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신문의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보도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학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30분. 25세 청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紅口) 공원에서 던진 폭탄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천황의 생일 천장절(天長節)에 중국군과의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장에서 감행된 거사였다.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는 즉사했고,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 상하이 파견 일본군사령관)는 수일 후에 죽었으며,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重光癸),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등 요인들이 중상을 입었다.


세계에 충격 준 홍커우 공원의 거사

사용된 폭탄은 그 유명한 ‘물병 폭탄’이었고, 자결용으로 준비했던 ‘도시락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일•중 양국의 정전협정 체결을 위해 제네바에서 영국•미국•프랑스•이탈리아 대표가 회동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이 사건이 회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제적인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1931년 9월의 만주사변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항일운동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1932년 1월 29일 상하이 조계(租界)를 경비하던 일본 해군육전대(海軍陸戰隊)와 중국 제19로군(路軍)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은 2월 중순 육군 3개 사단을 파병하여 상하이 부근에서 중국군을 퇴각시켰다.

이 같은 군사 대치 상황에서 당사국인 일•중 두 나라와 상하이에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들이 벌인 정전협상이 거의 타결되어 이날 조인을 예정하고 있던 날에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가 감행된 것이다. 폭탄을 맞은 일본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은 현장에서 죽지는 않았으나 중상을 입어 며칠 후 사망하였다. 협상의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5월 5일 정전협정은 성립되었다. 주중 일본대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년 7월 29일~1957년 1월 26일)는 한쪽 다리를 다쳐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중인 1943년 외상이 된 후, 1944년 대동아장관을 겸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전권 대사로 미국군에 대한 항복 문서에 조인했고, 1946년 A급 전범으로 도쿄전범재판에서 금고 7년형을 받았다. 1950년 가석방 된 후에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면 이 사건을 당시 신문은 어떻게 보도했는가. 내년이면 의거 80주년이다. 79년 전의 신문 보도를 찾아보기로 한다. 중국과 일본의 신문 보도에 관해서는 기존의 연구 논문이 있다. <윤봉길과 한국독립운동(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매헌연구원, 2010)>에 실린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한시준)’와 ‘윤봉길의 상해의거에 대한 일본언론의 보도(김상기)’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영국과 미국 신문의 보도와 현장에서 일본 신문 특파원이 촬영한 사진을 어떤 경로로 일본으로 긴급 수송했으며, 그 사진이 우리나라 신문에 실린 경위를 추적하기로 한다.

도쿄 아사히신문 특파원 사토우가 촬영한 윤봉길 의사 연행 장면. 동아일보 1932년 5월 4일자에도 실렸고, 그 후로 윤 의사 의거 후 연행되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졌다.



영국 총영사와 뉴욕타임스의 보도

사건이 터지자 상하이 주재 영국 총영사관은 본국 외무성과 제네바 주재 영사에게 긴급 전문을 보냈다. 식장에는 상하이 주재 영국 무관이 참석했다. 총영사는 정전협상이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식장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관은 가까운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총영사는 간단한 첫 번째 보고에서 폭탄 투척 후에 가해자(윤봉길)는 즉시 군중에게 붙잡혔는데 일본 군인들이 그를 구출해서 데리고 갔다고 썼다.1) 상하이 총영사는 네 차례에 걸쳐 공문을 보냈는데 일본 측 피해상황과 일•중 간의 정전에 미칠 영향을 살펴본 내용이다. 윤 의사에 관해서는 상세한 언급이 더 이상 없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AP통신이 타전한 기사를 4월 29일자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미국은 상하이보다 하루가 늦기 때문에 미국 시간으로 29일이지만 상하이 시간으로는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하루가 지난 시점이다. 폭탄이 터진 후에 많은 군중이 윤 의사를 덮쳤는데, 일본군 장교들이 질서를 잡으면서 조사를 벌이기 위해 범인을 구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범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기사였다.

