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지수집가·잡지사학자·서지학자로서의 삶과 업적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학



백순재(白淳在·1927. 5. 1~1979. 7. 9) 선생은 서지학자로 불리기도 했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잡지수집가이자 잡지연구가였다. 1972년 11월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제16회 전국도서전시회에 ‘특별부수전(附隨展)’이라는 명칭으로 선생이 수집한 잡지 일부를 전시하였을 때 수집한 잡지는 600여 종, 권수로는 대략 8,000 내지 1만 2,000여 권에 이르는 분량으로 추산되었다. 개인이 수집한 소장품을 분류하고 집계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정확한 숫자는 본인도 잘 모르는 형편이었다.

백 선생은 한말에서 광복 이전까지 발행된 잡지 400종을 전시할 계획으로 준비했지만 공간이 부족하여 333종만 전시했다. 그러나 백 선생 사망 후 수집품을 인수한 아단문고(雅丹文庫)에서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정확하게 집계해 보니 잡지 1,544종 1만 1,095책, 단행본이 4,744책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대의 잡지수집가이자 연구가로서 유실될 운명의 잡지를 전문적인 안목으로 수집하고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서지(書誌)와 잡지의 역사를 연구하여 잡지 연구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근대 문화사 기록 보존하고 체계화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던 백 선생이 넉넉하지 못한 수입으로 잡지를 수집하지 않았다면 귀중한 잡지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 방법이 없을 정도로 흩어져서 잡지사의 중요한 부분이 복원될 수 없는 빈자리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잡지에 기명으로 실린 글과 기사는 당시의 역사와 인물 연구에도 대단히 소중한 자료이다. 백순재 선생은 잡지를 수집하여 역사와 문화사 전반에 걸치는 연구 자료를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했던 인물이다.

백 선생은 잡지사학자로서도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1965년 8월부터 12월까지 「사상계
」에 「한국잡지 70년사」를 연재하다 이듬해 1월부터는 「신동아」에 「잡지를 통해 본 일제시대의 근대화운동」이라는 제목으로 7월까지 연재를 이어 나갔다. 이 논문은 잡지 발달사의 체계를 세운 업적으로 이 분야 연구에 디딤돌이 되었다. 그 밖에도 그가 쓴 여러 편의 잡지사 논문 가운데는 1968년에 공보부가 발행한 『한국의 언론』에 수록된 「잡지사」, 1973년에 잡지협회가 발행한 『한국잡지총람』에 쓴 「한국잡지발달사」도 대표적인 논문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잡지총람』에 정리되어 있는 「폐간잡지 요람」에 실린 소장처를 보면 선생이 수집한 자료는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역사가 오랜 대학도서관이 소장한 잡지와 같은 수준으로 귀중한 것들이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정기가 서린 한말 잡지

백순재 선생의 본적은 경기도 수원시 매산로 3가 84번지였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 3월에 수원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수원에서 살았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연희대학 전문부 문과에 입학하여 1947년 10월에 2년을 수료했다. 졸업과 동시에 대전공업중학교에서 2년간(1947. 10~1949. 8) 교사 생활을 하다 국학대학 법문학부 국문과에 입학하여 전쟁 중에 학업을 마쳤다. 대학 재학 시기가 1949년 9월부터 1952년 3월까지였으니 전쟁이 한창이던 북새통과 피난살이에 제대로 공부할 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1974년에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원각사 극장연구」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전사범학교 병설 중학교(1952. 3~1955. 1)1)에서 3년 반 동안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 서울사범학교 교사(1955. 11~1963.)2)를 거쳐 성동여자중학교·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969년 2월에는 서울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는데, 1974년 2월 서울시 초중고교 교사 이동 명단에 서울여고로 전보 발령이 난 ‘백순재’가 보인다. 서울여고 근무 여부는 알 수 없다. 1967년 무렵에는 경희대학교 신문학과에서 강의했고, 중앙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에서도 잡지출판론을 강의하는 등 활동의 무대를 넓혔다.

