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오디션 프로그램 ‘TOP밴드’

김광필 KBS 교양국 프로듀서

지난 5월 예선이 한창 진행 중인 KBS 본관 복도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툭 내뱉는다.

“또 서바이벌이야?”

같은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서 들은 그 한마디에 나는 잠시지만 일할 의욕을 잃었다. 그 직원이 야속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정서이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TOP밴드’는 서바이벌이라는 식탁에 또다시 숟가락 하나를 얹어 놓은 꼴로 시작됐다.

바야흐로 지금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춘추전국시대다. 소재만 다를 뿐 포맷도, 내용도 대부분 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TOP밴드는 후발 주자라 앞선 프로그램들의 내용과 포맷을 피해 가기 쉽지 않았다. 프로그램 횟수가 중반을 넘어섰는데도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TOP밴드는 16강 경연부터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했다. 1 대 1로 붙어 한 팀은 올라가고 한 팀은 떨어지는 방식이다. 코치는 자신이 맡은 밴드를 조련하고 작전을 짠다. 그래서 TOP밴드에선 멘토라는 말 대신 코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 편성 장면. 이 무대에서 6명의 코치가 4팀씩 골라 코치를 맡는다.



월드컵서 아이디어, 1 : 1 승부 진행

16개 밴드팀과 코치가 참여해 조 추첨을 마쳤다. 축구 월드컵만큼은 아닐 테지만 꽤나 흥미진진한 대진표가 나왔다. 16강이 바로 전에 있었던 각조 리그전에서 1위를 한 8팀이 시드 배정을 받았고, 2위를 한 팀들이 복불복으로 순위를 정해 상대를 고르는 방식이다. 대진표가 완성되자 제작진과 참가 팀들은 대체로 만족했다.

토너먼트는 운동 경기에서 이긴 편끼리 계속 겨뤄가면서 최후에 남은 두 편이 우승을 가리는 방식이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대진 운도 따라야 하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 방식이다.

그렇다면 TOP밴드 제작진은 왜 토너먼트라는 운동 경기 방식을 차용했을까?

첫 번째, 기존 서바이벌 프로그램들과의 차별화다. 앞서 얘기했듯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워낙 많아 웬만한 형식은 거의 다 써먹고 없다. 뭔가 좀 새로운 게 없을까? 기획 단계에서 형식에 대한 논의가 지루하게 계속될 때 누군가 월드컵 경기 방식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월드컵처럼 코치가 밴드를 맡아서 경기에 나서며, 밴드가 탈락하면 동반 탈락하는 것이다. 코치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혼신을 다해 밴드를 조련해야 한다. 그 아이디어는 바로 채택됐다. 이유는 신선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밴드는 무대 교체의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밴드는 맴버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자기 악기를 지니고 무대에 올라야 하기 때문에 세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생방송을 감안한다면 무대 교체는 그렇게 자주 이뤄질 수 없다. MR를 틀어 놓고 하는 일반 보컬의 무대와 상황이 다르다. 잦은 무대 교체는 방송 사고의 위험도 있지만 연주의 퀄리티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8강 부터 한 팀씩 떨어져 나가는 일반적인 경연 방식은 밴드 서바이벌에는 적절치 않은 측면이 있다.

일부 시청자들은 토너먼트 진행에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실력 있는 팀들이 일찍 만나 빨리 탈락하는 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은 우리도 충분히 이해하고 고민했던 부분이다.

그런 반면에 토너먼트가 좋다는 사람도 많다. 포맷이 새롭다는 것과 서바이벌의 긴장감이 잘 살아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얼마 전에 스웨덴에 있는 한 인디밴드 블로거가 트위터를 통해 질문을 해 왔다. 그동안 TOP밴드를 쭉 지켜봤는데 흥미롭다며 앞으로 진행 방식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우리는 나름대로 토너먼트 진행 방식에 대한 답을 써 보냈다. 하지만 밴드를 놓고 토너먼트를 한다는 것의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는 자못 우리들도 궁금하다.


예선 660팀 촬영 테이프 수만 1,000개

TOP밴드가 10회 방송할 때 모 케이블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첫 방송을 내보냈다. 그 다음 날 포털은 온통 그쪽 얘기로 도배를 했다. 토요일은 TOP밴드가 장사하는 날인데 우리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없었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느낀 소회 중 하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경험 없는 자가 경험을 축적한 자를 이길 수 없다는 상식적인 진리였다. 그동안 우리가 헤매 왔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TOP밴드 오디션에 신청서를 낸 밴드는 대략 660팀 정도. 우리는 모든 팀을 스튜디오로 불러 오디션을 봤다. 밴드 오디션은 여타 오디션과 달라 모든게 더디게 진행됐다.