“After the blast the huge crowd closed in on the man accused of hurling the bomb. Japanese military officers attending the review sought to establish order. They rescued the man accused but it was not known immediately whether he was dead or alive.”2) 

범죄 현장에서 일단 범인을 제압한 다음에는 범인의 신변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안전한 장소로 데리고 가서 신속히 수사를 벌여야 한다. 큰 사건이건 사소한 범죄건 이는 수사상의 상식이다. 흥분한 군중 또는 경찰의 과도한 폭행으로 수사에 응할 수 없는 상황이 되거나 생명을 잃으면 수사에 큰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윤 의사를 체포한 인물은 고우모토(後本武彦)라는 일본군 육전대 호위병 병조(兵曹)였다. 그는 상관인 지휘관 우에마쓰(植松)를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진 후에 달아나려는 순간 잡아서 내동댕이치고 팔을 비틀어 엎어눌러서 제압한 다음에 헌병대에 인도했다는 것이다.3) 우에마쓰의 사진은 오사카마이니치신문 5월 1일자 호외에 실려 있다.

첫날 기사와는 달리 뉴욕타임스의 이튿날 후속 기사는 거사 직후의 윤 의사 모습을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묘사한 기사를 실었다.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후 몰려든 군중이 린치를 가하려 했으나 헌병들이 구출했다. 그는 멍들었고 피를 흘렸지만, 부상당한 장군들이 병원에 실려 가기 전에 응급처치를 받는 동안 도전적(또는 대담하게)으로 싱글거리는 표정이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crowd mobbed and attempted to lynch the Korean, who was rescued by military police. He was bruised and bleeding, but grinning defiantly while the wounded officials received first-aid before being taken to a hospital.”4)


‘더 타임스’와 영국 신문 보도

영국은 중•일 두 나라의 정전을 중재하는 위치였다. 세계적 권위지 ‘더 타임스’는 4월 30일자 12면 머리기사로 사건을 보도했다. 상하이와 영국은 8시간의 시차가 있다. 영국 시간으로는 새벽 3시 30분경에 해당하는데, 이날 상하이 주재 특파원이 보낸 기사를 이튿날 신문에 보도한 것이다. 영국 시간으로는 30일자이지만 시차를 고려할 때에 미국 신문이 보도한 것과 거의 같은 날에 해당한다.

‘더 타임스’는 폭탄 투척으로 천장절을 망쳤다는 리드로 시작했다. 주중공사 시게미쓰,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중장) 등이 연설하기 위해 단상에 도열한 가운데 일본 국가(國歌)가 연주되는 도중이었다. 외국인들 옆에 있던 젊은 청년이 갑자기 연단에 원통형 폭탄을 휙 던졌다. 곧 둔탁한 소리가 들렸지만 별로 주의를 끌 정도가 아니었기에 악대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연단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도열했던 일본의 육해군 고위 장성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때 군인들은 한 젊은 청년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팼다. 그 후에 같은 모양의 또 다른 폭탄이 연단 근처에서 폭발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1만 명의 군대가 식이 시작되기 전에 행진을 마친 후 절반 가까이 인근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즉각적으로 공원을 포위했고, 중국인 노동자들과 한국인, 러시아인과 미국인 각 1명씩을 체포했다가 미국인을 비롯한 몇 명은 곧 풀어 주었다.5) ‘더 타임스’는 상세한 사실 보도 기사와 13면에는 사설(Outrage at Shanghai)까지 실었다. 타임스의 입장은 일본 측이 입은 인명 피해보다는 정전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었다.