백순재 선생이 잡지 수집에 눈을 뜬 것은 연희대 전문부 재학 시절에 신극사(新劇史)의 자료를 얻기 위해 잡지를 찾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나도향 특집이 실린 『현대평론』을 구하기 위해 꼬박 일주일을 찾아다닌 끝에 쌀 몇 말 값을 주고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잡지를 모으기 시작한 시기는 1954년 무렵이었다. 전쟁 직후라 많은 잡지가 고서점에 흘러나왔지만, 잡지를 별로 탐탁하게여기지 않던 시절이므로 헐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잡지 수집에 절호의 기회였다. 그가 잡지를 모으기 시작한 후 고서점에서 잡지 가격을 두 배로 부를 정도가 되었지만 부지런히 고서점을 뒤졌고 엿장수가 끌고 다니는 리어카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의 월급으로 잡지 모으는 일을 지속하자니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잡지를 수집하는 동안 여러 문헌에 적힌 잡지 관련 기록이 정확하지 않
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이를 바로잡겠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국어를 가르치면서 찾아낸 문학작품의 오류도 많았다. 교과서에 실린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맨드라미 들마을에도”라는 구절이 있는데 원문 “맨드라미 들마꽃에도”의 오기였다. 소월의 시집은 1925년 12월에 『진달래꽃』이 출간된 이래1973년까지 80여 종이 나온 것으로 추정되었다3). 백순재 선생이 하동호 교수와 공편으로 소월의 시 201편을 묶어 출간한 전집 『못 잊을 그 사람』(양서각 1966, 인하출판사 1970, 미림출판사 1973)은 세 출판사에서 출간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소월 시의 가장 완벽한 정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말 국내에서 발간된 최초의 잡지 『대죠션 독립협회회보』의 내용을 보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자구구(字字句句) 감동이 어렸고, 어느 하나 가슴을 흔들어 주지 않는 것이 없어요. 민족정기는 온통 그 속에 어려 있어요”라고 찾아온 기자에게 말했을 정도였다.4)

동아일보 1967년 1월 31일 자에 실린 ‘백순재 씨 한국근대문화사 정리’ 기사.


문화계서 수집 잡지 중요성 주목

1963년 무렵부터는 언론계와 문화계에서 선생이 수집한 잡지의 중요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이해 독서주간인 11월 24일부터 ‘출판물 특수전시회’를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구 신문회관에서 개최했는데, 잡지는 백순재, 신문은 오한근 두 수집가의 소장품을 전시했다. 두 수집가의 희귀 소장품이 처음으로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이다. 김원룡(서울대 문리대 교수), 이종수(서울대 사대 학장), 박종화(소설가), 백철(중앙대 교수·문학평론가), 김근수(수도여사대 교수) 등 개인과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도서관도 찬조 출품을 해서 잡지가 근대 문학과 문화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5) 원고 전시(여원사), 화보 전시, 도서제작 과정 전시 등 다양한 자료 전시회가 이때 함께 개최되었다.6) 한말부터 발간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문학 작품의 발표 무대이자 외국의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창구 역할을 맡았던 다양한 잡지를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귀중한 잡지를 체계적으로 수집 보관한 백순재라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백순재 선생은 잡지와 출판물 등 문화유산이 여러 곳에 흩어져서 소재를 알기도 어렵고, 그 소중한 가치를 모르는 상황에서 훼손 또는 산일(散逸)되고 있는 현실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잡지·출판물 수집 국가기관 설립 주장 자료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모으고 연구한 사람만이 실감할 수 있는 가슴 아픈 실정이었다. 그래서 서지 전반을 관장할 국가기관으로 ‘한국문화연구원’을 설립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범국민적인 서지학 진흥을 위한 단체를 결성할 것을 제창하는 글을 기회 있을 때마다 신문에 기고하고 인터뷰 때도 이를 강조했다.7) 민족문화의 자주성을 확보하고 앞날의 영광된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근대사 자료센터의 설치가 시급하다는 점을 그는 되풀이해서 제창했다.8) 일본에서는 1908년경 메이지 연간에 발간된 신문과 잡지를 수집하고 도쿄대학에 ‘메이지신문잡지문고’라는 부설 기관을 설립하여 문화사적인 의의와 자료적 가치를 크게 평가하고 있는 데 반해서 우리는 이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개탄했다.9)

백순재 선생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잡지수집가이자 연구가로는 김근수(金根洙, 동국대·수도여자사범대·중앙대 교수)와 하동호(河東鎬, 공주사범대·홍익공전 교수)가 있었다. 김근수 교수가 수집한 잡지는 1,000여 권이었고, 시집은 700여 권으로 시집만으로 따진다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수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10)

