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신문회관(한국프레스센터) 내년 개관 50주년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


5월 5일이면 한국신문회관 개관 50주년이다.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 지금은 20층 한국프레스센터가 서 있는 바로 그 위치다. 서울시청 뒤쪽에서 국회의사당을 마주 보는 태평로 큰길가 명당에 자리 잡은 3층 건물이었다.


‘언론 정화와 지원’ 정책 차원에서 건립

신문회관은 언론계의 힘으로 세워진 건물은 아니었다. 군사정부가 언론 발전을 명분으로 정부 예산 1억 원을 투입하여 지은 건물이었다. 자유당 말기였던 1959년 12월 1일에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회관 건립 문제를 발의한 적이 있었지만 영세한 언론계의 형편에서 회관을 지을 수 있는 여력은 전혀 없었다. 언론인들은 북창동 언덕에 있던 중앙공보관에서 모임을 갖고 1957년에 신문의 날을 제정한 뒤, 언론계의 공동 행사를 준비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언론 단체 가운데 제일 먼저 창립된 관훈클럽은 관훈동 하숙집에서 연구 모임을 가지거나 중국집 회식 자리에서 언론의 발전과 미래에 관해 논의하다 클럽을 결성했다. 1960년에 일어난 4·19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문회관 건립은 엄두를 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신문 통신사의 난립으로 언론의 자체 정화가 시급했던 상황이었다.

5·16 후 군사정부는 ‘언론사 일제정비’를 단행하여 4·19 이후 제2공화국 시기에 난립했던 신문 통신사를 대폭 정비했다. 일간지 76개(중앙 49, 지방 27), 통신 305개(중앙 241, 지방 64), 주간지 453개(중앙 324. 지방 129)가 문을 닫았고 남은 언론사는 일간지 39개(중앙 15, 지방 24), 통신 11개, 주간지 32개(중앙 31, 지방 1)였다. 이와 함께 사이비 언론인을 대거 구속하는 조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6월 28일에는 ‘최고회의 언론정책’을 공포하고 이어서 7월 31일에는 ‘언론정책 시행기준’을 내놓았다. 언론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와 정부가 지원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언론 기업에 대해서는 경영인의 자격과 기업 기준을 정해 실력 없는 언론은 정비하는 한편으로 정비 대상이 아닌 신문에 대해서는 정부가 최대한의 지원과 편의를 도모하여 언론 기업을 육성하고 언론 발전을 기하도록 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신문회관 건립은 군사정부가 제시한 이 같은 ‘언론정책’을 실천에 옮기는 가시적인 사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회관 건축은 공보부 주관으로 속전속결로 진행 되었다. 1961년 11월 15일에 제1차 계획의 공사 입찰 공고를 하고,1) 금강산업이 공사를 맡아 11월 29일 착공하였다는 것을 보면2) 공사 진행을 매우 서둘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신문 터에 현대식으로 설계

부지는 서울신문사 소유였던 568.5평이었다. 서울신문은 일제시대에 지은 사옥 전면에 신축 공사를 진행하던 중에 4·19가 일어나서 시위대가 신문사 건물에 불을 질러 3개월 동안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7월 27일에 속간했다. 그러나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여 1961년 5월 9일부터 휴간에 들어갔다. 일주일 후 5·16이 일어나 언론계는 큰 풍파를 겪고 있었다.

서울신문은 휴간 후 부장급 이상 사원들과 전기실, 기관실, 수위실 등 최소한의 사원을 제외하고는 전 사원에게 휴직령을 내렸다. 신문사는 거의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6월 2일부터는 공보부의 홍보담당 대령 홍천(洪泉)을 부사장 직책으로 파견 근무하도록 임명하여 속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8월에는 공보부가 발행하는 <주간 새나라>를 인쇄하고 대학신문 등 외간 인쇄가 늘어나서 인쇄 시설은 가동할 수 있었다.

서울신문사 전면 대로변 터에 신문회관을 짓게 된 것은 이처럼 서울신문이 어려운 처지에서 휴간 중인 시기에 이루어졌다. 군사정부는 서울신문이 착공했던 터에 약 1억 원을 들여 지상 3층 지하 1층의 건물을 올렸다.3) 일제시대 매일신보의 부지 1,517평을 서울신문이 소유했을 것인데 그중 568.5평을 신문회관에 떼어 주는 결과가 되었으니 신문사 입장에서는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신문회관은 서울신문의 앞을 완전히 가로막아 큰길에서는 신문사 건물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신문사에 들어가는 문은 신문회관 건물 아래를 통과하
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신문사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힐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휴간 중이었던 신문사로서는 군사정부의 결정을 제지할 방법도 없었다. 서울신문은 신문회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 21일에 속간했다.