‘맨체스터가디언’은 30일자 기사에서 한국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논조를 보였다. 한국은 일본에 여러 세기 동안 반일감정이 있었다. 일본이 경제적•행정적으로 한국을 개선했다지만 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등으로 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짚어 보는 기사였다. 가장 자극적인 편집은 5월 19일자 ‘데일리 미러’였다. 윤 의사가 연행되는 장면과 부상당한 총영사 무라이가 병원으로 가기 위해 업혀 있는 장면 등을 1면에 크게 실은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앞에 열거한 신문 외에도 런던에서 발행되는 여러 신문과 에든버러, 아일랜드 등지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이 4월 30일자에 일제히 사건을 보도했다. 맨체스터가디언(The Manchester Guardian), 데일리미러(The Daily Mirror), 데일리익스프레스(The Daily Express), 스코츠맨(The Scotsman, Edinburgh), 아이리시타임스(The Irish Times, Dublin)가 의거 사실을 보도했다. 주간신문인 옵서버(The Observer, 5월 1일)와 화보 전문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 5월 7일)는 하루 또는 1주일 뒤에 보도했다. 4월 30일 이후에도 이들 신문에 후속 기사가 실렸다. 영 연방 호주에서 발행되는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안(The West Australian, Perth, 5월 25일)에 실린 기사도 찾을 수 있다.

영국 데일리미러 1932년 5월 19일자 1면에 실린 윤봉길 의사 의거 사진들.

경쟁적인 현장 사진 수송 작전

신문의 성격에 따라 1면 머리에서 작은 단신에 이르기까지 기사의 크기에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영국의 주요 신문이 한국인들의 반일 저항운동의 실상을 알린 효과는 컸다. 미국에서는 앞서 살펴본 ‘뉴욕타임스’와 시사주간지 ‘타임’이 5월 9일자에 기사를 실었다. 그밖에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여러 신문이 이 사실을 보도했을 것이다. 독일, 프랑스와 같은 유럽 여러 나라 신문도 틀림없이 이를 기사화했을 것이다.

한국, 일본, 중국의 신문은 많은 기사를 실었다. 거기에 관해서는 앞서 소개한 기존의 연구가 있으므로 더 길게 살펴볼 필요가 없다. 주목할 부분은 일본 신문에 실린 현장 사진이다. 일본 신문은 사건 당일인 4월 29일부터 여러 차례 호외를 발행하였다. 현장 사진을 실은 호외는 5월 1일 처음 발행되었다.

이날 자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新聞), 도쿄아사히(東京朝日新聞)와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은 자사 특파원이 촬영한 사진을 실은 호외를 발행했다. 두 신문의 경쟁은 치열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문은 특종 사진을 확보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다. 일본 신문사 간의 경쟁은 유별나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일본 신문으로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군부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던 시기,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으로서는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이 사망하고 중장 2명과 주중 공사가 중상을 입은 초유의 대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현장을 찍은 사진은 사활을 걸고 확보해야 하고 타 신문에 앞서 보도해야 신문의 체면이 선다.

아사히신문과 도쿄니치니치신문이 찍은 윤 의사 거사 관련 특종 사진을 먼저 보도하려고 벌였던 경쟁은 당시 호외의 지면에 나타난다. 두 신문에 관해서 간략히 알아보자.

