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훈(敍勳)과 언론인 후손들의 업적 찾기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학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있는 독립운동가와 국기(國基)를 공고히 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정부에서 훈장을 수여한다. 나라를 위해 개인을 회생하면서 시련을 견뎌낸 애국자와 그 자손을 국가가 예우하는 제도이다. 훈장은 본인이 자랑스럽게 여길뿐 아니라 그 후손과 가문에도 영광이다. 훈장은 5등급으로 나뉘는데 ①대한민국장 ②대통령장 ③독립장 ④애국장 ⑤애족장 순이다. 등급에 따라 여러가지 혜택이 따른다.

언론인 가운데도 훈장을 받을 수 있는 공적을 쌓은 인물들이 많다. 서재필(독립신문, 대한민국장, 1977), 이종일(제국신문, 대통령장, 1962), 남궁억(황성신문, 독립장, 1977), 양기탁(대한매일신보, 대통령장, 1962), 영국인 배설(裴說·E.T. Bethell, 대한매일신보, 대통령장, 1968), 오세창(만세보-대한민보-서울신문, 대통령장, 1962), 김성수(동아일보, 대통령장, 1962), 송진우(동아일보, 독립장, 1963) 같은 분들을 꼽아볼 수 있다.

지난 4월 국무회의는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써서 한말 언론인의 표상이 되었던 장지연(시사총보-황성신문-해조신문-경남일보, 독립장, 1962)의 서훈을 취소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반면에 독립운동가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맡았지만 일제 말기에는 뚜렷한 친일행적을 남긴여운형에게는 대통령장을 수여(2005. 3)했다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12월 가장 높은 등급으로 올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는 초유의 특별대우를 한 경우도 있다. 한 인물이 건국훈장을 두번 받은 사람은 여운형 외에는 없었다. 1등급인 대
한민국장을 받은 언론인은 서재필 외에는 없었다. 양기탁, 배설, 박은식, 신채호, 오세창은 언론인이면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분들인데 모두 대통령장이다. 대한민국장은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받았을 정도이다.

독립운동 또는 항일 문화운동의 공적이 분명한 인물 가운데도 정부에서 개인의 공적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개인의 활동을 정부[국가보훈처]가 빠뜨리지 않고 소상히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이다. 본인이 살아 있다면 스스로 입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에도객관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본인이 사망한 후에 아들과 손자가 아직 태어나기 전이나 아주 어린 시절에 있었던 선대의 활동 상황을 입증하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선대의 업적을 후손이 밝혀내어 명예를 현창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이다. 거기에 더하여 정부가 주는 혜택도 받을 수 있다. 후손이 무관심하거나 능력과 성의가 부족하여 선대의 업적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면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지니게 될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후손들은 자료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자료 가운데는 당시 발행된 신문과 수사 또는 수형(受刑) 기록이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경찰에 검거되었던 기사가 신문에 실려 있거나, 경찰과 검찰이 작성한 수사 기록에 남아 있다면 매우 신빙성이 높은 항일의 증거로 인정받을 수 있다. 당시에는 당사자의 사회적인 처신과 신분에 불리했을 자료가 오늘에 와서는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교담과 임치정

언론사를 연구하는 입장이다 보니 언론인은 물론이고,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분들의 후손 가운데 선대의 자료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더러 있다. 독립운동가는 아니지만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쓴 글이나 그들의 행적을 찾아내 정리하기 위해 신문 잡지를 뒤적이는 사람도 있다.

이교담(李交倓·1880. 8. 19~1936. 4. 3)은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면서 ‘공립신보’의 회계로 교포 사회 발전에 노력하다 귀국 후에는 대한매일신보에서 근무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다. 임치정(林蚩正·1880. 9. 26~1932. 1. 9)도 비슷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1903년과 그 이듬해 초에 하와이로 건너가서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4년 무렵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과 함께 공립협회(共立協會) 조직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기로 선임되어 활동했다(공립신보, 1905.11. 22).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가 창간(1905.
11. 20)되자 이교담은 ‘회계’를 맡아 신문 경영을 도왔다.

