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공영TV 총회 참관기

김영선 KBS 시사제작국 프로듀서

전 세계 27개국에서 87편의 공영방송 프로그램이 한자리에 모인다. 프로그램 상영이 끝나면 제작 관계자가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토론 시간을 갖는다. 관객들은 대부분 세계 각국의 공영방송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현업 관계자들이다. 프로듀서로서 이보다 더 매력적인 행사가 있을까. 지난 5월 9일부터 12일까지 63빌딩에서 열렸던 세계 공영 TV총회 INPUT(International Public Television) 이야기다.

INPUT은 1978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북미대륙과 유럽의 몇몇 방송 관계자들이 공영방송 프로그램과 제작자들을 위한 교류의 장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고, 이를 발전시켜 탄생시킨 것이 바로 INPUT이다. 당시 INPUT을 탄생시킨 멤버 15명 중에는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도 포함돼 있었다. INPUT은 매년 세계 각국의 다른 도시에서 개최되는데, 33년 역사 중 아시아에서 개최된 것은 2006년 대만에 이어 이번에 한국이 두 번째다. 한국의 방송 관계자들이 처음 INPUT에 참가한 것은 2003년 덴마크 올후스 총회 때였는데, 다섯 명 남짓이던 한국 프로듀서들 중에 나도 포함돼 있었다. 내가 연출했던 ‘추적 60분’이 탐사보도와 관련된 세션의 시사 작품으로 선정됐기 때문이었다. 북유럽과 남미 등 쉽게 접할 수 없던 나라들의 다양한 프로그램들, 그리고 제작자들 간의 열띤 토론은 당시 7년 차 피디였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후론 다시 INPUT에 참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언젠가 한국에서 INPUT이 열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드디어 서울에서 INPUT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션 진행자(Shopsteward)를 맡아 달라는 요청에 기쁜 마음으
로 참가하게 됐다.




한국에선 ‘남자의 자격’ 등 5편 뽑혀

앞서 말했듯 INPUT은 프로그램 상영과 토론을 중심으로 하는 행사다. 각각 다른 주제 아래 서너 편 씩의 프로그램이 함께 상영되고 상영 이후에는 제작 관계자와의 토론이 이어진다. 상영작은 여러 나라 출신의 진행자들이 함께 모여 선정하는데, 올해는 열네 명의 진행자들이 선정 과정에 참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MBC의 최승호 프로듀서와 내가 심사과정에 참여했다. 총 280여 편의 후보작 중 상영작으로 최종 선정된 것은 87편이었다. 우리나라 프로그램으로는 KBS의 ‘추노’ ‘남자의 자격’ ‘3D드라마 스마트 액션’, MBC의 ‘7일간의 기적’ ‘MBC스페셜-타블로, 스탠퍼드에 가다’ 등 5편이 포함됐다. INPUT은 우수한 프로그램들끼리 경쟁해 수상작을 가리는 행사가 아니다. 창의적이고 완성도가 뛰어난 프로그램들이 주로 출품되기는 하지만, 최종 상영작을 고를 때는 반드시 ‘완성도’만을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INPUT의 참가자들은 주로 방송 제작 관계자들이다.

또한 INPUT의 목표는 잘 만든 프로그램을 보여 주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공영방송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제작자로서의 고민들을 함께 토론해 보자는 데 있다. 다소 완성도가 미흡하더라도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가 담겨 있다면 상영작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아주 잘 만들어진 대작이라고 해도 형식과 내용에서 기존 프로그램들과 차별성이 없다면 탈락하기도 한다. 앞으로 우리 방송사들이 INPUT에 후보작을 낼 때 참고할 만한 부분이다. 그렇게 1, 2차 심사를 거치고 나면 치열한 토론을 거쳐 세션 주제들을 정하고 주제에 맞는 프
로그램들을 선정해 최종 상영작들을 결정한다. 이번 서울 INPUT의 경우 ‘우리는 정치로부터 독립적인가’, ‘TV 프로그램과 인터넷’, ‘시청자를 기만하는 프로그램의 의도와 효과’ 등 모두 24개의 공식 세션이 마련됐다.



웹사이트 전용 프로그램도 등장

개인적으로는 거의 십 년 만에 다시 참가한 이번 INPUT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었다. 인터넷과 관련된 공식 세션만 두 개였는데, 새로운 플랫폼이자 제작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인터넷에 대한 프로듀서들의 관심과 고민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중 둘째 날 열린 ‘TV 프로그램과 인터넷’에서는 인터넷과 SNS를 어떻게 제작에 활용했는지를 보여 주는 프로그램들이 상영됐다. 이 가운데 눈에 띄었던 것은 호주 공영방송 SBS에서 제작한 ‘고아 히피족’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페이스북을 통해 기획됐고, 페이스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도록 한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이후 반응이 뜨거워지자 특집으로 TV를 통해 방송됐다고 하지만, SNS를 프로그램 소재이자 제작 도구, 나아가 유일한 플랫폼으로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한 실험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스웨덴의 리얼리티 쇼 ‘레베카와 피오나’ 역시 스웨덴의 공영방송 SVT가 만들었지만TV 채널이 아닌 웹사이트 전용 프로그램이다. 전략적으로 플랫폼을 차별화해 젊은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제작자들은 이 같은 시도들이 다소 무겁고 교육적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공영방송을 젊은 시청자들이 보다 친근하게 느끼게 하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다음 날 진행된 ‘플랫폼과 프로그래밍’ 세션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의 콘텐츠를 기획할 때 TV와 웹 등 플랫폼에 따라 어떻게 차별화된 내용을 서비스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례를 두고 심도 깊은 토론이 벌어졌다. 인터넷 활용도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한국이지만, 특히 지상파 방송사들의 경우 웹사이트나 SNS는 아직까지 시청자와의 소통을 위한 부수적 수단일 뿐 별도의 콘텐츠를 공급하는 독립적 채널로까지 인식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INPUT에서 소개된 프로그램들의 사례는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는 한국의 젊은 피디
들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도 다뤄

