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신문 ‘나는 국가대표다-훈련기’

조은지 서울신문 체육부 기자

서울신문 체육부 기자로 살던 나 조은지는 2011년 5월 ‘여자 럭비 국가대표’라는 직함을 하나 더 얻었다. 스포츠를 동경하고 갈구해 스포츠 기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해소되지 않는, 아니 점점 더 커져 가는 국가대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강조하고 싶다. 체험기나 훈련기를 쓰려고 국가대표에 도전한 게 절대 아니라는 것을. 진심은 통한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소리치고 싶다. 의심스럽다면 숨만 쉬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낮에 인천 송도LNG구장에 오면 된다. 썩어 있는 엄지발톱이나 피가 고인 발바닥을 보여 줄 수도 있다. 태극 마크가 얼마나 신성하고 가혹한 일인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5월 1일 여자 럭비 국가대표선발전 참가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서울신문에 주 1~2회 ‘나는 국가대표다-조은지 기자의 훈련기’를 연재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쓰는 건 ‘취재기’가 아니라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국가대표 선수의 담담한 훈련 일지다(회사에서는 내가 선발전에 참여한 것도 몰랐다.
현장에 취재 온 연합뉴스 기자의 기사를 접하고 나의 출전 사실을 알게 됐다). 눈에 불을 켜고 취재 아이템을 찾아본 적도 없고(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라 특별할 것도 없다), 유난스러울 만큼 재밌는 얘기도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이글이 어떤 기자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지 회의가 드는게 사실이다.

여자럭비 국가대표인 서울신문 조은지(뒷줄 맨 오른쪽) 기자가 인천 송도 LNG구장에서 진행된 대표팀 합숙 훈련 중 동료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있다.

진짜 국가대표라고?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한국이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 강국’이 되려면 언젠가 기자·의사·교사 등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 국가대표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찬란한(?) 스포츠의 미래를 꿈꾸며 미약한 첫걸음을 내디딘 나의 얘기를 풀어 보겠다.

스포츠 기자를 꿈꾼 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어떤 축구 선수에 ‘꽂힌’ 사춘기 소녀는 축구장을 밥 먹듯 드나들었고 모든 스포츠에 박식해졌다. 결국 대학교에서 체육교육을 전공했고, 졸업 후 서울신문사에 입사해 체육부에 배정받게 됐다.

취재는 정말 즐거웠다. 현장에 갈 때마다 일이 아니라 팬미팅하는 기분으로 다녔고, 선수와 감독들을 만나는 것도 마냥 설렜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반복되면서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갈증이 심해져 갔다.

사실 종합일간지의 스포츠면은 너무 전문적인 내용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스포츠지에서는 크게 쓸 만한 일도 종합지에서는 가십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특종이나 낙종에 대한 부담이 덜한 대신 깊이와 의미가 있는 기사에 대한 압박은 커져 갔다. 게다가 오랫동안 원했던 스포츠 기자가 됐으니 차별화 된 스포츠 기사를 쓰고 싶다는 욕심은 하늘을 찔렀다. ‘준체육인’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가려운 부분을 긁고 싶었다.

국가대표를 꿈꾸게 된 건 지난해 밴쿠버 동계올림픽 취재를 다녀온 이후였다. 현장에 취재 가서 본 올림픽은 정말 대단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국제무대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숨 막히게 근사했다. 연일 ‘금메달’ 위주로 보도해 온 기자로서 부끄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올림픽은 출전 자체로 숭고했다. 선수들이 몇 년간 흘린 피와 땀을 따라잡긴 역부족이겠지만 태극 마크를 다는 건 ‘로망’이 됐다. 종목은 중요치 않았다. 컬링도 알아봤고, 썰매 종목(봅슬레이, 스켈레톤)도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태극 마크 앓이’가 한창이던 내 눈을 크게 만든 건 대한민국 여자 럭비 국가대표 선발전 공고를 봤을 때였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기초 체력 테스트를 통해 태극 마크를 달 수 있었다. 당장 대한럭비협회에 신청서를 냈다. ‘떨어지더라도 뭐 생생한 체험기 정도는 쓸 수 있겠지’ 하며 애써 마음을 비우려 했지만 태극 마크를 향한 열망은 커져만 갔다.