반세기 전의 기준으로 신문회관은 현대식 건물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설계는 서울대학교 교수 이광로(李光魯)가 맡았고, 다른 건물과 달리 광선을 많이 잡아들이게 했으며 전체의 색채도 밝게 하였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동아일보 1962. 4. 7). 장차 제2차 공사에는 4층 또는 5층으로 증축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옥상에는 증축 때에 사용할 기둥의 철근이 솟아 있는 미완성의 건물이었다.

신문회관은 그 후 당초에 설계했던 증축은 하지 않은 상태로 언론계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문협회, 편집인협회, 기자협회, 신문윤리위원회와 같은 언론 단체가 입주하여 언론인들의 모든 집회가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운동 때도 신문회관을 자주 활용했다.

그러나 1981년 11월 현재의 프레스센터를 새로 지으면서 구 건물을 헐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건물이 되고 말았다. 회관의 운영 주체였던 사단법인 한국언론회관은 한국언론재단으로 확대되었다가 오늘의 한국언론진흥재단으로 바뀌었다. 신문회관 주변에는 큰 건물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3층 시멘트 건물로도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고 신문회관 자리에는 20층의 프레스센터가 위용을 뽐내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는 파이낸스 빌딩과 같은 최신 고층 건물이 새로 들어서 옛 신문회관의 모습은 상상하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프레스센터의 뿌리를 찾다 보면 그 자리는 일제강점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언론이 겪었던 영욕이 상징적으로 축적되어 있는 장소였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신문회관은 일제 치하 총독부의 기관지 경성일보와 매일신문의 사옥으로 사용 되던 터에 세워졌다. 광복 후에는 같은 자리에서 서울신문을 비롯하여 한때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성일보가 발행된 적도 있는 언론의 중심지였다. 6·25 전쟁으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시기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가 실린 좌익 신문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가 발행되던 장소이기도 하다.

총독부 기관지(1924〜1945)→광복 후 해방공간에 여러 신문 발행(1945〜1950)→전쟁 중 좌익 신문의 발행소(1950)→자유당 시절의 여당지(1945〜1960)→신문회관(1962〜1981)→프레스센터(1985〜현재)로 이어지는 회관의 변천사는 기구하다.

매일신보 사옥 신축 기사. 현 프레스센터 자리에 539평 4층 규모의 공장을 건축한다고 밝히고 있다. 매일신보, 1938. 4. 16.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사옥


한·일 강제합방 후에 경성일보·매일신보사 사옥은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에 건립되어 있었다.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거쳐 서울의 얼굴에 해당하는 상징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1913년에 서울시청 자리에 사옥을 새로 짓기 시작하여 한 해 뒤인 1914년 10월 17일 새 사옥으로 이전하였다. 경성일보 사옥이 세워진 시청 자리는 구한말의 경위원(警衛院) 터였다. 서울의 중심에 자리 잡은 사옥 정면에 세워진 첨탑(尖塔)은 당시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는 데 충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15년 11월 18일 화재가 일어나 목조건물 사옥의 태반이 불타 버렸다. 이에 다시 사옥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1916년 10월 1일 공사를 마쳤다. 경성일보는 이를 계기로 10월 3일부터 8일까지 재축낙성기념(再築落成紀念) 특집호를 매일 8면씩 발행했다. 경성일보·매일신보의 사옥은 그 후 1923년 말까지 서울 중심에 자리 잡고 위용을 과시하는 큰 빌딩이었다.