임치정과 이교담은 1907년 3월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주동포를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등의 활동을벌이기도 했다. 임치정은 1907년 10월에 먼저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회계 책임을 맡았고, 이교담은 이듬해 1월에 국내로 들어와서 대한매일신보에 합류했다. 임치정은 대한매일신보 제작과 경영을 총괄했던 총무 양기탁(梁起鐸)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으로 이 신문사에 근거를 둔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신민회 간부회의 4차례 가운데 3 차례는 임치정의 집에서 개최되었다. 임치정은 한일
강제 합방 후에 양기탁과 함께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임치정은 이 같은 공적이 인정되어 1968년에 ‘독립장’을 받았다.

그런데 이교담은 잊혀진 독립운동가가 되어 아무런 훈장도 받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1999년 초 어느 날 이교담의 손자라는 이정원(李貞園) 씨가 나를 찾아왔다. 인천에서 자영업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정원 씨는 자신이 모은 할아버지의 항일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여 주었다. 국가보훈처에 제출할 ‘독립유공자 공적 조사서’를 보완하기 위해 수집한 자료였다. 그는 전해인 1998년 11월에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한 상태였지만, 보훈처가 더 많은 자료를 보완하도록 요구하므로 어떻게 하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상의하러 찾아왔다
는 것이다. 그의 자료 가운데는 나의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나남, 1987)에 이교담을 언급한 부분도 복사되어 있었다. 자료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교담과 임치정이 구한국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서울 천연당(天然堂)사진관의 김규진(金圭鎭·1868~1933)이 찍은 사진이었다. 천연당사진관은 우리나라 사람이 영업을 시작한 첫 사진관이었는데 1907년에 문을 열었다.

임치정과 이교담이 군복을 갖춰 입고 사진을 찍었던 시기는 국운이 다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 무장 항일 투쟁을 논의하던 1910년 무렵으로 추정되었다. 두 사람은 이완용 등 매국 원흉들을 처단하는 계획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1909년 12월과 이듬해 초에 체포된 일도 있었다. 붓을 들고 싸우는 항일 언론과 무장투쟁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절박한 언론인의 모습을 이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고 있었다. 이정원 씨가 가지고 온 이교담의 또 다른 사진도 있었다. 미국에서 부인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었는데 이교담이 하와이를 거쳐 미국에서 공립신보에 관계하던 무렵의 사진으로 짐작되었다.

1910년에 강제 합방이 되자 이교담은 해외로 망명하여 중국 각지와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을 10여 년 동안 떠돌다 1919년에 귀국하였지만 가난과 병고에 시달렸다. 1936년 4월 3일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이교담이 사망하였을 때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시국의 변함[한일 강제 합병]과 함께 해외로 망명하여 가지고 북경 상해 운남 등지는 몰론 남양군도 지방으로 십여 성상이나 표랑 생활을 하다가 기미 후에 귀국해 가지고는 이래 가난과 병고와 싸호면서 만년에 고절을 지켜나려온 터이라 한다.”(조선일보, ‘언론계의 선배 이교담씨 장서’, 1936.
4. 5).

나는 이정원 씨가 가지고 온 사진을 서울신문에 소개해 주면서 기사로 다루어 보도록 주선했다. 서울신문은 그 뿌리가 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고, 역사와 지령을 한말로 소급하여 창간 기념일도 한말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일인 7월 18일로 정하였던 때였다. 그 후 다시 서울신문으로 환원했지만 이정원 씨가 나를 찾아왔을 당시에는 ‘대한매일’이었다. 대한매일은 1999년 7월 16일자 사회면에 “대한매일신보 직원 항일 투쟁에도 앞장”이라는 제목으로 이교담-임치정의 사진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정원 씨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할아버지 이교담은 ‘애국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미국과 국내에서 거의 함께 활동했던 임치정이 1968년에 ‘독립장’을 받았으므로 늦었지만 후손의 노력으로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한말 언론인 임치정과 이교담이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

보훈처도 인정한 임유동의 ‘언론창달’

1988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임부륙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1930년 무렵에 중외일보 상무 겸 편집감독을 맡았던 임유동(林有棟·1900. 11. 18~1950. 12. 24)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임유동은 중외일보 발행에 사재를 투척했는데,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들고 온 자료는 주로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집 가운데 임유동의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이었다. 언론 관련 자료는 나의『한국 언론사연구』(일조각, 1983)에 실린 사원 명단이 유일했다. 내 책에 ‘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를 연구한 논문이 있는데 거기에 임유동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보고 더 상세한 자료가 없는지 물어보러 왔다는 것이다.

