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BS ‘촬영 원본 사용권 공유’ 합의

김유열 EBS 편성기획부장

지상파 TV의 전성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TV 광고 시장도 10년째 정체 상태고 지상파 TV의 시청 점유율도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종합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의 광고 매출이 1조 1,000억 원을 넘어섰다. 이는 KBS와 SBS의 광고 매출을 상회하는 것이다. 놀라운 변화다. 네이버 하루 방문자 숫자가 1,000만 명을 넘는다.

인터넷으로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인구는 늘어가는 데 반해 TV
를 직접 시청하는 숫자는 계속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문이 방송에 자리를 내주었듯 방송이 점차 뉴미디어에 자리를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이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1995년 케이블 TV가 출범할 때만 해도 지상파 TV는 미디어계의 독재자나 다름없었다. 2002년 위성방송이 등장할 때까지도 지상파 TV는 지배자였다. 그러나 2011년 지금 지상파 TV는 안으로는 케이블 TV, 위성방송, IPTV와 싸우고 밖으로는 각종 모바일 디바이스와 싸우고 있다. 내우외환의 위기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상파 TV는 지배자로서 그 두
려움을 모른다. 전통적인 편성, 제작 방식과 관행을 고집하고 있다. 본사 중심의 사고, 본사 중심의 편성과 제작 등 모든 게 본사 중심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철학이 들어갈 틈이 없다. 본사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방송법에서 강제하는 외주제작 비율을 마지못해 지키고 있는 것이다.


뉴미디어 시대, 지상파 TV도 위기

지상파 방송 사업자는 플랫폼 사업자이면서 동시에 콘텐츠 사업자다. 지금까지 아쉬울 게 없는 절대적 존재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최근까지 방송사가 정체되리란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 방송사는 엘리트들로 넘쳐나고 그 엘리트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창의적인 전문 집단으로서 부족할 게 없었다. 당연히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다. 절대 강자는 있어도 영원한 강자는 없는 것이 역사의 진리랄까. 3년 전만 해도 오늘의 애플사를 예측할 수 없었다. 누가 구글의 등장을 예언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제 누가 네이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는가? 지상파 TV는 절대 강자의 자리를 뉴미디어에 내주고 있는 것이다. 중계소를 통해 지상파를 송출하는 시대가 종료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시청자는 케이블과 인터넷 망을 통해 TV를 시청하고 있다.

지상파냐 위성파냐 논쟁이 무의미해지는 시기가 온 것이다. IPTV를 통해 고화질 영화와 각종 콘텐츠를 얼마든지 아무 때나 볼 수 있다. 가정에서 VTR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모바일 기기를 통해 이동하면서도 볼 수 있다.

지상파 TV의 종사자로서 지상파 TV의 살길을 고민해 본다. 거두절미하고 딱 잘라 말한다면 살길은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플랫폼 사업자란 사실을 가능한 한 빨리 망각하는 것이다. 현재의 기술 혁명 속도를 보면 지상파냐 아니냐는 무의미한 것이다. 지상파 송출을 중단해도 시청자가 콘텐츠를 보는 데 어려움이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인터넷이든, 케이블이든, 위성방송이든, 스마트 TV든, 모바일 기기든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디지털화된 동영상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인간의 행위와 행동을 그대로 모사하는 동영상 텍스트는 영원할 것이다.

최근 3D 입체니 홀로그램이니 첨단 표현방식이 유행하지만 모두 동영상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창작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연을 모방한다. 희곡이 영원한 인간의 예술이듯 동영상 콘텐츠 또한 영원한 인간의 창작품일 것이다.

