 좋게 일궈 냈다는 점이다.

한국신문상까지 수상하니 남들은 나보고 “엄청난 특종을 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솔직한 이야기,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접근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굳이 스스로에게 후한 평가를 내린다면 귀찮아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지금 참으면 나중에 웃겠지” 하고 견디면서 한발 한발 다가간 것, 평범하지만 그거 하나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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