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상>

박지환 한국IT기자클럽 편집장



온라인 매체인 아이뉴스24는 기존 오프라인 매체의 온라인 뉴스보다 한 발 뒤늦은 2000년 3월 온라인 뉴스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아이뉴스24가 설립됐을 당시 소속 기자들은 취재가 쉽지 않았다.
오프라인 매체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뉴스24는 실시간으로 이슈 현장을 발로 뛰는 전략을 수립했다.



“인터넷 신문 최초로 정부 기자단 가입.”, “IT CEO들이 가장 즐겨 읽는 신문.”

1999년 12월 설립 이후 ‘누구라도 쉽게 정보를 얻고 소통하는 정보 평등의 미디어 구현’이라는 이념을 추구해 온 ‘아이뉴스24’의 위상에 대한 단적인 설명이다.

온라인 매체인 아이뉴스24는 기존 오프라인 매체의 온라인 뉴스 서비스 시기보다 한 발 뒤늦은 2000년 3월 온라인 뉴스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매체들은 1995년 중앙일보를 필두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이 아이뉴스24 창간 전부터 인터넷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매체의 경우 종이 신문에 나오는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인터넷 신문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밑바탕엔 그 전해부터 테헤란밸리를 거세게 강타했던 ‘닷컴 혁명’의 거센 물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아이뉴스24도 그 중심에서 있었다.


2000년 기자 10여 명이 모여 창간

하지만 아이뉴스24가 설립됐을 당시 소속 기자들은 취재가 쉽지 않았다. 기자들의 대다수가 오프라인 뉴스 매체 출신이었지만 온라인 매체의 출현에긴장한 오프라인 매체의 강력한 견제를 받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시시콜콜한 개인사까지 얘기를 주고받던 선후배 관계였지만 어느 순간 그 관계가 급랭한 셈이다.

열악한 취재 현장의 상황은 아이뉴스24 기자의 각오를 다지는 ‘담금질’의 시대였다. 오프라인에서 축적한 오랜 취재 경험을 가진 베테랑 기자였지만 알려지지 않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뉴스를 내보낸 뒤의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오프라인 매체에서 축적한 취재 경쟁력과 뉴스 작성 능력은 오래지 않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불과 10여 명에 불과한 기자들이 창간을 주도한 아이뉴스24는 결국 이슈 현장을 발로 뛰는 전략을 수립했다. 현장 뉴스를 실시간으로 제공, 독자들에게 시시각각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며 인지도를 높이기로 방향을 정한 것.

아이뉴스24가 출범하던 2000년 3월 20일은 골드뱅크의 주총이 예정돼 있었다.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콘셉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골드뱅크가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면서 모든 매체들이 이날 주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물론 신생 매체인 아이뉴스24도 설립 이후 첫 사건이었던 만큼 취재 역량을 집중했다. 기자 두 명을 급파해 ‘현장 중계’ 형식으로 기사를 처리했다. ‘골드뱅크 경영권 다툼 기자회견 현장’이란 제목의 그 기사는 당시로선 하나의 파격이었다.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던 기존 오프라인 매체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시도였다.

아이뉴스24 홈페이지 모습.


실시간 전송 현장 뉴스로 폭발적 반향

사실 ‘이게 무슨 기사야’라는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뉴스의 ‘현장’ 뉴스를 접한 대다수 기자들과 독자들은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주총에서 무슨 내용이 얘기되는지에 촉각이 집중돼 있던 독자들에게 현장의 생생한 뉴스를 제공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했다. 내부적으로도 사기가 충만했다. 그럴듯한 동영상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기사였지만, 골드뱅크 주총 기사가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향을 얻으면서 기자들도 한번 해보자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아직도 아이뉴스24 창간 당일 몸담았던 기자들은 “골드뱅크 주총은 인터넷 신문 아이뉴스24의 탄생을 축하하는 멋진 사건이었다”고 회상한다. 이후에도 아이뉴스가 인터넷을 통해 쏘아올린 특종들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4·15 총선을 불과 닷새 앞둔 2000년 4월 10일. 박지원 문화부 장관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공식 발표한 것.

박 장관이 남북 정상회담 사실을 공식 발표할 무렵 아이뉴스24 사이트에는 ‘정부, 남북 정보통신 협력 추진’이란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정상회담 발표 하루 전에 ‘남북 정보통신 협력’이란 특종 기사를 미리 내보낸 것이다. 물론 당시 아이뉴스24 편집진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후 이 기사는 박지원 장관의 남북 정상회담 공식 발표 이후 ‘남북 통신협력 급물살 탄다’로 제목이 바뀌면서 한 발 앞서 나갔다.

초기 아이뉴스24를 널리 알려준 특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데이콤의 한국인터넷데이터센터(IDC)에 들어와 있는 일부 서버가 해커들의 경유지로 사용되고 있다는 기사를 비롯해 남북 간 인터넷 전화가 가능하다는 소식 역시 아이뉴스24가 초기에 일궈 낸 특종들이다.