중외일보는 후에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로 제호가 바뀌었는데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발행이 중단되던 때까지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더불어 3대 민간지의 하나로 발행되었으나 주주들의 구성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었다. 신문이 폐간될 당시에는 투자한 자본을 회수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임유동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들고 온 자료에 나타나는 임유동의 기록은 일종의 ‘간접 자료’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더 객관성을 띠는 당시의 자료가 보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부륙 씨도 그래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당시 신문 기사를 더 찾아보도록 권유했다. 프레스센터 도서실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사 색인과 영인본을 참고해 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나는 편집인협회의 『신문 100년 언론인물사전』을 편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레스센터 13층 편협 사무실 창가에 책상을 놓고 작업중이었다. 후에 그가 찾아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사에서 임유동의 항일 학생운동과 1928년의 조선 공산당사건 관련 사실 등이 많이 나왔다. 임유동의항일 활동과 재판받은 기사가 신문에 여러 차례 실렸기 때문에 객관적인 증빙 자료의 요건에 보탬이 되는 것 같았다. 임유동은 1999년에 ‘독립장’을 받았다. 임부륙 씨가 10여 년 동안 아버지의 공적을 찾기위해 많이 애쓴 결과였을 것이다. 보훈처가 인정한 임유동의 공적은 다음과 같다.

공적 개요 1924년 여름 중국 북경 국립사범대학 재학 중 하기방학으로 귀향하였다가 조선학생총련합회의 발기인 중 1인으로 가입한 후 중국 내 한인학생들의 가입 권장을 위한 책임을 지고 파견되었으며 1928. 7. 21 북경한인청년단선전원으로 입국하였다가 서울에서 피체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고 그 후 M.L당 창당 혐의를 받아 피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9년에는 중외일보 상무로, 1930년에는 상무취체역으로 언론 창달에 기여한 사실이 확인됨.

차상찬이 발행인이었던 개벽사 발행 『제1선』. (왼쪽)
개벽사가 발행한 여러 잡지를 편집했던 잡지인 차상찬 캐리커처. (오른쪽)
 

매서운 필치로 주목받은 차상찬

일제 치하에서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고 큰 희생을 치른 잡지는 『개벽』이다. 1920년 7월에 창간되어 1926년 8월까지 72호를 발행하는 동안 수많은 압수, 삭제 처분과 정간과 벌금형 각 1회의 가시밭길을 걷다가 폐간의 비운을 맞은 것이다. 개벽은 여기서 수명이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1934년 11월부터 1935년 3월(차상찬, 4호), 세 번째는 광복 후인 1946년 1월부터 1949년 3월(김기전, 9호)까지 발행되었다. ‘개벽’이라는 제호로 태어나서 두 차례나 죽었다 살아나는 과정을 되풀이한 것이다. 법률적 지위로 보더라도 제1차 발행 기간의 개벽은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받은 잡지였기 때문에 3대 민간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에 버금가는 언론기관으로 인정되었다.

개벽은 본격적인 종합잡지였고(김근수, 『한국잡지사』, 최덕교, 『한국잡지 100년』, 2), 1920년대 민족운동사와 문예 사조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잡지였다(김동인, ‘창조·폐허시대’, 『한국문단 이면사』). 개벽사는 이사(理事)를 임명하여 잡지 제작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는데, 이돈화, 김기전, 민영순, 차상찬,방정환, 박달성, 전준성 등 7명이 이사였다. 이사제를 운영한 잡지도 일제 치하에서는 희귀한 경우였다. 개벽사는 제호를 달리한 자매 잡지를 10 여 종이나 발행하여 최남선이 여러 잡지를 발행한 ‘신문관’의 뒤를 이은 잡지 언론 본산의 역할을 수행했다.

개벽사에서 근무했던 편집자 가운데는 차상찬(車相瓚·1887. 12. 2~1946. 3. 24, 호 靑吾)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차상찬은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같은 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 1920년부터는 개벽사가 발행한 여러 잡지를 편집했다. 별건곤, 혜성, 제일선 등 개벽사가 발행한 잡지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는데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기간을 대표하는 전문 잡지인이었다. 『임꺽정』의 작가이자 언론인 홍명희, 일제 치하 신문 제작의 ‘귀재’로 불리던 이상협과 보성고보의 동기였으며, 정치인 신익희와는 같은 때에 보성전문의 교수를 지냈다. 잡지에 많은 글을 쓴 잡지 저널리스트이면서 개벽사 발행 여러 잡지를 편집하였다.