조은지 기자가 연세대학교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여자럭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테스트를 받고 있다.



5월 1일 아침,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맑았다. 선발전이 벌어질 연세대학교 종합운동장으로 가면서 심장은 더 크게 뛰었다. 쿵쾅쿵쾅. 오전 10시, 나까지 52명의 ‘운동깨나 한다는 여자들’이 모였다. 견제하는 눈빛과 묘한 긴장감. 4조로 나뉘어 기초체력을 측정했다. 등번호 14번을 받은 내가 하필 2조 맨 첫 순번이었다.

첫 종목은 지그재그런. 스텝을 통해 민첩성과 순발력을 보는 코너. 대학 시절 테니스와 핸드볼로 다져진 발놀림 덕분인지 제법 빨랐다. 팔굽혀펴기는 40개를 채웠고, 윗몸일으키기는 30개를 했다. 50m도 8초 2에 끊었다.

지옥은 이때부터였다. 100m를 뛰면서 죽음을 맛봤다. 100m가 이렇게 긴 줄 미처 몰랐다. 피니시라인의 코치 선생님들이 “끝까지! 지나가!”를 외치는데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음은 생생한데 기자 생활 4년 차에 ‘저질’이 돼 버린 몸이 야속했다. 한숨 돌리며 수다를 떨었다.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나갔던 ‘럭비 얼짱’ 채성은(18)이 뒷번호.갑자기 “네? 26살요? 안 힘드세요?”라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회사에서는 막내급 귀염둥이(!)지만, 여기선 ‘왕왕왕언니’였다. 주변엔 해맑은 고딩들이 바글거렸다. 급 침울해졌다.

풀린 다리가 충전되기도 전에 800m가 시작됐다. 다른 도전자들이 스타트부터 너무 빠르게 달려 나가길래 곧 뒤처질 줄 알았다. 맨 뒤에서 느긋하게 뒤쫓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두 번째 죽음을 맛봤다. 땀을 흘리면서 ‘너무 나태하게 살았구나’ 했다. 이건 해탈이었다. 꼴찌는 면했지만 이미 내 다리는 내 신체이길 거부했다.

드디어 럭비공을 만졌다. 캐치와 킥. 대부분이 초보라 능숙도보다는 발전 가능성과 감각을 본다고 했다. 나는 날아오는 럭비공을 갓난아기라도 되는 양 받아들었다. 두 번 모두 사뿐하게 잡았다. 얏호. 킥은 망했다. 공의 모양이 얄궂어서 어디를 차야 할 지 난감했다. 회전 없이 쭉 뻗더니 이내 착지. 투포환의 궤도 같았다. 마지막 관문은 보디체크. 중심을 낮추고 강하게 어깨를 ‘들이대는’ 자세는 생소하고 어려웠다. 2시간 30분의 선발전이 끝났다.

그리고 열흘 뒤 대한럭비협회 사무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함께 선발전에 나섰던 대학 동기가 이미 합격 문자를 받은 터라 떨어졌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내게 ‘오아시스’ 같은 전화였다. 사무국장은 “조 기자님이 기록상으로 선발전을 통과하셨는데…. 그런데 정말 진심으로 하실 생각이 있으신 거예요?”라고 물었다. 기자라 뽑아 줬다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테고, 내가 제대로 임할지 의심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 진지하게 출전한 거예요”라고 말했다.

 
휴직 신청하자 국장은 거절

그리고 5월 17일부터 훈련이 시작됐다. 초반 일주일은 태릉선수촌 오륜관에서 합동훈련(출퇴근 훈련)을 했고, 이후 인천 송도LNG구장에서 합숙훈련을 하고 있다. 초반에는 (건방지게도) 만만했다. 패스와 캐치 위주로, 공과 친해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술과 야근에 절어 있는(?) 4년차 기자의 관절 구석구석에 윤활유를 칠하는 느낌이었다. 송글송글 맺히는 땀도 기분 좋고 상쾌했다.

