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신문회관(한국프레스센터) 반세기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


1962년 5월 신문회관이 준공된 뒤 먼저 입주한 단체는 발행인협회, 편집인협회, 신문윤리위원회였다. 1963년 1월에는 도서실이 설치됐고, 1964년에는 신문연구소와 기자협회가 입주했다.

한국신문발행인협회는 회관 준공 5개월 뒤인 1962년 10월 13일 새로 창립되는 형식으로 출발하였다. 군사정부가 공포한 ‘최고회의 언론정책’(1962. 6. 28)의 창구 역할을 수행할 경영주 단체로 결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5년 앞서 자유당 시절인 1957년 6월 29일 창립된 한국일간신문발행인협회가 있었다. 일간신문발행인협회는 민주당 정권을 거쳐 군사정부가 들어선 다음 해인 1962년까지 신문 경영과 관련된 협의체 성격을 지니고 운영되었다.


신문협회, 묻혀진 5년 역사 복원

1959년 4월 7일 신문의 날에는 발행인협회가 신문 발행을 하루 쉬기로 결의하여 7일 자 석간과 8일 자 조간은 휴간했다. 그 직후 6월 6일에는 이사회 결의에 따라 월요일 자 조간을 폐지하기로 했다. 편집국 인원을 포함하여 공무국 종사원과 배달원들의 건강과 복지를 배려한 조치였다. 1957년 이후 해마다 신문의 날인 4월 7일은 휴간을 관례화하고, 월요일 조간 발행을 중단하기로 한 것도 발행인협회의 결정이었다.

그런데 군사정부는 기존의 일간신문발행인협회를 해체하고, ‘일간’을 뺀 ‘한국신문발행인협회’로 명칭을 바꾸어 새로운 발행인협회를 창립하도록 하여 언론의 ‘경영주 주도 시대’를 뒷받침하였다. 새로 구성된 발행인협회는 4년 후인 1966년 10월 13일 열린 4차 정기총회에서 명칭을 한국신문협회로 바꾸고, ‘이사장’을 ‘회장’으로 부르도록 정관 일부를 개정하였다. 이리하여 제3공화국, 유신치하, 제5공화국 시절의 언론계는 신문협회를 중심축으로 움직이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군사정부의 언론 정책에 따라 1962년 창립된 발행인협회가 1957년 자율적으로 결성된 일간 신문발행인협회를 계승한 단체였음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신문협회는 46년이 지난 뒤에야 1957년의 신문발행인협회를 창립의 뿌리로 확인하고 그동안 묻혀 있던 5년 역사를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문협회의 역사 되찾기 작업은 2004년 필자가 여러 자료를 통해 밝혀내면서 정설이 되었고, ‘신문협회 50년사’도 필자가 맡아서 집필했다.1)

1975년 초의 신문회관 입구. 언론인들이 모여 언론자유를 외치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옆 건물에 코리아헤럴드의 제호가 보인다. 신문회관 3층 예식부, 지하의 프레스싸롱(다방과 경양식) 간판이 붙어 있다.
사진 제공 정진석




신문회관에 입주한 언론단체들

신문협회(당시 명칭 신문발행인협회)는 신문회관 2층 사무실 2개를 사용하였다. 편집인협회, 기자협회, 신문연구소는 모두 사무실이 하나밖에 배당되지 않았다. 신문회관 입주 언론단체 가운데 운전기사 딸린 승용차를 굴리는 유일한 인물이 신문협회 사무국장이었다. 회관에는 주차 공간이 없었지만 태평로 쪽의 인도에 붙은 회관 앞 공간에 신문협회 사무국장의 차를 주차했다. 신문협회는 편협, 기협, 신문연구소에 보조금도 지급했다.2) 윤리위원회는 신문협회의 보조금으로 운영되다시피 했다. 방송광고공사가 설립되기 전이었고 언론 공익자금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이라 신문협회는 다른 언론단체가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금원이었다.

신문협회가 다른 단체까지 지원할 여력이 있었던 재원은 신문용지를 일괄 수입하여 각사에 배당하면서 회비 형식으로 징수하는 수수료였다. 정부는 신문협회에 신문용지 수입 업무를 대행하는 특혜를 주었고, 신문협회는 수입한 용지를 회원사에 분배하는 이권으로 언론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신문회관도 언론단체에 약간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회관 운영에 따르는 수익금으로 편협과 기자협회가 발행하는 협회보 제작 예산 명목으로 일부를 지원했고, 윤리위원회와 신문연구소에도 보조금을 지급한 것이다.