악기 세팅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한 시간에 4팀 정도밖에 예심을 볼 수 없었다. 하루 12시간 예심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약 50팀. 4군데 스튜디오에서 동시 진행하면 약 200팀, 줄창 3일 동안 진행해야 600팀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다. 심사위원만 27명이 교대로 진행했던 3일간의 예심으로 KBS는 이산가족 방송 이후 또다시 최고로 들썩거렸다. 평균 4~5명으로 이루어진 밴드 구성상 카메라도 많이 필요했다. 스튜디오마다 카메라 6대를 슬레이트 쳐서 동시에 촬영하다 보니 촬영 원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3일간의 예심을 모두 끝내자 촬영 원본 테이프 수가 1,000개를 넘어섰다. 방송 일까지 남은 시간은 3주인데 인제스트하는 데만 10일이 걸렸다. 하지만 편집을 위해선 프리뷰도 해야 하고, 멀티 화면으로 배열도 해야 했다. 결국 방송 1주일 전에 70분 ENG 방송의 첫 편집 컷을 붙일 수 있었다. 우리가 너무 무모하게 덤빈 것이다.

만약 1차 예선에서 비디오 심사를 통해 일부를 걸렀다면 어땠을까. 내가 가끔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또 하나, 우리는 1차 예선에서 모두 200팀이나 합격시켰는데 이건 결과적으로 예선을 또다시 시작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원래 계획으로는 1차 예선에서 50팀으로 줄이는 걸로 돼 있었는데 그걸 못한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모질지 못한 탓도 있지만 실력을 갖춘 팀들이 예상 외로 많았다. 2차 예심이 필요해진 상황이다.

그래서 경기도 양주의 야외무대에서 3일 동안 2차 예심을 보기로 했다. 하루 70팀을 소화해야 했는데, 1차 예심처럼 한 시간에 4팀씩 보면 하루 17시간 걸린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악기 세팅 시간을 줄이기 위해 두 개의 슬라이딩 무대와 300초 룰이다. 밴드 참가자와 제작 스태프 등 700여 명이 몰리자 현장은 통제 불능이었다. ‘밥 달라, 물 달라, 화장실 어디냐, 도대체 언제 끝나느냐….’

양주에서의 2차 예심 녹화 첫날, 중간에 녹화를 끊을 수가 없어서 새벽 2시에 모든 스태프가 저녁을 먹는데 너무 지친 나머지 식사 내내 아무도 말이 없었다. 두 번째 녹화 날 마지막 밴드 공연이 끝났을 때 멀리 산 너머로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그렇게 3일을 보내고 나니 촬영 테이프는 600개. 중계차 감독 왈 “20여 년 중계차를 탔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마지막 날은 정말 새벽 4시까지 경연을 했다. 새벽이슬이 내려 악기 연주에 지장이 생기고 보컬은 목소리가 잠겼다.

그렇게 예선을 두 번 치르다 보니 여타 프로그램처럼 음악 외에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남아 있는 팀 수가 너무 많았다. 프로그램은 중반을 넘어섰는데 밴드 멤버들의 구구절절하고 살가운 이야기가 못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밴드 숫자 줄이기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탑밴드 예선을 위해 KBS홀 앞 광장에 모인 밴드들.


양주 2차 예선에서 심사위원들은 낮에는 뙤약볕, 밤에는 한기와 이슬을 맞아 가며 꼬박 3일간 심사를 해야 했다.



시청률 고전 불구 마니아층 점점 늘어

TOP밴드는 KBS 2TV 토요일 밤 10시 황금시간대에 방송된다. 그렇지만 시청률은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 다른 3개 채널의 드라마 시청률을 합치면 50%를 넘는 상황에서 TOP밴드는 6%대에서 점점 떨어져 지금은 4%대를 기록 중이다.

악조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TOP밴드지만 우리를 힘나게 하는 이들이 있다. 마니아 시청자들과 트위터들의 뜨거운 반응이다. TOP밴드에 무한 애정을 보내는 지지층은 여기저기서 점점 늘고 있다.

프로그램 홈페이지에는 황송하기 그지없는 글들이 끊임없이 오르고 있다. ‘오늘도 본방 사수’나 ‘제작진 힘내라’ 등등은 일반적인 의견에 속하고, ‘KBS 개국 이래 최고의 프로그램’, ‘수신료가 아깝지 않다’, ‘모금이라도 하자. 포털 메인 화면에 톱밴드 광고 띄우게’ 등등 우리 손가락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글들이 계속 오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에는 여기저기 웹질을 하다 디시갤이란 곳에 들어갔다. 전에 음악 관련 사이트를 뒤지다 알아낸 곳이다. 디시인 갤러리는 디지캠 전문 사이트로 시작해 이제는 인터넷 트렌드와 이슈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다. 사이트 수도 많지만 장르도 다양해 어지간한 TV 프로그램들은 거기 다 있다. 특히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모두 다 방 하나씩은 차지하고 있다.