하지만 점점 훈련 강도가 세졌다. 럭비라는 종목 자체가 공을 들고 달려야 하는 종목이기 때문에 체력은 필수다. 뛰고 뛰고 또 뛰었다. 엄지발톱은 까맣게 변했고, 손가락 네댓 개는 삐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호루라기를 불며 ‘공포의 셔틀런’을 시키는 코치님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하루에 기사 10개 쓰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왈칵 눈물이 솟구치기도 한다. 국가대표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지만, 그게 순간순간 만나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덜어 주는 건 아니다.

조은지 기자가 여자럭비 국가대표로 선발된 후 서울 공릉동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첫 대표팀 훈련에서 패스 연습을 하고 있다.


합숙 초반에는 짬짬이 기사도 썼다. 당장 현장을 찾아가야 하는 경기 기사는 못 썼지만, 예고 기사나 인터뷰 기사 등을 쓰며 죄책감을 달랬다. 오전 훈련(9시 30분~12시 30분), 오후 훈련(2시 30분~6시 30분) 사이에 부지런을 떨면 그럭저럭 간단한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훈련 강도가 세지고 부상까지 생기자 도저히 짬이 안 났다. 침대에 누워서 쌔근거리는 선수들 틈에서 기사를 쓰기에는 몸도, 마음도 여력이 없었다. 씻고 테이핑하고 짐을 나르기에도 시간은 빠듯했다. 아침 발제도 엄두를 못 내는 상황에 이르렀다. 일주일에 1~2회 정도 쓰는 훈련기가 버거울 정도로 운동이 혹독해진 것이다.

게다가 나의 공백이 고스란히 지면에 드러나는 것 같아 괴롭다. 담당 종목 중 1·2진 체제로 운영되는 프로종목(축구, 농구)은 그렇다 쳐도 나 혼자 커버하는 아마추어 종목(핸드볼, 테니스, 겨울스포츠 등)에는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합숙 중에 ‘K리그 승부 조작’ 파문이 터졌는데 혼자 쏙 빠져나와 선배만 고생하는 것 같아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첫 훈련부터 꼭 한 달이 된 6월 17일. 합숙이 없는 기간이라 어김없이 회사로 출근했다(합숙 기간이 아닐 때 부지런히 야근을 해 놔야 한다). 오랜만에 뵌 편집국장께 면담을 요청했다. 이런 식으로 운동과 기사 작성을 병행하기에는 내 스스로도 너무 힘들고, 부원들에게도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정식으로 휴직을 하고 다른 인원을 체육부에 충원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장은 단칼에 거절하셨다. “네 글이 효용 가치가 있는 건 현직 기자로서 국가대표를 겸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넌 전문 선수밖에 안 된다. 전문직과 선수생활을 병행하는 고충까지 전부 기사에 녹여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를 ‘워킹 플레이어’로 명명한 것이다.

내 몫을 나눠 가진 부원들은 격무에 시달리게 됐고, 부장께서는 내 담당 종목 기사가 뜨면 본인이 손수 작성해 내 바이라인을 달아 주고 계신다. 이런 전폭적인 지원이 부담스럽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참 행복하고 고마운 생각이 든다.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내 모든 걸 쏟아붓는다면 후회는 없을 거라고 믿는다. 게다가 스포츠를 대하는 자세도 많이 달라졌다. 다짐하건대 앞으로 나는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훈련장에서 감독과 실실 웃으며 얘기하지 않을 거다. 벤치만 달구는 후보 선수들을 더 애착 있게 바라볼 것이고, 부상에 아파하는 선수들을 더 챙길 것이다. 올해 내셔널리그의 캐치프레이즈처럼 ‘거침없는 도전, 위대한 승리’를 꿈꾼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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