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예인 사생활 보도 문제점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대중문화 영역에서 일시적으로 화제가 되는 사건과 내용은 그 시대와 사회의 정서를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내 보여 준다. ‘남자의 자격’에서 박칼린이 주목받은 것은 소통과 공감의 리더십을 열망하는 대중들의 정서를, ‘슈퍼스타K 2’에서 허각이 인기를 모은 것은 능력이 환경을 극복할 수 있음을 현실에서 목격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바람을, 초기의 ‘나는 가수다’에서 김건모의 재도전을 비판했던 것은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서나마 정의가 구현되기를 희망하는 대중들의 바람을 반영하였다. 대중문화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둘러싼 다양한 언술과 그 행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상을 읽는 첩경이다.


정보 욕구와 관음증은 구별돼야

올해 상반기의 가장 뜨거웠던 대중문화 뉴스는 서태지·이지아 관련 소식이었다. 지난 4월 21일 가수 서태지와 배우 이지아의 결혼과 이혼 사실이 뒤늦게 공개되었고, 이로부터 일주일 이상 이 사건은 갖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 쟁점들을 쓰나미처럼 덮어 버렸다. 종합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고, 텔레비전 저녁 뉴스에서도 메인 뉴스 대접을 받았다. 인터넷에서는 사실과 의견과 추측과 음모와 격론이 뒤섞인 채 편재되어 사람들의 눈이 감히 이 사건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여느 대중문화 뉴스가 그러하듯 서태지·이지아 사건은 두어 주 만에 대중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고, 더 이상 ‘핫’한 뉴스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매체들, 그리고 보도를 찾아 읽고 흥분했던 많은 사람들을 찬찬히 되짚어 보면, 그 기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회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대중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고, 언론의 현실을 평가할 수 있다.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에서 서태지가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 그의 이미지와 특성을 고려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가 극히 제한된 현실에서, 더 많은 정보를 원하는 대중을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다. 왜 쓸데없이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느냐는 핀잔은 대중문화를 조롱하는 문화적 우월
감의 반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보에 대한 욕구와 사회적 관음증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관음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서 바라보며 경험하는 쾌락이다. 컴컴한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는 남성의 시선을 관음증으로 해석한 멀비에 따르면 관음증은 가학적이지는 않더라도 시선의 권력을 수반한다. 누군가를 몰래 보는 행위, 누군가의 은밀한 구석을 관찰하는 행위는 곧 권력의 행사다. 푸코가 비유한 대로 원형 감옥에서 죄수를 감시하는 시선은 권력과 동일시된다.

관음증이 집단적으로 실천될 때 ‘몰래’는 ‘익명’으로 대치되고 ‘시선의 권력’은 ‘다수의 힘’에 의해 대체된다. 그리고 이 은밀한 쾌락은 정당화의 논리를 만들어 내서 떳떳한 쾌락, 혹은 당연히 누려야 할 쾌락으로 진화한다. 이 과정에서 관음적 쾌락과 시선 권력에 대한 욕망은 이성적 정보에 대한 욕구나 권리로 포장된다. 원형 감옥과는 반대로 다수가 한두 개인을 감시하는 사회적 관음증은 그래서 ‘알 권리’,혹은 정보욕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 비약의 끄트머리에는 소위 ‘신상털기’나 ‘네티즌 수사대’라 불리는 왜곡된 형태의 인터넷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네티즌 수사대의 목적은 정보권력 획득

‘네티즌 수사대’의 ‘신상털기’는 두 가지 명분으로 행해진다. ‘개똥녀’ 사건이나 ‘루저 발언 파문’에서 알수 있듯 ‘악의 응징’이라는 명분이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은 악인이며 따라서 신상털기라는 사형(私刑)을 통해 징벌해도 된다”는 합리화이다. 다른 하나는 ‘공공의 선’이라는 명분이다. “공공의 관심사를 충족시키는 일은 곧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고, 따라서 공인의 정보를 밝혀내는 작업 또한 정당하다”는 합리화이다. 서태지·이지아 사건은 후자에 해당된다.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스타 연예인을 공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공인이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정보 수집이 용인된다는 생각은 분명한 오류이다. 굳이 ‘사생활 보호’라는 담론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공인의 개인 정보가 공공의 선으로 연결되지 않음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알 권리는 유명인의 시시콜콜한 구석까지 알 권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네티즌 수사대’는 집요하게 서태지와 이지아에 대한 정보를 찾고 모으고 공유했는가? 정보는 곧 자본이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는 기술적 기반하에 남보다 먼저,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문화자본 축적의 중요한 방식이 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빼어나게 많은 정보를 갖는다는 사실은 다른 성원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는 근거이다. 비록 경제자본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경로는 없지만, 문화자본의 획득 그 자체도 특정 행위의 충분한 동인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수사’의 목적은 정보 권력의 획득이고, 이는 실상 공공의 선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결국 ‘알 권리’로 포장된 상자 안에는 사회적 관음증과 정보 권력의 욕구가 담겨 있는 셈이다. 문제는 대중의 이 같은 정서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언론의 전략이다. 대중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목표인가? 대중이 환호하는 정도가 뉴스 가치의 첫 번째 기준인가? 공공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개인 정보를 훔침으로써 관음적 쾌락을 경험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대중과 마찬가지로, 언론은 ‘알 권리’를 구실로 대중의 쾌락욕과 권력욕을 부추기고 또 현실화한다. 게다가 언론은 이를 통해 경제자본까지 축적할 기회를 갖는
다. 대중의 욕구를 상품화하고, 스타의 사생활·정보를 상품화하고, 공익이라는 명분을 상품화한다.