한국신문연구소는 1964년 3월 창립되었다. 창립에 앞서 1963년 10월부터 신문회관 209호실에서 연구소 설립 준비위원들이 준비 사무에 착수하였다. 홍종인(조선일보·설립준비위원장), 김규환(동양통신), 조세형(한국일보), 박권상(동아일보), 박홍서 (시사통신) 등 5명이 준비위원이었다. 그러나 운영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발족이 지연되던 중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이 100만 원, 동양통신 사장 김성곤과 동화통신 사장 정재호가 각각 50만 원씩 출연하게 되어 연구소의 발족을 보았고, 초대 소장은 홍종인이 맡았다. 3월 12일에는 제1회 신문연구소 좌담회, 같은 달 30일에는 대학교수와 신문인 간담회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4월 7일 월간 ‘신문평론’을 창간하면서 정식으로 출범했다(동아일보, 1964. 4. 4).

그 후 신문연구소는 언론연구원(1981. 6)으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프레스센터, 언론인금고 등 3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언론재단(1999. 4)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2010년에는 기존의 법정 언론단체들을 통합하여 오늘의 한국언론진흥재단으로 발전되었다. <신문평론>은<신문과방송>으로 제호가 바뀌었지만 지령을 계승하여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언론 전문지
이다. 창간 당시에는 월간이었지만, 계간과 격월간으로 발행 간격이 달라졌다가 월간으로 정착하여 내년이면 지령 500호를 발행하게 된다.

신문회관 도서실은 1963년 1월 29일 203호(열람실)와 204호(장서실)에서 개관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편협과 기협을 마주 보는 위치였는데, 열람실은 22석을 갖추고 있었다. 개관 직후였던 3월 29일 한미재단에서 ‘미국의 경제’ 등 42권의 서적을 기증했고, 미국 공보원도 4월 26일 71권을 기증했다. 학원사 사장 김익달(金益達)은 자사 출판 백과사전 등 많은 도서를 기증했다. 언론 관련 서적 190여 권을 회관이 자체적으로 미국에 주문하여 장서는 점차 늘어났다. 1년 뒤에는 1,728권의 장서를 구비했고(신문평론, 1965.2, 10호, ‘신문인을 위한 교양실 신문회관 도서실’), 1968년에는 2,473권으로 늘어났다. 그 가운데 언론 관련 서적은 영어와 일어를 포함하여 190권이었다(‘한국신문연감’ 1968년판, p. 763). 영국의 ‘더타임스’, ‘오브서버’, ‘데일리텔레그래프’, 일본의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등을 정기구독하여 열람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1964년 8월 17일 창립된 기자협회는 8월 23일 신문연구소 옆방 210호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 옆 211호실은 편집인협회였다. 신문윤리위원회도 심의실을 구성하여 1964년 12월 20일 3층 303호실에 입주했다. 언론법 파동의 와중에 기협이 탄생하였고, 윤리위원회는 이전까지 제소 사건만 처리하다 자체 심의위원을 위촉하여 새로 사무실이 필요했던 것이다<그림1>.


 

증축 계획 무산… 지하층에 편의시설

신문회관은 일단 개관하였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그 가운데도 언론인들의 편의시설 마련이 시급했다. 회관은 1962년에 남은 예산 20만 원과 공보부 보조금 40만 원으로 지하에 다방, 식당, 바가 들어설 보수공사를 시작했지만 시설을 완공하기에는 크게 부족하던 차에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보수공사와 난방시설에 쓸 수 있게 450만 원을 지급하도록 지시하여 1962년 말에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경비는 공사가 끝난 후에 다방과 식당 등을 운영할 업주로부터 받을 보증금 150만 원으로 채워 칸막이 공사 등을 마무리하였다.