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 프레스센터 자리로 경성일보가 이전하기로 확정된 때는 1923년 2월이었다. 이 무렵 경성부청(서울시청)을 새로 지을 장소를 물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성일보 사옥이 서 있는 장소가 최적지로 지목되었다. 경성일보는 경성부의 요구에 따라 사옥을 경성부청에 양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신 경성일보는 원래 사옥 뒤쪽에 인접한 현재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새로 지어서 이전하기로 경성부와 합의하였다. 경성일보는 사옥 부지 양도가 내키지 않았지만 경성부청을 짓는 사업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옥의 신축과 이전에 소요되는 금액은 용지 매수 보상비 명목으로 경성부청이 25만 엔을 경성일보에 지급하기로 했다.4)

1923년 6월 4일 경성일보·매일신보는 신축 사옥 지진제(地鎭祭)를 올리면서 신축 기공식을 거행했고, 경성일보 자리에 들어서기로 된 경성부청도 8월 23일 지진제를 올렸다. 이듬해 2월 9일 경성일보는 신축 공사가 덜 끝난 상태였지만 서둘러 새 사옥으로 옮겨 신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5) 경성부청 공사를 시급히 진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사옥은 1924년 6월 15일 완공을 보아 ‘관민유지(有志)’ 500여 명을 초청한 낙성식을 가졌다(매일신보, 1924. 6.1, 6. 17.) 지금의 프레스센터 터에 신문사가 처음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이때였다.

경성일보(일본어)와 매일신보(한국어), 서울프레스(영어) 등 3개 총독부 기관지는 이 건물에서 14년 동안 발행되었다. 주변에는 동아일보가 있었고, 경성일보 건너편에 있던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은 광복 후에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큰 건물이었다. 그 옆에 1935년 7월 조선일보 사옥이 신축되어 태평로와 세종로 일대에는 경일·매신, 동아, 조선의 3개 신문사 건물이 솟아 있었다.

1938년 4월에는 매일신보의 사옥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일 강제 병합 뒤에 매일신보(每日新報)는 경성일보에 통합된 형태로 발행되고 있었는데, 매일신보사가 경성일보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주식회사로 출발하면서 경성일보 부지에 속하는 옆자리에 사옥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경성건축사(京城建築社)가 설계와 시공을 맡아 경성일보에 인접한 대지에 공장 시설을 먼저 착공했다. 콘크리트 3층에 건평 592평(지상 3층, 지하 1층 각 136평, 탑옥 8평) 규모였고,6) 5월 4일에는 건물 신축을 알리는 지진제를 거행하였다. 공사비 25만 엔을 들여 이듬해인 1939년 4월 3일 사옥과 공장 설비를 완공하였을 때에는 대지 1,032평에 철근 콘크리트 4층, 건평은 1,029평으로 옥탑까지 포함하면 6층 규모였다. 지하에서 지상 3층까지는 각 196평이었고, 높이는 85척(약 255m)으로 경성부민관을 마주 보는 위치에서 당시로서는 큰 건물에 속했다. 공사가 끝난 뒤의 건물 규모는 당초 계획보다 커져 있었던 것이다. 사옥 신축이 끝난 4월 3일에는 ‘신축(新築) 특집’ 부록 발행과 함께 이를 축하하는 피로연과 봉고제(奉告祭)를 올렸다.
매일신보사가 해마다 주주총회에 보고한 ‘영업보고서’를 종합하여 보면 대지와 건평은 조금씩 늘어났는데 연도별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1년 이후 3년간은 대지와 건물의 평수가 넓어졌는데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 인쇄 시설과 활자를 인수하면서 이를 수용할 공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매일신보는 조·석간 합쳐 하루에 10면을 발행하고, 국민신보(주간), 매신 사진특보(주 3회 화·목·토) 등 3개의 정기 간행물을 발행했다. 국민신보는 “반도의 황민화”를 내건 자매지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폐간 후에는 그 인쇄 시설을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인수하여 인쇄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이 무렵부터는 용지부족으로 지면이 점차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엔 서울신문이 매일신보 승계

광복 후 매일신보의 제호가 서울신문으로 바뀌면서 사옥과 부속된 대지도 서울신문이 승계하였다. 경성일보는 일제 패망 후에도 한동안 발행되다가 12월 11일에야 제호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그동안 미군정청은 경성일보의 시설을 군정청 인쇄 공장으로 활용했다. 군정청은 뉴욕타임스의 전시 해외판 지형(紙型)을 매주 비행기로 공수해 와서 경성일보 시설을 이용하여 1만 5,000부씩 인쇄, 주한 미군에게 배포했다. 그러나 신문 용지가 크게 부족했기에 1946년 7월부터는 발행 부수를 대폭 줄여 일본에서 인쇄한 신문을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에게 배포하기 시작했고 경성일보의 인쇄 시설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경성일보의 인쇄 시설은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안재홍의 한성일보가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1946년 2월 16일 영업국을 광화문 사옥에서 경성일보로 이전했고, 한성일보는 열흘 뒤인 2월 26일 경성일보 사옥에서 창간했다.