김근수 교수는 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6권의 신문·잡지 관련 자료집을 편찬했다. 광복 이전 자료집인 『한국잡지 개관 및 호별 목차집』(1973)과 광복 이후 편인 『한국잡지 개관 및 호별 목차집: 해방 15년』(1975)이라는 방대한 두 권의 편저서를 만들었고, 여러 편의 잡지사 관계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문들을 모아 『한국잡지사』(한국학연구소, 1980)와 『한국 잡지 표지에 의거한 한국잡지연표』(1991)를 엮었다. 하동호 교수는 한국 근대시집을 주로 모았는데, 2,000여 권의 시집을 소장했다.11) 논문과 저서로 <한국 현대시집의 書誌的 고찰-일제 연간 및 6·25동란까지의 간행본을 중심으로>(『신동아』 1967년 2, 3, 4월호), <한국근대문학의 書誌연구>(1981. 11 초판/1985. 4 재판, 깊은샘)가 있다.

서지학자들은 1968년 무렵에 한국서지연구회를 발족시켰으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일제치하에 결성된 서물동호회(書物同好會)는 일본인들이 주도한 모임이었는데 회지 『書物同好會會報』를 20호(연 4회간, 1938. 7~1943. 12)까지 발간하였다. 광복 후 이병도(李丙燾), 이재욱(李在郁)이 주도한 ‘조선서지학회’(1947)를 거쳐 ‘한국서지학회’(1959)가 발족하여 『한국서지』를 3호까지 발행했다. 한국서지학회는 김두종(金斗鍾), 이겸로(李謙魯), 황의돈(黃義敦), 민영규(閔泳珪), 이병기(李秉岐)와 같은 쟁쟁한 학자가 회원이었으나 4·19 후에 와
해되어 한동안 공백기를 거치다 1968년 무렵 한국학붐의 자연적 추세와 귀중 도서의 해외유출 사태에 자극되어 ‘한국서지연구회’를 발족시켰다. 김약슬(金約瑟), 강주진(姜周鎭), 백순재(白淳在), 백린(白麟), 심우준, 안춘근(安春根), 이광린(李光麟), 천혜봉(千惠鳳), 임종순(任鍾淳), 이병주(李丙疇)가 회원들이었다.12) 이들은 『서지학』(1968년 창간)을 발간하여 정보를 교환하고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1982년 6월에는 ‘고서동우회’가 창립되었다. 회장 안춘근, 부회장은 하동호·여승구가 맡았다. 정기간행물 『서지연구』를 창간하여 창립 10주년이었던 1992년에는 9집까지 출간하였고 일본인들이 부산에서 발행한 『조선신보』의 발굴 영인, ‘개화기 도서전’ 개최(1984. 6) 등의 사업을 벌였다.

조선일보 1975년 8월 6일 자에 실린 백순재 씨 발굴 ‘이상의 처녀장편 12월 12일’ 기사.


필사본・신소설・잡지 세 부류 수집

1966년에는 백순재 선생의 장서가 1만여 권을 훨씬 넘었다. 그는 자신의 장서를 세 부문으로 대별했다. 첫째는 조선조 시대의 각종 필사본. 백순재 선생이 최세진(崔世珍)의 번역 노걸대로 추정되는 『노걸대』상권을 발견하여 남광우(중앙대) 교수가 이를 고증, 공개한 적이 있다.13)

둘째, 신소설 100여 종.선생은 문학 관련 자료를 많이 발굴했다. 1968년에 전광용·송민호·백순재 세 사람 공편으로 『한국신소설전집』(을유문화사) 10권을 편찬했는데, 이인직· 이해조 등의 작품을 현대문으로 풀어서 수록한 전집이었다. 1974년에 출간된 『현대 한국단편문학전집』(문원각)에는 작고 작가 32명의 단편 500여 편을 수록하면서 이전에 어느 전집에도 수록되지 않았던 작품을 새롭게 발굴하여 포함시켰다. 대부분 백순재 선생이 찾아낸 유작들로 한국 문학의 양적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14)
이상(李箱)의 첫 작품이자 장편소설인 「12월 12일」이 총독부 기관지 『조선(朝鮮)』에 연재(1930. 2~12·9회)된 것도 백순재 선생이 찾았다.15)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진 이인직의 『혈의 누』보다 8년 먼저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에 실린 「요화(妖畵)」를 비롯하여 여러 편이 있었던 사실을 밝히면서 「신소설의 통설은 옳은가」라는 글을 『한국문학』(1977.
2)에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16) 이어서 같은 잡지 4월 호에는 이인직의 장편소설 『강상선(江上船)』을 발굴하여 이인직 연구에 새 자료를 제공했다. 이 밖에도 선생이 발굴한 문학 관련 자료는 많다.