또 하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첫날 오후 진행된 ‘우리는 정치적으로부터 독립적인가’라는 제목의 세션이었다. 공정하고 독립적인 언론으로서 공영방송의 역할은 INPUT에서 거의 매번 다뤄지는 대표적인 주제다. ‘추적 60분’이 상영작으로 선정됐던 2003년 당시 해당 세션의 주제도 바로 ‘탐사보도 프로그램’이었다. 올해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언론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세션이 만들어졌는데, 미국 공영방송 PBS가 만든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대니얼 엘즈버그와 국방부 문서’라는 다큐멘터리가 이 세션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대니얼 엘즈버그는 미국 펜타곤, 즉 국방부의 전직 연구원으로 1971년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국방부의 기밀문서를 폭로해 미국 정부의 국민에 대한 기만행위를 만천하에 드러나게 한 인물이다.

PBS의 다큐멘터리는 현재 만 80세인 대니얼 엘즈버그의 육성 회고를 기본으로 그가 감옥행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기밀문서를 폭로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주요 언론들이 문서에 대한 내용을 기사로 싣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엘즈버그의 육성 증언도 감동적이지만, 언론인으로서 보다 흥미로웠던 내용은 제보를 받은 뉴욕타임스가 보도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엘즈버그가 기밀문서를 빼낸 것 자체가 기밀유지법을 어긴 것이었고 이를 보도하게 되면 뉴욕타임스 역시 정부로부터 어떤 조치를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뉴욕타임스는 보도를 결정했고, 닉슨 정부의 요청으로 인해 법원으로부터 보도 중지 처분을 받게 된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 미국 유수 신문들이 보도에 동참, 뉴욕타임스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미국 대법원은 ‘국민의 알 권리’에 힘을 실어 뉴욕타임스가 기사를 실을 수 있다고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 그리고 ‘국민의 알 권리’와 관련해 미국 언론 역사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다큐멘터리도 완성도가 뛰어나 심사 과정에서 이견 없이 채택됐다. 그 밖에 에콰도르 경찰의 폭력
시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와 이스라엘 프로그램이 함께 소개됐는데, ‘PD수첩’의 진행자로 시청자들에게도 낯익은 MBC 최승호 피디가 직접 진행을 맡아 더욱 눈길을 끌었다.


KBS ‘스마트 액션’은 유일한 3D 작품

이 밖에도 다양한 주제의 많은 프로그램이 참가자들의 호응을 얻었는데, 특히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성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네덜란드의 성인 시트콤 ‘타워 C’, 벨기에의 정치 풍자 쇼 등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위의 ‘공영방송 프로그램’들이어서 문화적 차이와 방송 규제 등에 대한 한국 참가자들의 질문들이 많았다.

한국의 프로그램들에 대한 외국 참가자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 그리고 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들이 골고루 상영돼 한국 방송의 수준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KBS의 드라마 ‘스마트 액션’은 전체 상영작 중 유일한 3D 제작 프로그램이어서 더욱 관심을 모았다.

이번 행사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예상보다 한국 참가자들이 적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INPUT이 아시아 대륙에서 열린 건 이번이 두 번째다. INPUT을 처음 만든 사람들이 유럽과 북미대륙 방송인들이었고, 참가자들도 대다수가 이들 대륙에서 오기 때문에 머나먼 아시아까지 개최지를 옮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들어 한국 공영방송들이 적극적으로 INPUT에 참가하면서, 우리보다 더 먼저 INPUT에 발을 디뎠던 일본을 제치고 개최국이 되는 영광을 얻었는데 정작 행사장에 온 한국 방송인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나 역
시 피디이기 때문에 제작하는 동료들이 얼마나 눈코뜰 새 없이 바쁜지 잘 알지만, 그래도 흔치 않은 이기회를 보다 많은 방송 동료들이 누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행히 INPUT은 나라별로 ‘Best of INPUT’, 혹은 ‘MINI INPUT’이라는 이름의 별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해 INPUT에서 소개된 프로그램들 중 호응이 좋았던 몇몇 프로그램들만을 모아 국내용 상영회를 여는 것인데, 우리나라도 매년 가을 MINI INPUT을 개최해 왔다. 비록 해외의 방송 관계자들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나라의 프로그램들을 접하고, 방송 관계자들과 이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창의적인 일을 한다고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에 매몰되다 보면 가끔씩은 내가 공장에서 상품을 찍어 내는 기계가 된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십 년 이상 제작 현장을 지킨 피디라면 한 번쯤은 같은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공영방송 피디라면 고민의 씨줄과 날줄이 더 복잡하게 얽힌다. ‘공영방송이 왜 필요한가’, ‘공영방송다운 프로그램은 뭔가’, ‘나는 공영방송에 맞는 피디인가’ 등등. INPUT은 바로 이런 고민들을 함께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제작 관계자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비록 INPUT이 이런 고민들에대한 정답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 그것도 세계 곳곳에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지 않을까. 언젠가 다시 한번 한국에서 INPUT이 열리게 되기를, 그리고 그땐 한국의 공영방송들이 지금보다 한층 더 멋진 모습으로 발전해 있기를 바란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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