조선일보는 복간 당시 서울신문에서 인쇄를 하다가 1946년 3월 5일부터 경성일보에서 인쇄하기 시작했다.7) 미군정청이 1946년 3월 5일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경성일보 재산관리인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이튿날인 6일부터 총무, 편집, 영업 3국을 경성일보사로 옮기고 경성일보의 인쇄 시설에서 발행하였다.8) 경성일보사의 시설과 사옥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성일보 3개 신문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형국이 되어 총독부 기관지 시절 위세가 드높던 경성일보는 3개 신문의 쟁탈물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9)

서울시청 자리에 있던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옥. 1914년 10월 17일에 준공되었으나 이듬해 화재로 첨탑이 소실되었다.(사진제공 정진석)


1946년 8월 1일에는 경성일보사를 ‘서울공인사(公印社)’로 이름을 바꾸고 기구도 쇄신하여 외부로부터 일반 인쇄물도 수주하게 되었다. 이로써 경성일보사는 기구와 명칭이 완전히 사라졌다. 경성일보는 서울공인사로 운영되다 1953년 8월 15일 창간된 코리언 리퍼블릭(현 코리아헤럴드)이 이를 인수하여 그 사옥이 되었다. 현재 프레스센터가 서 있는 서울시청 뒤의 바로 그 자리다.

이상의 과정을 다시 정리해 본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발행되던 사옥은 1924년 6월에 완공된 건물이었고, 광복 후에는 서울공인사로 바뀌었다가 6·25전쟁 후에는 코리아헤럴드 건물이었다. 1938년에는 매일신보가 경성일보에서 독립된 주식회사로 분사(分社)하면서 경성일보에 인접한 같은 지번(地番)에 새 사옥을 지어 입주했는데, 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사가 되었다.

1961년 11월 군사정부는 서울신문 부지에 신문회관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6월에 완공을 보아 언론인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공공의 장소를 갖게 되었다. 외국의 언론인이나 한국을 방문하는 귀빈들이 기자회견을 할 장소로 사용될 수도 있는 시설이었다. 조선일보는 ‘이 나라에 처음 생긴 신문회관의 개관’이라는 사설을 싣고 회관이 건립된 “5월 5일은 우리 신문사(史)에 기록될 의의 있는 날이 될 것”이라고 축하하면서도 이 회관이 신문계 자력으로 건립되지 못하고 정부가 지어 준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제 신문인들은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얻었을 뿐 아니라 친목을 도모할 수 있고, 신문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는 하나의 거점을 갖게 된 셈이라고 기뻐했다.


신문회관 운영은 언론계 자율로

회관 건물은 정부가 마련했으나 운영권은 언론인들로 구성되는 ‘사단법인 신문회관’이 맡기로 했다. 회관 완공을 앞둔 4월 24일에는 서울 북창동에 있던 중앙공보관에서 신문회관 발기인 총회 겸 창립총회가 열렸다. 총발기인 27명 가운데 이날 출석한 사람은 22명이었는데 회관은 언론인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 이날 선출된 임원과 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사장 : 고재욱(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
부이사장 : 김동성(전 합동통신 사장)
이 사 : 김 광섭(경향신문 편집국장) 고흥상(합동통신 편집국장)
장기영(한국일보 사장) 홍종인(조선일보 취체역 회장)
오종식(서울신문 사장) 김용구(신문윤리위 사무국장)
김규환(동양통신 편집부국장)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김용수(UPI 기자)
감사 : 김용전 박용상
사무국장 : 김동극