목록 작성·총서 편찬 등 다양한 활동

셋째, 잡지였다. 장서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수집품은 역시 잡지였다. 광복 이전의 잡지는 우리 민족의 저항 정신이 담긴 총화라 할 수 있었다.17) 선생이 수집한 잡지는 근대 역사와 문학, 문화사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에 『개벽』 완질을 소장한 사람은 백순재 선생이 유일했다.18) 개벽은 1970년에 영인본을 출간하였고, 선생이 만든 목차를 활용하여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 제공 되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그는 잡지 수집에 많은 애로를 겪었다. 고서점에서 자신이 수집하지 못했던 잡지를 입수하면 부인 몰래 감추어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 어렵사리 수집한 자료를 보관하는 일도 그의 또 다른 애로였다. 동대문구 이문동 외국어대학교 길 건너편 골목 안에 위치한 한옥에 보관하자니 장소가 협소했다. 라면 상자에 넣어둔 채 제대로 정리할 수 없어서 활용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68년 11월 호 『신동아』는 다음과 같이 그의 애로를 소개했다.

백씨의 집은 흡사 사설 도서관. 방마다 책이 가득 차 있다. ‘가난한 월급쟁이’ 형편에 그나마 모든 재력을 잡지 수집에 들이다 보니 그에게는 7,000권의 책을 정리해 놓을 만한 책장도 서재도 없다. 그의 거실이자 서재인 두 칸 반짜리 한쪽 벽이 지난 비에 무너져 귀중한 책들이 흙탕물에 젖었다. 화재도 무섭고 쥐도 두렵지만 책을 달리 ‘우대’할 방도가 없어 안타깝다.

현대사 정리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자료가 정비되지 않은 탓이라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연구열이 강했다. 그 증거로 합방 전에 출간된 한국 관련 책자가 많을 뿐 아니라 조선총독부 시절 중추원에서 만든 조사 자료와 만주 침략을 위한 만주철도 도서실 설립 등을 살펴보면 문화 침략의 치밀함과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현대사 연구의 기본 자료는 바로 신문과 잡지인데 이를 수집 보관하는 사업에 너무 소홀하다는 것이다.19) 백 선생은 잡지의 목차 작성에도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다. 1966년 9월에는 하동호 교수와 공동으로 『개벽』지의 총목차를 작성했다. 잡지 목록은 발행 당시의 지적(知的) 풍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조감도이면서 연구자들의 노력을 크게 줄여 주는 길잡이이자 나침반 역할을 한다.

작품 연구, 작가, 정치인, 학자 등의 인물을 연구할 때에도 가장 먼저 찾는 유용하고 귀중한 자료가 잡지다. 한국의 근대와 현대 문학사는 잡지 문학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잡지는 신문학(新文學)의 산실 역할을 해 왔고, 공헌한 바도 컸다고 백 선생은 강조했다.20) “잡지의 정리는 한국 근대사상의 광맥을 탐사하는 것”과 다름 없다거나,21) 문학사 연구는 신문과 잡지를 자료로 활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개벽지 총목차』(국회도서관, 1966)에 이어 선생의 잡지 목차 정리 작업은 계속되었다.

『한말잡지목차총록:1896~1910』(국회도서관, 1967. 9)은 도쿄 유학생들이 발행한 『친목회회보』(1896)로부터 29종의 잡지와 이 기간에 발행된 여러 단체 『회보』 등의 모든 목차와 소장자 일람까지 수록하여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었다.

『동광(통권 40호) 신동아(통권 59호) 총목차』(국회도서관, 1969)도 편찬했다. 백 선생은 이 두 잡지가 ①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발행되었으며, ②판매와 보급을 확대하여 독자와의 거리를 좁혔고, ③ 민족의 공기(公器)로서 대변지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했다.

