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원전 재앙 25년 ‘죽음의 땅’을 가다

임현주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3월 29일 오후 2시 30분 대검찰청 기자실.

“지금 체르노빌 상황이 어떻지?”
“예? 체르노빌요? 잘 모르겠는데요.”
“거기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있나?”
“예?… 한번 확인해 보고 전화드리겠습니다.”

사회부장의 전화를 끊고 기자실 TV를 봤더니 YTN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언론에서는 일제히 체르노빌 사고와 일본 사태를 비교 분석하고 있었다. 부장께는 “확인해 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막상 정보를 알아보려니 막막했다. 학창 시절 러시아에서 8년 간 유학한 경험 덕분에 러시아나 구소련 관련 취재를 한 적은 있지만, 25년 전 원전 사고가 발생했던 ‘체르노빌’에 대해선 특별히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한국에서 유학 중인 러시아 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체르노빌 관련 정보를 찾아서 부장께 보고드렸다.

“체르노빌 30㎞ 외각에는 일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다크투어리즘(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을 둘러보며 교훈을 얻는 여행) 상품으로 체르노빌을 개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현장은 원전 사고 25주년 기념행사 준비로 바쁘다고 하는데요. 취재를 하려면 우크라이나 정부 비상대책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받으면 가능합니다.”

상황을 말씀드렸으니 국제부에 전달해서 누군가 현장 취재를 가겠구나 생각했다. 아무리 급해도 검찰 출입 선수를 체르노빌로 보내진 않겠지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오후 4시쯤 또 휴대폰이 울렸다.

“주민이 거주할 정도면 안전하단 얘기 아닌가? 현지에 연락해 취재 신청하고, 가장 빠른 비행기 편으로 출발해.”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 미혼인데, 방사능 피폭 위험이 있는 곳에 간다는 게 솔직히 겁났다. 기자실 책상에 앉아서 5년 전 기자가 처음 됐을 때 그 마음을 떠올려 봤다. MBC 이진숙 전 미국 특파원처럼 종군기자도 해 보고 싶었고, 오지 취재도 해 보고 싶었고,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예스” 하며 달려가는 현장 기자이고 싶었다. 더군다나 러시아쪽 분야는 내가 더 관심을 갖고 좋은 기사를 발굴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는데, 어느덧 나는 현실적인 문제로 걱정하고 고민하는 기자로 변해 있었다. 잠시 마음을 추슬렀다.

3월 30일 오전 11시 인천공항. 밤새 취재 일정 컨펌하고 항공편 예약해서 공항에 도착했다. 체르노빌 출장을 함께할 사진부 ‘왕고참’ 김형수 선배도 만났다. 기본적인 출장 스케줄을 이야기하면서 탑승 수속을 밟았다. 취재 기획안도, 취재 일정도 모두 현장에서 판단하고 보고하기로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체르노빌 2011 보고서’ 취재는 시작 됐다.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3분. 폭발음과 함께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며 전 세계를 ‘방사능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앞에서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있는 필자.

취재 첫날 원전 4호기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태운 택시 운전기사는 차에서 단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아무도 여기에 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내가 여기 왔던 사실을 알면 아내가 펄쩍 뛸 것”이라고 말했다. 25년 전 원전 사고로 인해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봤기 때문에 당장 육안으로 드러나는 피해가 없어도 나중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곳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도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기형아를 출산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땐 체르노빌 원전 취재 시 방사능 차단복을 입고 들어가는 줄 알았다. 2006년 독일의 한 기자가 취재 후기를 올린 것을 봤는데 우비와 비슷한 방사능 차단복을 갈아입게 했다고 한 말을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도착했더니 “외부에서 방사능 차단복을 사서 입고 오는 사람외에 별도로 지급하는 게 없다”고 했다. 순간 당황했다. 직항도 없어 모스크바를 경유해 힘들게 갔는데 방사능 차단복이 없다고 그냥 돌아올 수는 없었다. 일단 원전 관계자에게 안전수칙을 듣고, 동의란에 서명했다. 원전 관계자는 “반바지 차림이나 노출이 심한 의상이 아니면 평상복을 입고 취재해도 문제없다”면서도 “체르노빌 원전 주변에 3시간 이상 머물러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김 선배는 한국에서 가져온 방사능 측정기를 테스트하며 수치를 측정했다. 원전 4호기 앞에 다가갔더니 방사능 수치가 우크라이나 키예프 시내보다 평균 50~100배 이상 올라갔다. 체르노빌 원전 직원 니콜이 소지했던 방사능 측정기는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가끔씩 ‘삑삑’ 소리를 내며 경고음을 울려댔다.