개관식 행사에서 공보부 장관 오재경은 회관 이사장 고재욱에게 회관의 열쇠를 전달하였다. 정부가 건축한 회관을 언론인들이 운영하도록 일임한다는 상징적인 퍼포먼스였다. 첫해의 예산도 전액 정부가 지급하기로 했다. 신문회관에 입주할 언론단체는 발행인협회, 편집인협회, 신문윤리위원회가 있었다. 그 외에는 사무실을 유지할 여건을 갖춘 단체가 없었다. 관훈클럽은 편협보다 먼저 창립된 단체였지만 회원의 숫자도 적었고, 독립된 사무실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다. 기자협회는 창립되기 전이었다. 개관 직후 5월 17일 열린 제2차 이사회는 각 단체가 입주할 사무실의 배치를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발행인협회 210호실
편집인협회 211호실
신문윤리위원회 207, 208호실
IPI 209호실
PLO 212호실

미완성 건물 신문회관 옥상. 3층 건물인 신문회관은 장차 4층 내지 5층으로 증축할 계획이었다.
증축에 대비하여 옥상에는 철근이 솟아 있었다.
기자협회 서무간사 은해상(왼쪽)과 회계간사 송학엽(후에 사무국장). (사진제공 정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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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 단체는 당시 언론계의 구도를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발행인협회는 신문협회의 전신이고, 편집인협회는 신문방송편집인협회로 명칭이 달라졌지만 차장급 이상의 중견 언론인이 가입할 수 있는 단체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기자협회는 1964년 8월 17일 창립되었으니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기자협회 창립 후에는 신문협회, 편집인협회, 기자협회가 언론계를 대표하는 3대 기간단체로 되었다.

신문윤리위원회는 1961년 9월 12일에 창립되었다. 군사정부는 1961년 5월 23일 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 제11호를 공포하여 신문의 일제 정비를 단행하면서 언론통제 차원에서 언론의 윤리와 책임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해 7월 28일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은 법제사법위원회가 기초한 ‘신문 등 등록법안’을 발표하였다.

“책임 있는 언론의 창달”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법안은 두 가지의 독소 조항을 담고 있었다. 제6조 명예훼손 기사의 게재 금지와 제7조 등록의 취소 조항이 그것이었다. 신문과 통신이 사실이 아닌 기사를 게재하여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였을 경우에는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갖도록 하고, 1년 이내에 3회 이상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기사를 게재하거나 또는 시설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 등록을 취소하도록 규정한 내용이었다. 이 법은 그보다 3년 후인 1964년에 공화당이 국회 통과까지 시켰던 ‘언론윤리위원회법’과 같은 취지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언론계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구성을 서둘렀다. 책임 있는 신문을 제작함으로써 빈발하는 필화 사건을 자율적으로 방지하는 한편 수사 당국이 기사를 문제 삼아 언론에 통제를 가하지 못하도록 언론계가 자체적으로 책임 있는 제작 태도를 지키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해 주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취지였다.

최고회의가 ‘신문 등 등록법안’을 발표한 지 3일 뒤인 7월 31일 편집인협회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회칙(會則)을 인준하고, 1957년 4월 7일 신문의 날을 제정할 때 선언적으로 채택하였던 ‘신문윤리강령’을 개정하였다. 이어 8월 25일에는 대법관을 지낸 변호사 김세완(金世玩)을 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선출하고 9월 12일 신문윤리위원회를 창립하였다.

신문회관이 건립되자 윤리위원회에 2개의 사무실을 배당한 것은 윤리위원회가 상근 사무국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위원들이 모여 제소 사건을 심의할 회의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윤리위원회는 창설 후 처음에는 제소 사건(提訴事件)만 다루었으나 1964년 공화당 정권이 신문윤리위원회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하자 자체에 심의실을 설치하여 전국의 신문을 매일 자율적으로 심의하도록 했다. 언론의 책임과 윤리 문제를 법에 따라 다룰 것이 아니라 언론계가 스스로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외부의 간여를 방지하겠다는 취지였다. 회관 건립 직후에는 윤리위
원회에 심의실이 설치되지 않았지만, 오늘의 언론중재위원회 역할을 수행하는 자율기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국제신문협회(IPI)는 1950년대 자유당 정권 시절 언론자유 투쟁을 벌이던 때에는 강력한 후원자였다. 1956년경부터 IPI에 한국 언론의 국가 단위 가입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언론자유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IPI 가입이 추진된 시기에 자유당 정권이 영구 집권을 위한 언론 탄압을 강행하던 때였으므로 IPI는 한국 신문의 자유를 향상시키고 확보하는 데 강력한 국제적 압력단체 구실을 했으며, 신문의 자유 가치는 크게 발양 선양되었던 것이다.10) 그러나 IPI는 신문회관이 개관된 후 몇 년 동안은 입주하지 않았다. 독립된 사무실을 운영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문회관에 입주한 언론단체는 처음 계획과는 달라졌다.