앞으로는 플랫폼의 시대에서 콘텐츠의 시대로 넘어갈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다큐멘터리든, 애니메이션이든 장르를 불문하고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동영상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자에게 권력은 이동할 것이다. 수명이 긴 동영상 콘텐츠의 위력은 막강하다. 수천 년이 흘러도 고전의 힘은 파워풀한 것이다. 사서삼경은 아직도 우리 생활을 지배한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아직도 읽힌다. 문자의 시대가 지고 영상의 시대가 대체하는 것 같지만 문자의 힘은 여전히 위대하다. 콘텐츠가 곧 파워인 것이다.생명력 있고 품질 높은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다면 지상파 TV의 위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콘텐츠가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오히려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갖고 있는 사업자는 과거보다 더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방송의 전통적인 수익 모델은 광고다. 현재 SBS, MBC 등의 국내 유수 방송사도 광고 수익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유통 윈도가 방송 매체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요즘은 케이블 TV, 위성TV, IPTV, 인터넷, 모바일 기기 등 멀티윈도 시대에 살고 있다.

동일 콘텐츠를 다양한 윈도에 유통시켜 수익을 배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EBS 다큐멘터리의 경우 이런 멀티윈도를 통해 과거에 비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EBS의 3D 입체 다큐멘터리 ‘앙코르 와트’의 경우 2년 내에 10억 원의 제작 원가를 모두를 회수할 전망이다. 벌써 절반 가까이 회수됐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기록인 것이다. 지상파 TV 방송사가 아니라 콘텐츠 프로바이더로 위상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인 것이다.


외부의 창의성과 자발성 활용

지상파 TV는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고 있다. 지상파 TV의 점유율은 하락하지만 수익은 상승하는 패러독스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한류 드라마의 성공이 이것을 웅변하고 있다. 과거처럼 시청률이 높지는 않지만 수익 창출 능력은 배가된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EBS의 외주제작사와의 상생협력 방안은 이런 환경에서 마련됐다. EBS 독자적으로 세계적인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2000년 EBS가 공사화되면서 저작권을 외주제작사와 공유하는 문제가 검토됐다가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당시 EBS는 이 문제를 외주제작사에 시혜적 측면에서 검토했다. 공사도 됐으니 국내 영상산업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저작권을 공유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지난 5월에 EBS가 촬영 원본의 사용권을 공유하자는 결정을 내린 것은 그때와는 배경이 사뭇 다르다.

외주제작사의 협력 없이 EBS가 고품격 콘텐츠를 만들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작용한 것이다. IT 전문가인 EBS 곽덕훈 사장의 인식도 이런 의사 결정에 한몫했다. 전통적인 방송 사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곽 사장은 공급자의 아이디어와 창의성만으로 질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다. 고객과 소비자의 요구가 콘텐츠를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본사 피디의 창의성만으로 질 높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EBS가 IT 업계 성공 신화를 나름 벤치마킹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이폰의 성공 신화는 이것을 증거한다. 만약 애플사가 애플리케이션을 독자 개발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 신화는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외부의 창의력을 과감히 수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한 것이다.

애플리케이션을 만든 사람과 수익을 과감히 공유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의 창의력을 집합시킬 수 있었다. 수만 명의 개발자를 직접 고용해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면 그 비용도 천문학적일 것이며 창의성도 현재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 수십만 개의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될 수 있는 모델의 개발은 단순하지만 천재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성공 신화는 IT 업계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자발성은 창조의 어머니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집단과 자발적으로 하는 집단의 창의성의 결과는 뻔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창의성을 극대화할 것인가. EBS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했다.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자발성과 창의성을 강화하자. 남의 작품을 만드는 것과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태도부터 다른 것이다. 자신의 작품처럼 만들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약간의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도 무방하다고 본 것이다.


충분한 제작비・제작기간 확보 중요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충분한 제작비와 제작 기간이 확보돼야 한다. 아무리 천재적인 감독이 있다고 해도 몇 개월 만에 수작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2~3개월의 제작 기간 갖고는 세계적인 콘텐츠를 만들 수 없다. BBC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보통 2~3년의 기획, 제작 기간을 갖는다.