서태지(왼쪽)와 이지아.

정보 제공이 아니라 욕망의 상품화

서태지·이지아 사건이 표면화된 직후 중앙일보는 1면에 톱 사진으로 이지아의 얼굴을 싣고 2면 대부분을 할애해 기사화하였다. 국민, 서울, 세계, 중앙, 한겨레, 한국도 1면에 작게나마 소개 기사나 사진을 실었고, 국민과 한겨레를 제외한 모든 중앙 일간지가 2면의 상당 지면을 이 사건에 할애하였다. 그러나 정작 사실 관계가 명확한 기사는 없었다. “루머가 있었고”, “소문이 있었으며”, “하지만 확인되진 않았다”고 부연하고, “의문이 제기된다”고 했다. 특히 “각종 인터넷 포털, 뉴스 사이트에는 이 소식이 톱기사로 올라가 수만 개의 댓글이 붙었으며 각종 추측성 루머가 퍼지고 있다”(조선일보 4월 22자 2면)고 전한다. 대중들의 관음증과 정보 권력 욕구 그 자체가 기사화된 것이다. 이는 정보의 제공이 아니라 욕망의 상품화이다.

연예인의 사생활 노출이 빈번해지면서 스스로가 노출을 상품화하여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토크쇼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그 통로가 된다. 그리고 언론은 이 사실을 뉴스로 상품화하여 대중에게 전달하고, 동시에 이에 대한 비판을 또한 상품화한다. 이를테면 연예인이 스스로 노출하는 사적 정보는 저열한 마케팅 전략이지만 언론매체의 취재 보도는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한 정보 제공이라는 논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CCTV는 관음증이 제도화된 사례

대중문화를 다루는 (연예)저널리즘에서는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왜곡이 용납된다는 기자들의 인식은 대중의 사회적 관음증과 유기적으로 결탁된다.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가 아니라 대중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뉴스의 가치가 결정 된다면, 1800년대 말 미국의 두 신문 뉴욕월드와 모닝월드가 노란 옷 소년이 등장하는 만화를 가지고 싸우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옐로저널리즘이다. 옐로저널리즘의 병폐는 독자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선정성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가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넌지시 일러 주고, 관음증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사람들이 사회적 관음증과 정보 권력의 욕구를 ‘알 권리’로 포장하도록 부추긴주체는 결국 언론인 셈이다.

서태지·이지아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 그리고 사건 자체는 물론 대중의 관심까지 기사화했던 언론매체들의 보도 방식에는 욕망과 상품의 왜곡된 결합이 스며들어 있다. 저널리즘이나 ‘알 권리’ 담론은 변죽만 울릴 뿐이다.

관음증과 정보 권력욕이 제도화된 하나의 사례가 CCTV이다. 많은 사람들은 방범용 CCTV의 설치를 통해 범죄율을 줄이자는 정책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나 스스로를 절대 범죄자와 동일시하지 않는 심리가 존재한다. 뒷골목의 CCTV들은나 아닌 다른 사람들, 혹은 잠재적 범죄자들을 감시하는 카메라일 뿐이라는 인식은 무의식적으로나마 도덕적 우위에 기반을 둔 평가이다. 자신을 카메라의 피사체로 간주하기보다는 카메라를 통해 다른 이들을 감시하는 판옵티콘의 간수로 간주하는 것이다. 서태지·이지아의 숨겨진 정보를 캐려는 대중은 자신들 역시 피사체가 될 수 있음을, 혹은 이미 되어있음을 잊곤 한다. 이들에게 간수의 역할을 부여하고 그 기능을 부추기는 것이 언론이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시선의 대상이 되는 죄수가 될 수도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 언론의 임무이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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