차상찬은 청오(靑吾)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지만 취운생(翠雲生), 월명산인(月明山人), 수춘학인(壽春學人), 강촌생(江村生), 차천자(車賤子), 주천자(酒賤子), 차돌이, 관상자(觀相者) 등 여러 필명으로 사화(史話)를 비롯하여 만필, 인상기, 소화(笑話) 등에 걸친 갖가지 글을 썼으며 특유한 기지와 매섭고 거리낌 없는 필치로 주목을 끌었다. 1934년 11월에 개벽이 제2차로 발행되었을 때는 차상찬이 이를 살려냈으나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다.

차상찬의 아들 차웅렬(車雄烈·87) 씨는 차상찬이 항일 논조의 잡지를 편집하고 발행한 공적이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초등학교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인 차웅렬 씨는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출간되지 못한 차상찬의 『조선백화집(百話集)』 가제본을 복사하여 항일 문화운동의 증거로 제시하면서 잡지협회와 보훈처 등 관계기관에 표창과 훈장 추서를 끈질기게 건의했다.

한국잡지협회가 해마다 잡지의 날(11월 1일)에 잡지 유공자를 시상하면서도 차상찬을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보훈처에 훈장 추서를 신청했더니 일제 말기 조선임전보국단(1941. 10. 22~1942. 10. 29)에 이름이 올라 있는 등의 친일 행적 때문에 불가하다는 대답을 들었다며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임전보국단은 총독부의 강압으로 결성되어 여운형을 비롯해 우익 좌익을 망라한 저명 인사들이 다수 포함된 단체였다. 또 다른 결정적 친일 행적이 없는 한임전보국단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친일파로 몰아서는 안 될 인물이다.

차웅렬 씨의 20여 년에 걸친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2010년 11월 1일 제45회 잡지의 날에 정부는 차상찬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차웅렬 씨의 소원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그는 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1)

정현웅이 식민지하 조선인의 우울한 모습을 그린 ‘대합실의 한 구석’(왼쪽), 화가, 삽화가, 문인, 언론인의 삶을 살았던 정현웅.



친일 아닌 저항미술가 정현웅
정현웅(鄭玄雄·1910. 9. 20~1976. 7. 30)은 화가, 삽화가, 문필가를 겸한 언론인으로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인물이었다. 광복 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연재소설의 삽화로 독자들에게 친밀한 이름이었고, 월간잡지 『조광』과 『여성』에 아름다운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단행본 장정가로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많은 책의 표지를 그렸다. 고등보통학교[경복고] 재학생이던 17세 때에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입선한 이후 1943년까지 13회에 걸쳐 서양화 18점을 출품하였고, 그중 2회는 특선작에 올랐을 정도로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30년대에 신문과 잡지의 삽화는 새로운 시각 문화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정현웅은 다양한 필치의 수준 높은 삽화를 다량으로 제작하여 근대 삽화의 수준을 높였다. 광복 후에는 해방 공간의 잡지계를 대표하는 『신천지』의 편집장으로 잡지 저널리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그림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다. 서양화 미술 작품, 신문 삽화, 잡지 표지, 단행본 장정, 무대 장치를 맡았고, 6·25 전쟁 후 북한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模寫) 작업을 수행하였다. 일제 치하부터 미술평, 수필, 영화평을 썼던 문인으로도 활약했다.

정현웅이 1940년대에 그린 잡지 표지화와 그림 가운데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내용도 있었다. ‘신시대’, ‘반도의 빛(半島の光)’, ‘소국민’ 등의 표지화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지원하는 청년 학도병과 연전연승을 선전하는 그림이었다.2)

이를 근거로 정현웅은 친일파의 오명을 쓸 처지가 되었다. 2008년 4월 민간 기구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정현웅의 일제 말기 삽화와 잡지의 표지화 가운데는 군국주의와 관련된 이미지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파시즘의 미화에 이용된 친일파로 판정이 났으니 이의가 있으면 제기해 보라는 통지가 유족들에게 왔다. 다음 달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같은 내용으로 정현웅을 친일파로 판정한다는 통지가 날아 왔다.3)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4)

첫째, 조선금융연합회의 기관지인 『반도의 빛』에 3년간(30~40여 회) 계속해서 표지화를 그렸다.