아사히신문은 1879년 1월 오사카에서 창간한 신문이다. 1888년 7월에는 ‘도쿄아사히신문’을 창간하여 도쿄로 진출했다. 이듬해에는 오사카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오사카아사히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이리하여 오사카와 도쿄 두 도시에 ‘본사’를 두고 아사히신문이라는 같은 제호 위에 ‘오사카’와 ‘도쿄’라는 지명을 명시하였다. 두 지역에 본사를 두고 발행하던 신문사는 1940년에 통합하고 제호를 ‘아사히신문’으로 통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72년에 창간된 도쿄니치니치신문은 현재 일본 3대 신문의 하나인 마이니치신문의 전신이다. 이와는 별도로 1882년에 창간된 일본입헌정당신문(日本立憲政党新聞)이 있었는데 1888년에 제호를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으로 바꾸었다가 1943년 1월 도쿄니치니치와 통합하여 제호와 사명을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으로 통일했다.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세 신문은 일본의 3대 신문이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현장은 아사히신문과 니치니치신문이 촬영한 사진이다. 니치니치신문의 사진은 니혼덴포(日本電報)통신의 사진과도 동일하다. 어쩌면 니치니치는 니혼덴포의 사진을 전재한 것일 수 있다. 이날 천장절 행사는 두 신문의 특파원이 취재하고 있었다. 도쿄니치니치의 특파원은 사토우(佐藤), 아사히 특파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신문에 기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대체적인 관행이었다. 윤 의사가 연행되는 장면은 윤 의사를 중심으로 도쿄아사히는 왼쪽, 도쿄니치니치는 오른쪽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두 신문의 기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행사가 진행 중인 정면을 순서대로 찍었다. 거사 직전 단상에 도열한 인물들의 사진, 폭탄이 터진 후의 장면, 부상당한 인물을 병원으로 수송하기 위해 업고 있는 장면이다. 윤 의사가 연행되는 결정적인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아사히신문은 윤 의사의 왼쪽 모습이고, 니치니치신문은 오른쪽 모습이다. 두 기자가 섰던 위치가 양편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니치니치 사진에는 윤 의사의 얼굴에 피가 묻은 모습도 드러난다. 폭탄이 터질 때에 파편이 튀어서 자신의 얼굴에도 피가 흘렀던 것이다. 매일신보는 5월 4일자에 실은 윤봉길 의사 사진에 “범인은 폭탄 파편으로 자신도 두부에 중상을 입었다”는 설명을 달았다. 이는 체포되는 과정에 입은 상처일 수도 있다.

도쿄니치니치신문 특파원이 촬영한 연행 장면. 오른쪽 얼굴이 보이는 이 사진은 중국에서 발행된 ‘노스차이나데일리뉴스’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경성일보에도 실렸다.


상하이 영자신문이 가장 먼저 실어

니치니치와 동일한 사진은 이튿날인 4월 30일자 현지 영어신문 노스차이나데일리뉴스(North China Daily News)에 먼저 실렸다. 노스차이나데일리뉴스는 사진의 출처를 ‘Photo by Nihon Dempo’로 밝히면서, 노한 군중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한 윤봉길을 군인들이 구출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영국인 발행 영어 신문에 제공된 사진이 런던의 ‘데일리미러’ 5월 16일자에도 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두 신문은 이 사진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신속하게 다른 신문보다 먼저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니치니치는 상하이에서 나가사키로 향하는 ‘上海丸’을 이용했다. 특파원 사토우가 촬영한 사진은 5월 1일 오후 1시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나가사키에서는 사진을 오무라(大村)까지 육로로 실어 보냈고, 2시 30분에 오무라를 출발하여 4시 30분 오사카성 동연병장에 투하했다. 이를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22호(록히드) 비행기에 실어 도쿄까지 항공으로 수송하여 5월 1일자 호외를 발행했다. 비행기는 두 비행사(羽太와 布施)가 조종했다. 선박, 자동차, 비행기를 총동원하여 촌각을 다툰 수송 작전이었다. 이 같은 수송 경로는 호외 지면에 기록되어 있다. 최선을 다한 빠른 보도로 독자들에게 서비스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힌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상하이 특파원이 촬영한 사진을 상하이에서 고베로 가는 배 샥손(ジャクソン)호에 실어 보냈다. 고베 외항에 정박한 배에 실린 사진은 아사히신문 비행기(비행사 新野)가 낚아 올려서(釣上) 오사카로 공수했다. 오사카에서는 도쿄로 사진을 전송했다. 오사카와 도쿄 두 본사는 이때 벌써 사진을 전송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던 것이다. 도쿄아사히신문도 이 같은 수송 작전의 경위를 호외로 발행한 ‘상하이폭탄사건 화보’에서 밝히고 있다. 오사카아사히와 도쿄아사히신문은 이리하여 윤 의사의 왼쪽 모습 사진을 실은 호외를 발행했다.