TOP밴드는 거기서도 무명의 설움을 겪고 있었다. 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거기서 나는 희한한 일을 목격했다.

그동안 TOP밴드 팬들은 방을 갖지 못한 무주택자들이었다. 모여 대화할 곳이 없는 이들이 찾아들어간 곳이 나가수갤이었다. 금요일이 되면 하나둘 모여들어 토요일 방송 때까지 거기서 지낸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거길 빠져나온다. 그날은 나가수가 방송하는 날이다.

남의 집 장사하는 날, 안방을 차지하고 있을 순 없다. 그런데 나와 봤자 마땅히 갈 곳이 없기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뜨내기 신세로 지내야 했다.

디시갤에 사이트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이트를 개설하기 위해선 신청서를 내고 댓글 수를 웬만큼 채워야 한다. 다들 열심히 댓글을 달지만 아직도 사이트 개설에는 못 미치고 있다.

그래서 찾아낸 곳이 바로 오천만의 대질문이다. 방송이 종료돼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사이트다. 비록 남의 집 문패가 달려 있지만 당분간은 그럭저럭 지낼 만한 곳이다.

TOP밴드 팬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기다렸다는 듯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기 오천만갤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그럴듯한 제안을 했다.

“여기 지낼 만한데…. 우리 디시갤 담당자에게 말해서 이름을 바꿔 달라고 하면 안 될까?”

또 다른 이가 한마디한다.

“아예 우리가 문패를 고치자. 오천만의 톱밴드라고.”

그나저나 이름도 괜찮은데 프로그램 이름을 ‘오천만의 톱밴드’로 바꾸는 것도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 오천만이면 대한민국 사람들 다 본다는 얘기다.

TOP밴드는 지난주까지 10회 방송을 내보냈다. 프로그램 횟수는 중반을 넘어섰는데 시청률은 바닥을 치고 있다. 일부 시청자들은 실망한 나머지 도대체 피디는 지금 뭐하고 있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다들 프로그램이 잘돼서 시즌2까지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프로그램의 편성을 바꾸자는 분들도 계속 늘고 있다. 우리 또한 그 생각을 벌써 여러 번 했다. 그런데 프로그램 편성을 바꾸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봄, 가을 정규편성 때라면 모를까 단지 시청률 때문에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명분이 약하다. 또 프로그램 자리를 이동시킨다고 시청률이 잘 나온다는 보장 또한 없다.

물론 프로그램을 시작할 땐 어느 정도 시청률을 기대했다. 그러나 10회 정도 방송을 내보내며 느낀 건 아직도 밴드음악이 일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이다.

양주 특설무대에서 200팀이 3일간 경연을 펼쳤다. 마지막 날은 새벽 4시까지 진행됐다.


양주 특설 무대에 선 이지애 아나운서.

밴드 음악에도 대중의 사랑 기대

밴드를 살리려는 노력은 코치들이 가장 강하다. 김도균, 정원영, 신대철, 남궁연 씨 등 대한민국 밴드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코치로 나서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신해철 씨와 한상원 씨가 패자부활전을 통해 새로운 팀을 발굴하고 새 코치로 들어왔다. 두 분은 코치 수락에 앞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들었다. 토너먼트이기에 한 번 붙고 물러날 수도 있는 그 위험천만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명예까지 걸려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코치를 수락한 건 밴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밴드가 아니었다면 결단코 그런 선택을 안 했을 것이다.

밴드 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배고프다. 5인조로 구성해 무대에 올라 봤자 하루 저녁에 5만 원도 못 받는다. 5명이 나누면 1만 원꼴이다. 그래서 주경야음을 하고 있다. 한때 게이트플라워즈, 브로큰발렌타인이 프로 논란에 휩싸였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낮에는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그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잘나가는 밴드들도 다들 힘들게 음악을 한다.

대한민국 밴드의 부활이 TOP밴드 프로그램 하나 나갔다고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TOP밴드가 그만한 파괴력을 갖췄다고 보진 않는다. TOP밴드를 변화의 첫 걸음마쯤으로 이해해 주시면 우리도 마음이 편하다.

어쨌든 TOP밴드의 기획 의도는 대한민국 밴드 살리기다. 조금 허황되게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밴드는 문화적 소외 그룹에 속한다. 수많은 밴드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밴드 음악이 스스로의 힘으로 대중의 사랑을 얻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특정 장르의 편중 현상이 심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음악 지형을 바꾸려면 무언가 외부 힘이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많다고 비난하지만 밴드야말로 서바이벌의 덕을 좀봐야 한다고. 서바이벌이 아니었다면 프로그램은 더욱 허덕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TOP밴드가 서바이벌과 만난 건 다행이라 생각한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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