오늘날의 BBC 다큐멘터리는 감독의 천재성과 창의력에만 의존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제작 현실은 어떠한가. 제작 기간이 1주일에서 한 달 사이인 프로그램이 부지기수다. 외주제작사와 피디의 협력 없이 이런 초단기의 제작 기간을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송사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모든 제작자를 고용할 여력이 없다.

EBS의 경우 피디협회 회원 피디의 숫자가 150명 정도다. 직접 제작자는 그중 불과 7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인력 규모를 갖고 세계적인 콘텐츠를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불가피하게 외주제작사와 피디의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기왕에 협력 관계를 구축한다면 상생할 수 있는 묘안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이들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본사 피디의 아이디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세상의 아이디어를 총집합시킬 수 있는 1단계 제도가 촬영 원본 사용권 공유인 셈이다. 애플사의 아이폰 애플리케이션 신화처럼 그들의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것이다.

EBS는 비록 방송 4사 중 피디의 숫자가 가장 적은 방송사지만 가장 오래 제작하는 콘텐츠가 있다. 바로 교육 다큐멘터리다. 월요일에서 목요일에 방송되는 다큐 프라임의 경우 보통 제작 기간이 8~18개월이다. 정규 편성 프로그램으로서는 국내 최장의 제작 기간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장기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외주제작사와 협력관계를 구축하면서 가능해졌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의 전국 네트워크 방송사들은 이미 외주제작사 중심의 제작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본사는 편성을 맡아서 하고 제작은 주로 아웃소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올 연말에 첫 전파를 쏠 케이블 종합편성 방송사들은 선진국의 제작 관행을 따라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 외주제작사와의 협력 관계가 구축되지 않고는 방송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EBS는 밤 9시에서 12시 사이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외주제작하고 있다. ‘세계테마기행’(월~목), ‘한국기행’(월~금), ‘극한직업’(수~목), ‘직업의 세계-일인자’(월~화), ‘다큐 프라임’ 등 많은 프로그램을 외주 제작하고 있다. 프로그램의 질도 우수한 편이다. 이미 프라임타임대 대부분을 외주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외주 프로그램의 질이 EBS의 질을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슈퍼 ‘갑’ 대신 동반자 시대로

EBS의 다큐멘터리와 한류 드라마의 성공에서 외주제작사와의 상생협력 관계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본사 중심으로 제작됐다면 한류 열풍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과거에 비해 드라마의 수준이 TV 영화 수준으로 격상됐다.

외주제작사와의 저작권, 사업권 공유를 통해 대규모 제작비 파이낸싱이 가능해졌고 이것은 선순환 구조로 프로그램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본사의 제한된 제작비로는 현재의 드라마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EBS의 다큐멘터리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다큐멘터리 최고가 수출 기록을 세운 EBS 3D 입체 다큐멘터리 ‘앙코르 와트’는 컴퓨터 그래픽을 담당하고 있는 외주제작사와 공동 제작 계약을 체결하고 수익 공유를 통해 제작 스케일을 획기적으로 키웠던 것이다. 그 결과 품질이 개선되고 최고가로 미국에 판매될 수 있었다.

지상파 TV 본사와 외주제작사의 전통적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할 필요성이 여기 있는 것이다. 상생 협력이란 상투적 수사가 아니더라도 이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슈퍼 ‘갑’과 슈퍼 ‘을’의 시대는 지나가고 동반자 관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될 것이다. 한 사람보다는 열 사람의 머리가 낫다.

비록 첫 단추에 불과하지만 외주제작사와 촬영 원본 사용권을 공유하는 EBS의 이번 조치가 외주 제작사와의 관계 설정에서 새로운 전기가 됐으면 한다. 그리고 국내 영상산업에 활력소가 되길 기대한다. EBS가 이번 조치를 발표한 이후 긍정적인 신호가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5월과 6월에 실시한 다큐 프라임 기획안과 정규 프로그램 기획안 공모에 외주제작사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평소 세 배 이상의 기획이 접수돼 실무자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세상의 온갖 아이디어를 모으자는 취지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EBS는 그들의 창의력 집합소가 되고 싶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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