국내 신문에 실린 사진들

국내의 신문들은 일본 신문의 사진을 받아 실었다. 동아일보는 오른쪽에서 찍은 사진을 5월 4일자 2면에 실었다. ‘폭탄범 윤봉길 체포 당시 광경’이라는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사진인데 입수 경위는 밝히지 않았으나, ‘도쿄아사히’에 실린 왼쪽 얼굴 모습이다. 동아일보는 이후에도 윤봉길 의사 관련 기사에는 이 사진을 게재하였다. 같은 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동아일보와는 달리 윤봉길 의사 오른쪽 얼굴이 찍힌 사진을 1면에 실었다. ‘도쿄니치니치’가 찍은 사진이다.

조선일보 1932년 5월 27일자 사회면 머리에 실린 윤봉길 의사 거사 전의 사진. 어떤 경로로 조선일보가 이 사진을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일보는 윤 의사가 체포되는 사진을 싣지 않았다. 고의인지 사진을 입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거의 한 달이 지난 5월 27일자 사회면 톱으로 ‘상해 폭탄범 윤봉길 군법회의 수(遂) 개정’ 기사와 함께 거사 전에 찍은 모습 사진을 게재했다. 가슴에는 ‘선서문(宣誓文)’을 붙이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왼손에는 수류탄, 오른손에는 권총을 든 모습의 사진은 3단으로 크게 실었다.

거사 3일 전인 4월 26일에 찍은 이 사진을 조선일보가 어떤 경로로 입수했을까.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을 시기에 상하이의 김구 선생이 은밀히 신문사에 전한 것인지, 그 전에 윤봉길 의사가 가족에게 미리 보낸 것인지 알 수 없다. 윤 의사의 의연하고 결의에 찬 거사 전의 모습은 조선일보를 통하여 처음으로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윤 의사 거사와 피사체 사진은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데일리미러’에도 실렸다. 5월 19일자 미러 1면에는 윤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을 포함하여 니치니치의 사진 3장이 실렸다. 데일리미러는 당시 영국에서 발행되던 대중 신문이었다. 영국 화보 신문을 대표하는 잡지는 일러스트레이티드런던뉴스였다. 이 잡지 5월 7일자는 ‘Personalities of the Week : People in the Public Eye’라는 제목으로 사망 또는 부상당한 네 사람의 사진을 실었다. 무라이(상하이 주재 총영사), 노무라(해군 중장), 우에다(중장), 시라카와(대장)의 개인 사진이었다.

거사 후 윤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의 진위를 두고 논란이 일기 시작한 2007년에 역사적인 장면은 교과서에서도 제외되고 말았다. 많은 외국인들이 보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의 사진을 일본군이 조작하여 신문에 보도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방송이 여러 차례에 걸쳐 증폭시키면서 역사적 장면이 상처를 입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주>
1) 영국 외교문서, Sir M. Lampson(No. 107), (Shanghai) to Consul, Geneva-Repeated to Foreign Office; (Received April 29, 6.30 p.m.) 원문은 “Assailant was immediately seized by the crowed, but Japanese soldiers eventually managed to get him away.”
2) NYT, 1932.4.29, 1면, Bomb at Shanghai Wounds 5 High Japanese Officials; Shirakawa and Uyeda Hit.
3) 大阪每日新聞, 1932.4.30, 김상기, ‘윤봉길의 상해의거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 ‘윤봉길과 한국독립운동(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매헌연구원, 2010, pp.240-241)’에서 재인용.
4) NYT, 1932.4.30, 4면, ‘Shanghai Bombing Halts Peace Talks, Identified as Revolutionary’ 
5) The Times, 1932.4.30, Outrage at Shanghai, Japanese Chiefs Injured, Bomb Thrown by Korean.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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