언론 전문지 「신문춘추」


잡지사·문학사·근대사 연구의 광맥

『조선총독부월보 및 彙報 목차색인』(국회도서관)도 일제 강점기 연구에 필요한 총독부가 발행한 자료이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백순재 선생은 수집한 자료를 전시하여 일반인들이 잡지
의 실물과 처음 발표되던 당시의 문학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하면서 자료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하여 교육적인 효과도 거두었다. 1967년 제11회 전국도서전시회는 신시(新詩) 60주년을 기념하여 백순재·하동호 두 수집가의 소장 자료로 ‘시집 전시회’를 열고 6·25 전쟁 이전까지 발간된 창작 시집과 번역 시집 245종을 전시했다. 최초의 창작 시집은 김억의『해파리의 노래』(조선도서, 1926)였고, 첫 번역 시집 역시 김억의 『오뇌(懊惱)의 무도(舞蹈)』(광익서관, 1921)라는 사실도 이 전시회를 통해 알려졌다.

1971년 11월 1일부터 국립공보관에서 개최된 대한출판문화협회 제15회 전국도서전시회 ‘한국출판 90년전’에도 백순재 선생은 출품했다.

안춘근·하동호가 소장한 장서와 함께 1883년부터 광복되던 1945년까지의 귀중 도서 65종이 전시 되었다. 백 선생은 1978년에 아세아문화사가 기획한 『한국개화문학총서』, 개화 전후의 근대사상을 총정리한 『한국 근대사상총서』(한국학문헌연구소) 등 한말에서 일제 치하의 자료 정리와 출판 작업의 자료 제공자이면서 고증을 담당하는 최고의 전문가였다.

백순재 선생이 수집한 자료 가운데 『한성주보』다섯 호(한 호는 불완전)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에서 영인과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지난 4월 호에 썼다(현대사 속의 언론④). 백 선생이 수집한 잡지 가운데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언론 전문지도 관훈클럽에서 영인하기로 되었다.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은 1992년 9월에 「언론전문지 총서」를 발행한 바 있다. 기금이 영인 출간한 언론 전문지는 일제 치하의 『철필』(4호:1930~1931), 『호외』(1호:1933. 12), 『쩌날리즘』(1호:1935. 6) 세 잡지와 광복 직후에 창간되어 6·25 전쟁 전까지 발행된 『신문평론』(4호:1947~1949), 1950년대에 관훈클럽이 프린트판으로 발행한 『회지』(2호:1957~1959)를 포함한 5종이었다. 일제 치하에 발행된 잡지 3종과 광복 이후의 잡지 2종을 영인하여 3권의 책으로 묶은 영인본을 출간한 것이다.

영인본을 발행하던 때까지는 실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신문춘추』(1928년 9월), 『평론』(1936년 1월), 그리고 『신문평론』(1947년 4월 창간) 통권 5호와 6호가 아단문고에 소장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묶어 1992년에 영인한 「언론전문지 총서」의 보유 편으로 발간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한국 잡지사를 정리한 인물로 고인이 된 출판·잡지인 최덕교(崔德敎) 사장이 있다. 그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 대구에서 중고생 종합잡지 『학원』이 창간된 직후 12월에 입사하여 이듬해 7월에 편집장이 되었고, 그 후 주간을 거쳐 대입 수험지 『향학』(1957년 5월)과 학원사 판 『대백과사전』(1958년 9월) 편찬주간을 맡았다. 1959년 3월에는 학원사 부사장과 일간 『새나라신문』(1960년 9월) 주간을 역임하는 등 잡지인으로 활약했다. 1963년 5월에는 도서출판 창조사를 설립하여 출판사를 운영했다.