25년 전 구소련 정부는 냉각 기능을 포함한 콘크리트로 원전 4호기 벽면을 덮었다. 이 공사를 마무리 짓는 데만 7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영상 자료화면과 사진으로만 봤던 4호기를 내 눈으로 바라보는데 육안으로도 벽면과 콘크리트 지붕이 갈라지고 있는 게 보였다. 틈틈이 빗물처럼 벽면에 무언가 흘러내린 붉은 자국이 선명했고, 마스크를 쓰고 4호기 보수 공사를 하는 인부들도 눈에 띄었다. 체르노빌 원전 관계자 니콜은 “4호기 지붕에 약간 틈이 생겨 극소량의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고 말했지만 택시기사나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사람들은 “적지 않
은 양이 새고 있다”고 했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3km 떨어진 도시 프리퍄티. 사고 후 학교와 병원, 놀이공원 등이 황폐화돼 프리퍄티는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체르노빌은 이제 안전하다”고 주장하지만, 현지 주민들은 “정부가 체르노빌로 관광 상품을 만들어 돈을 벌려는 수작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정부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았다. 니콜은 “체르노빌 원전 30㎞ 인근 지역에 사는 원주민 평균 연령은 70세 이상”이라며 “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이동할 때마다 별도의 허가증 요구


원전 4호기에서 3㎞ 떨어진 도시 프리퍄티. 1970년
세워진 계획도시로 체르노빌 원전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가족 5만 명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에 살던 주민들의 평균 거주 연령은 26세로 한때는 ‘천재들의 도시’로 불렸다.

프리퍄티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 서는 사람이 ‘출입 허가증’을 요구했다. 체르노빌 원전은 이동 구역마다 별도의 허가증이 필요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곳곳에서 쓰러진 나무와 폐허가 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체르노빌 원전 관계자는 프리퍄티를 ‘유령의 도
시’, ‘죽음의 도시’라고 불렀다. 원전 사고 발생 직후 주민들이 여권과 통장, 중요한 소지품만 챙겨서 나갔는데 그 뒤로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25년째 전기가 끊긴 터라 겨울이면 해가 짧아 이곳을 둘러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도시 중심에 있는 8층 높이 호텔에 올라갔다. 아
파트, 극장, 슈퍼, 학교 등 프리퍄티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텔 계단 곳곳엔 깨진 유리 조각이 널려 있었고. 벽면엔 누군가가 낙서한 흔적도 보였다. 객실 옷장 문은 바람의 힘을 견디지 못한 채 삐거덕댔으며, 가끔 어깨 위로 떨어지는 천장에 고인 빗물은 온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호텔 옥상에서 원전 직원은 “아파트 단지 뒤편으
로 보이는 원전 4호기를 보라”고 말했다. 이곳을 유령의 도시로 만든 원전 4호기와 사고로 폐허가 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단지 옆에 있는 학교로 이동했다. 게시판에는 주간 일정이, 아이들 책상 밑에는 수학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책상이 부서지고 사물함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칠판 앞쪽에는 파란색 볼펜으로 쓴 학생 이름과 시험 점수가 ‘5, 4, 3, 2’로 적혀 있는 노트가 선생님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러시아는 초중고, 대학 시험이 5점 만점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2점
이면 낙제 점수에 해당한다).

학교 강당으로 갔다. 이번엔 바닥마다 널려 있는 방독면과 인형이 발끝에 치였다.원전 관계자는 “80년대는 미국과 냉전 중이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핵전쟁 대비 교육을 시키면서 방독면 착용법 등을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유치원도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3~4세 아이
들이 수면을 취했던 방을 둘러보았다. 작은 침대마다 놓인 인형과 방독면은 ‘처키’ 인형을 연상케 했다.