둘째, 대중잡지 『신시대』에 두 번에 걸쳐 표지화를 그리고 김동환의 ‘백림개선’이란 시에 삽화를 그렸다.

셋째, 경성일보의 자매지인 『소국민』에 세 번에 걸쳐 삽화를 그렸다.

넷째, 조선방송협회 기관지인 『방송지우(放送之友)』에 표지화를 두 번 그렸다.

정현웅의 차남 정지석(鄭之碩) 씨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냈다.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총검으로 짓밟으면서조선인들의 목을 조르던 시절에 생을 영위한 지식인들을 오늘의 잣대로 재단(裁斷)하려 한다면, 이는 너무 순진한 것이거나, 아니면 악의적인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요지였다. 그는 이 편지를 월간조선에 공개하여 아버지 정현웅은 친일미술가가 아니라 오히려 보기 드문 저항 미술가였다고 주장했다.

일제 말기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없던 시대였는데, 만일 화가가 당국이 강요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거나, 문인이 총독부의 지시를 어기면서 제 목소리를 냈다면, 그 결과는 즉시 철창행이거나 해직이었을 것이라면서 “서슬 퍼런 일본 식민지 시대의 숨 막히는 민족의 암흑기를 살았던 동시대 사람들은 ‘친일행위’에 대해 귀 위원회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견해와 시각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라고 썼다.

정지석 씨는 또한 광복 후 3일 만에 결성된 조선 미술건설본부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친일 미술인을 걸러내는 것이었고 친일 미술인으로 지목된 10여 명의 화가들을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에서 제명했는데 당시 서기장이었던 정현웅이 친일파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귀 위원회의 주장처럼 아버지가 일제 말기에 몇몇 잡지에 삽화나 표지화를 그린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였다고 당시 사람들이 인식했다면, 아버지는 친일미술인들을 걸러내는 중요한 사건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의 권위와 정당성에 누군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1년 반에 걸친 유족의 노력으로 정현웅은 친일파의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정지석의 논리적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5) 후손의 피말리는 노력이 없었다면 정현웅은 결코 친일파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없었을 것이고 친일파로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정지석 씨는 친일파로 낙인찍혔던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업적을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시인, 잡지인이었던 파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 씨가 아버지를 위한 추모 사업으로 월간 『삼천리』를 영인하고 아버지의 글을 모은 전집을 발간하는 등의 사업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은 나의 『고쳐 쓴 언론유사』(커뮤니케이션북스, 2004)에 소개한 바 있다. 위에 쓴 사례는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일들이다. 모르는 사례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언론계 이외의 분야도 많을 것이다. 어떤 분야건 후손의 노력으로 국가 사회를 위해 헌신했던 업적이 빛을 보는 경우도 있고, 후손의 무관심이나 능력 부족으로 역사의 그늘에 파묻히고 마는 경우도 있다. 억울한 오명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역사에 기록되는 일도 많을 것이다.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문석준은 일제 말기 단파방송 사건과 연루되어 1944년 1월에 옥사하였지만 훈장을 받지 못했는데, 함께 투옥되어 그보다 가벼운 형을 받았던 다른 사람들은 훈장을 받은 것을 보면 국가의 훈장이 반드시 공평하게 수여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6)


주)
1) 차상찬에 관해서는 월간조선, 2011.4, <개벽 창간한 차상찬 선생,잡지와 사랑에 빠졌던 한 남자의 독립투쟁기> 참고.
2) 김용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미술가들’,『한국미술 100년』①, 한길사, 2006, p.382.
3) 정지석, ‘아버지 정현웅 화백’, 『근대서지』, 제2호, pp.56〜65.
4) 정지석, ‘親日派로 몰린 월북 화가 鄭玄雄 아들의 공개편지,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친일파란 말입니까”’ 월간조선, 2009.11.
5) 배진영, ‘기자수첩, 鄭玄雄 화백,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취소’, 월간조선, 2009.12.
6) 정진석, ‘발굴: 일제말 단파방송 수신사건으로 옥사한 신문기자 문석준·홍익범, 이승만·김구의 對日방송 내용을 송진우 등에게 전파’, 월간조선, 2007.4.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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