한국 잡지사의 산증인으로 통했던 최덕교 사장은 1997년 5월부터 잡지협회 기관지 『잡지뉴스』에「한국잡지 100년」을 연재하면서 잡지사 정리에 손대기 시작하였다. 2001년 6월 호까지 잡지의 역사 40회를 연재한 다음에 3년여에 걸쳐 이를 보완하는 작업에 매달린 끝에 2004년 5월 3권으로 된 『한국잡지 100년』(현암사)이란 제목의 대작을 펴냈다. 나이 77세에 완결한 이 책에는 1896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잡지 『대죠션독립협회회보』에서 시작하여 1953년 휴전 때까지 출간된 384종의 잡지를 66개 장으로 분류하여 각 잡지의 창간호를 중심으로 서지 사항을 밝히고 창간 취지와 목차, 주요 기사 등을 소개하였다. 200자 원고지로 8,500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잡지 표지와 인물 사진 등 570여 종의 도판도 곁들였다. 최덕교 사장은 이 자료집 정리를 위해 여러 도서관을 이용했는데, 백순재 선생 수집 장서인 아단문고를 가장 많이 활용했다.


1927년 발행 조선일보 잡지도 햇빛

최덕교 사장의 『한국잡지 100년』이 나온 뒤 주간조선의 이범진 기자는 1927년에 조선일보에서 『신조선』이라는 잡지를 발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선일보에도 없는 잡지의 실물이 아단문고에 있는 것을 알고는 이를 기사화(주간조선, 2004. 7. 6)하고 조선일보(2004. 7. 7)도 크게 보도한 다음에 영인본까지 발행하였다.

백순재 선생이 수집한 잡지와 자료는 이처럼 사
후에도 소중하게 활용되고 있다. 앞으로도 그가 수집한 자료는 영원히 국가적인 문화유산으로 남아 많은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주>
1) 「백순재 씨 수집품 323종 언론전문지 등 구잡지 전시」, 『기자협회보』, 1972. 11. 10.
2) 김진홍, 「고서점, 흩어진 어제의 행적 되모아 내일을 창조한다」, 동아일보, 1971. 2. 27.
3) 구건서, 「흘러간 만인의 베스트셀러」, 경향신문, 1973. 3. 31.
4) 잡지사의 한 자료 책 속에 파묻혀 사는 백순재 씨」, 경향신문, 1963. 7. 17.
5) 「두 개의 도서전시회」, 경향신문, 1963. 9. 25.
6) 「출판물 특수전시회」, 경향신문, 1963. 9. 11.
7) 백순재,「인멸 직전의 위기에서 외면할 수 없는 서지 부문/ 아쉬운 자료센터, 고서 보존 대책을」, 경향신문, 1965. 9. 22.
8) 백순재, 「근대사료 센터를 설치하라」, 경향신문, 1966. 3. 23.
9) 백순재,「가시밭길의 피어린 발자취, 잡지 60년」, 동아일보, 1968. 12. 12.
10) 「무단정치시대의 잡지개관 출간」, 동아일보, 1968. 8. 1.
11) 김진홍, 「고서점, 흩어진 어제의 행적 되모아 내일을 창조한다」, 동아일보, 1971. 2. 27.
12) 「국학발전에 디딤돌, 한국 서지학의 오늘과 내일」, 경향신문, 1969. 7. 9.
13) 남광우, 「번역 노걸대 卷 上, 새로 발견된 최세진 저」, 경향신문, 1972. 11. 13: 「최세진의 번역 노걸대 발견」, 동아일보, 1972. 11. 10.
14) 「묻혀 있던 일제하 작가 등 발굴, 현대 한국문학전집」, 동아일보, 1974. 5. 3.
15) 「이상의 첫 장편소설 ‘12월 12일’ 발견」, 경향신문, 1975. 8. 5:「이상 연구에 새 전기」, 동아일보, 1975. 8. 6: 조선일보,「이상의 처녀 장편 ‘12월 12일’ 서지 연구가 백순재 씨 발굴」
16) 「최초의 신소설은 ‘혈의 누’가 아니라 작자 미상의 ‘요화’다, 서지학자 백순재 씨 주장」, 동아일보, 1977. 1. 12.
17) 「장서가와 稀書 5, 백순재 씨와 해방 전 모든 잡지」, 경향신문, 1966. 3. 16.
18) 「개화기의 두 잡지… 창조, 청춘 전질 영인 출간」, 동아일보, 1970. 4. 21: 「개벽지 영인 완간」 동아일보, 1970. 6. 6.
19) 백순재, 「현대사 정리와 잡지」, 동아일보, 1966. 9. 15.
20) 백순재, 「측면으로 본 新文學 60년」, 동아일보, 1968. 2. 10.
21) 「근대사상 캐내는 잡지 정리」, 동아일보, 1970. 11. 2.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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