2층에 입주한 언론 기간단체

언론단체의 사무실은 3층 건물의 2층에 자리 잡았다. 2층의 구조는 건물 가운데 뚫린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10평 정도의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서 입구에서 바라보면 왼쪽인 태평로를 바라보는 쪽에는 신문회관 이사장실(201호)과 회의실(202호)이 붙어 있었고 이어서 도서열람실(203호), 도서실(204호), 신문협회 사무국(205호)과 신문협회 회장실 겸 회의실(206호) 순이었고, 입구에서 남향인 오른쪽 서울신문을 마주 보는 사무실은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신문윤리위원회(207, 208호), 신문연구소(209호), 기자협회(210호), 신문편집인협회(211호), PLO(212호) 순으로 배치되었다.

PLO(Press Liaison Office, Public Affairs Office, UNC/USFK/EA)는 ‘유엔군사령부 신문통신연락실’로 불리는 기구였다. 전쟁 중이던 1951년 3월에 설립되어 국내 각 언론기관 및 한국 주재 외국 언론사와 유엔-미 8군 간의 연락과 협조를 담당하는 기구였다. 유엔군 측 보도 자료를 언론기관에 배포하고 유엔군 기자회견 주선, 판문점 회담 등 행사취재 협조, 유엔군 출입기자증 발급 등을 이 기구가 맡고 있었다(<그림> 배치도 참조). 두꺼운 합판으로 사무실 칸막이를 했기 때문에 큰소리를 지르면 옆 사무실까지 들릴 수 있는 구조였다.


3층은 태평로 쪽에 강당이 있었고, 강당 옆에 소회의실이 붙어 있었는데, 평소에는 회의실로 사용하다 결혼식이 있는 날이면 신부 대기실로도 사용되었다. 서울신문사 쪽 두 개의 소회의실은 신문윤리위원회의 심의실과 기자협회 편집실(302호)로 사용되었다.

기자협회보는 월간 발행 시절 편집간사였던 필자 혼자 2층 210호실 사무국에서 편집을 했다. 1964년 11월 월간으로 창간된 후 전담 편집간사가 없이 조사연구분과위원회가 편집을 담당했는데, 1966년 1월 내가 편집간사로 임명되어 원고 청탁부터 편집까지 2층의 기자협회 사무국(210호실)에서 일관 작업으로 신문을 만들었다. 그런데 1968년 8월부터 협회보를 주간으로 발행하면서 3층의 소회의실을 독립된 편집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앞서 1967년 7월 기자협회가 신문연감 발행을 준비했을 때 302호실을 신문연감 편찬실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연감 발간 사업이 기자협회에서 신문협회로 이관된 후 편찬 작업을 하던 방을 편집실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무실의 배치는 1970년대 중반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주>
1) 동아일보, ‘신문회관 설립, 장소는 미정’, 1961. 11. 16.
2) 동아일보, ‘신문회관 5월 5일에 개관’, 1962. 4. 27.
3) 동아일보, ‘어제 하오 신문회관 개관’, 1962. 5. 6.
4) 매일신보, 1923. 2. 25,: 동아일보, 2. 25. 그러나 실제로 지급된 액수는 25만 5,190엔이었다.
5) 매일신보는 1923년 12월 9일자 ‘사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社移轉, 9일에 新社屋으로. 目下 新築中인 本社 社屋의 竣成은 來春에 在하나 近頃에 至하야 執務에 相違가 無한 程度까지 그 事가 近捗되얏슴으로 九日로써 移轉하겟삽기 玆에 謹告함. 十二月 八日 京城府太平通 一丁目 三十一番地 每日申報社.”
6) 매일신보, ‘신회사 출발 제1보 / 본사 공장을 신축, 地階共 연평592평’, 1938. 4. 16.
7) 조선일보, 1946.3. 5, 사고.
8) 조선일보, 1946.3. 7, 사고.
9) 이에 관해서는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커뮤니케이션북스,2005)에 상세히 다루었다.
10) 박권상, ‘IPI와 한국 신문’, ‘민족과 자유와 언론’, 136-137.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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