물론 사실에 근거한 아이뉴스의 대특종을 오프라인 매체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오프라인 기자들이 무시하던 온라인 매체의 기사를 지면에 적극 반영했다. 전혀 생소한 아이뉴스24라는 매체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독자나 투자자, 업계 관계자들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기사 질 자신감 바탕 유료화 모델 전환

초기 닷컴 혁명을 이끌었던 수많은 인터넷 기업들은 ‘돈 버는 일’에는 상당히 서툴렀다. 당시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던 새롬, 골드뱅크 같은 기업들도 사실상 돈을 벌지 못했다. 단지 참신한 아이디어로 많은 투자자들의 지갑을 열었을 뿐이었다. ‘콘텐츠와 커뮤니티만 확실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식이 잘못된 것이란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같은 사례는 해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투자금만으로는 직원들의 월급을 비롯해 각종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온라인의 월스트리트저널’로 통했던 ‘더스트리트닷컴’(The street.com)이 몰락을 길로 들어섰다. 차별화된 보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APB뉴스도 쓸쓸하게 사라져 갔다.

온라인 뉴스 매체인 아이뉴스24도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뉴스24가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시도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콘텐츠 유료화였다. 특히 퀄리티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매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콘텐츠 유료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인터넷 신문 중 콘텐츠 유료화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월스트리트저널인터랙티브(WSJIE)다. 전면 유료로 운영되고 있는 월스트리트저널 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해선 종이 신문 구독자는 연간 39달러, 비구독자는 연간 79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 온라인 뉴스 유료 회원은 종이 신문 구독자 40만 명을 포함해 총 70만 명에 이른다. 반면 월스트리트저널 종이 신문 구독자는 180만 명이다. 온라인 뉴스 서비스 제공사업으로 큰돈을 만지기 힘든 상황이다.

전면 유료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월스트리트 저널인터랙티브와 달리 살롱닷컴은 일부 유료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살롱 프리미엄 서비스는 1년 30달러, 2년 50달러로 책정돼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아이뉴스24는 2001년 9월 17일 ‘콘텐츠 유료화’ 대열에 동참했다. 구체적으로는 살롱닷컴형 일부 유료화 모델이다. 별도 프리미엄 섹션에 유료 기사를 모아 놓았다. 기업 회원과 개인 회원으로 나눠 마케팅하고 있으며, 아이뉴스24 수익의 주요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뉴스는 공짜’라는 독자들의 심리가 워낙 강한 탓에 월스트리트저널 외에는 ‘돈 되는 콘텐츠’를 만드는 업체들은 드물다. 하지만 서서히 ‘좋은 정보는 돈이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인터넷 신문들은 다시 한번 현실의 장벽에 부닥치게 된다. 정간법에 등록된 매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선 후보 인터뷰’ 조차 하지 못했다.

인터넷 언론들에게 뼈아픈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에 영향을 받아 인터넷신문협회란 단체가 출범하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28일 아이뉴스24를 비롯해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머니투데이, 이데일리 등 9개사가 주축이 된 인터넷신문협회가 출범했다. 비로소 본격적으로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신문협회는 출범 첫 행사로 대선후보 합동토론회를 개최, 텍스트와 동영상을 곁들인 차별화된 보도로 많은 유권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저널리즘의 미래는 인터넷에서 알 수 있고 온라인 뉴스는 저널리즘의 주류가 될 것이다”라는 존 캐츠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


포털의 득세, 그리고 다시 찾아온 시련

외형적인 면에서 인터넷 언론이 가장 활기를 띤 시기는 참여정부 출범을 전후한 2, 3년간이었다. 조중동 등 주류 매체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참여정부는 의도적으로 온라인 매체에 힘을 실어 줬으며, 이에 힘입어 온라인 언론들이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언론들의 영광의 시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2003년 무렵부터 뉴스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포털들이 무서운 속도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사용자층을 확보한 포털들은 뉴스 시장을 유통 중심 구도로 탈바꿈시키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다.

물론 포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아이뉴스24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2004년 무렵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불량도시락 파동과 간호조무사들의 신생아 학대 같은 것들은 모두 포털 뉴스 공간을 통해 사회적인 의제로 부상했다.

특히 네이버와 다음이 뉴스 서비스를 본격화하면서 인터넷 언론사들의 포털 종속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그 정도가 심해 포털에 떠 있지 않은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특히 인터넷 신문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포털 사이트에 대한 기사 공급이 매체 접근성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 50.5%의 인터넷 신문사가 긍정적으로 답한 것. 인지도 제고에 도움이 되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54.5%의 인터넷 신문사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미디어다음은 2005년 말 블로거 뉴스를 선보이면서 기존 뉴스 시장에 또 다른 바람을 불러 왔다. 블로거들까지 뉴스 현장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쓰레기 시멘트’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제기하면서 이용자생산콘텐츠(UCC)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줬다.

또 세계 기후 변화, 세계은행들의 문 닫는 시간 취재 같은 굵직한 프로젝트들은 블로거 네트워크의 힘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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