원전 직원은 “구소련 정부는 전쟁은 예상했어도 원전 사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며 “막상 사고가 터지고 난 다음엔 방독면도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나와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 건물에 1시 26분에 멈춰선 시계가 보였다. 원전 사고 발생 3분 후 소방대원들이 도착할 때쯤 정지된 시계였다. 프리퍄티 주변 숲 인근에서는 원전 사고 당시 구조 작업에 사용하다 버려진 차량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프리퍄티가 위험한 이유는 원전 사고 때 화재 진압용으로 사용했던 장비가 곳곳에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땅에 묻어 뒀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도 방사능 측정기로 측정한 다음에 이동하곤 했다.

원전 지역에서 이주한 주민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필자.

당시 태어난 아이들 갑상선암으로 고생

시리즈 1, 2회를 현지에서 마감하니 주말이 됐다. 3
회는 체르노빌과 프리퍄티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수소문할 방법이 없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시내에 있는 체르노빌 박물관에 가서 자료들을 둘러보며 직원들에게 “체르노빌에서 살았던 주민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말했다. 박물관 메인홀을 지키고 앉아 있던 70대 할머니가 “3층 사무실에 올라가서 안나 체르니코바를 만나 보라”고 했다. 체르노빌 박물관 과학담당 이사였다.

안나 체르니코바는 “한국에서 몇 차례 체르노빌
전시회를 했다”며 “일본 사태를 지켜보면서 한국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은 사고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체르노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며 “방사능 사고에 대비해 15세 미만 아이들에게 공급할 요오드 물량과 식량을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방사능 위험에 대해 알려야 한다며, 1986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갑상선암으로 고생했던 이야기를 해 줬다.

그는 “체르노빌과 프리퍄티 이주민들이 만든 ‘제믈랴키(동포) 재단’을 찾아가라”며 친절히 만나볼 사람을 소개해 줬지만, 유감스럽게도 담당자가 병가를 낸 상태였다. 25년 전 프리퍄티에 살다가 키예프로 이사 온 사람인데 ‘제믈랴키 재단’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개인 연락처를 확인하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갑상선암 수술 후 목을 제대로 쓸 수가 없어서 집으로 찾아와도 만나기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고민이 됐다. 시리즈 3회를 연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이주민이 사는 지역을 찾아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박물관 앞에서 무작정 택시를 탔다. 이주민이 사
는 지역인 “데스냔스키로 가자”고 했다. 택시 운전사는 “정확한 주소지를 대라”며 “그 지역이 넓어서 무작정 데려다 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운전기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한국에서 취재 왔고, 체르노빌 이주민을 만나야 하는데 휴일이 끼어서 취재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운전기사는 “그럼 꼭 데스냔스키 지역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하리코프스키 지역도 이주민이 거주하는데 내 처남이 체르노빌에서 여섯 살 때 나왔으니 만나 볼 의향이 있으면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기사는 전화로 처남을 한참 동안 설득했다.


사과 그림을 심벌로 사용 ‘생명’을 갈구

결국 택시 운전기사 도움으로 안드레이 리세녹의 집에 가서 인터뷰를 했다. 시리즈 3회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하리코프스키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피폭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야기도 들었다.

발렌티나 미하일로브나(47·여)는 1986년 사고
당일 원전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는 “사고 후에도 체르노빌을 바로 떠날 수 없어서 한동안 근무를 하다가 나왔는데, 결국 후유증에 시달리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수술비와 치료비 보상 문제를 우리들에게 떠넘기려 한다”면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에 있다”고 말했다.

6박 7일간 우크라이나 출장. 6시간 시차 때문에
낮에는 취재하고, 밤에 숙소에 와서 마감하면서 며칠 동안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그래도 “수습 때 경찰서에서 ‘하리꼬미’하던 시절에 비하면 편한 거다”생각하니 견디지 못할 게 없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취재했던 김형수 선배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참 신세를 많이 진 것 같다”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사전에 좀 더 준비를 많이 해서 갔더라면 우크라이나 원자력병원이나 대학 교수들 인터뷰도 시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이후 다른 언론들이 현장을 방문해 전문가 인터뷰 등
을 보도한 것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취재를 하면서 체르노빌 박물관이나 관련 재단에
서 사과나무 모양의 그림을 체르노빌 심벌처럼 사용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체르노빌’은 체르노빌 원전이 있던 지역에서 자라던 나뭇잎을 뜻하는 말이고, 그 나무에 잎사귀 대신 붉은색 사과 그림을 그려 넣는 이유는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사과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에 체르노빌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원전 사고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새 생명, 새 희망이 불어넣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취재를 마쳤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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