지하의 프레스 다방과 경양식, 주류 등을 판매하는 살롱 등 편의시설 공사는 이리하여 끝낼 수 있었다. 신문회관은 국회를 마주 보는 곳에 있었고 서울신문사, 코리아헤럴드는 같은 지번(地番)에 인접해있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도 가까운 거리여서 프레스 다방에는 언론인과 정치인, 공무원 등이 많이 드나들었다. 3층 강당은 출판기념회를 비롯한 문화 행사와 언론인들의 결혼식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언론단체가 창립되는 등 언론계의 판도가 달라지면서 회관의 공간 부족 사태가 제기되었다. 1963년 8월 5일 열린 이사회는 회관 확충 문제를 논의했다. 회관 로비를 은행에 임대하고 그 보증금으로 4층과 5층을 증축하여 자체 수입을 올리자는 방안을 안건으로 올려놓았다. 그렇게 되면 10평 이상의 사무실 26개 정도를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증축으로 늘어난 사무실을 임대하면 로비와 사무실 보증금으로 증축 비용 약 900여 만 원을 충당하고도 서울신문과 회관 건축을 맡았던 금강산업에 갚지 못한 부채 450여 만 원 가운데 일부를 청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증축하는 4층과 5층, 지하층의 임대수입, 각 회의실 외부행사 사용 수수료 등을 합하면 정부 보조 없이 자체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고 사무국장은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이사회에 보고했다. 그러나 회관 부지는 서울신문 소유였고 서울신문이 은행에 땅을 저당하여 둔 상태였기 때문에 건물과 대지를 모두 회관이 소유하자면 상당히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었다. 더구나 1층 로비에 은행이 들어서고 증축하는 4, 5층도 언론과 관련이 없는 기관에 임대한다면 신문회관이 사무실 임대용으로 생긴 것 같은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사무국이 좀 더 연구하도록 일임하였다. 결국 20년이 지나도록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좁은 공간을 여러 단체들이 나누어 쓰다가 제5공화국 시절인 1985년에 오늘의 새로운 프레스센터가 준공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신문회관 사무국장 한사람이 사용하는 2층 1호실은 다른 단체가 쓰는 사무국보다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회관 건립 초기에 공보부의 영향력이 컸고, 아직 입주 단체가 많지 않았던 때의 사무실 배치를 회관이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유지했던 탓이다.



홍종인, 신문연구소 초대 소장 맡아

신문회관에 언론단체가 입주하면서 회관은 언론인들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언론계의 여러 회의가 회관에서 열리고 입주 단체 사무국에 상근하는 인원도 점차 늘어났다. 회관 초대 사무국장 김동극(金東極·1962〜1964년 재직)은 합동통신에서 출발하여 세계통신 전무를 지낸 언론인으로 회관 사무국장을 그만둔 뒤 1964년에는 동화통신 전무, 중앙일보 전무, 동양방송 사장, 경향신문 부사장을 역임했다. 제2대 사무국장 이규일(李圭鎰·1965〜1973년 재직)은 공보처 방송관리국장을 지낸 관료 출신이었다. 제3대 사무국장 고흥상(高興祥·1974〜1980년 재직)은 1941년에 매일신보 기자로 출발하여 서울신문, 태양신문, 연합신문의 사회부장을 거쳐 세계통신의 편집국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회관의 마지막 사무국장이었다.

신문연구소 초대 소장 홍종인은 1925년 시대일보 평양 주재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가 1929년에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가 되었고 광복 후에는편집국장, 주필, 부사장을 지낸 언론계의 원로였다. 산악인으로 대한산악회 회장을 오래 맡았으며 미술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언론계에서는 그를 ‘대기자’, 또는 ‘홍박’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렀다.3) 신문회관 설립 초대 이사이기도 했다. 신문연구소 초대 편집간사는 고명식(高明植·동양통신 외신부 차장)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1967년에는 아이오와 주립대 대학원 신문학과를 수료했다. 고명식의 아버지 고영한(高永翰)은 일제시대 매일신보 평양 지사장이었는데 홍종인과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한동안 연구소에 근무했던 유준상(劉俊相)은 미술평론가였다.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홍종인 소장과의 인연으로 연구소에 들어갔을 것이다. 유재천도 1964년 9월부터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1968년 서울대학교 신문연구소 연구원으로 옮겼다. 그 후 경희대, 서강대, 한림대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상지대 총장이다.

1966년 1월에는 연구소가 사단법인으로 정식 출범하면서 홍종인의 후임 제2대 소장에 오종식(전 국제신보 사장)이 취임했다. 연구소는 국제언론인협회(IPI)로부터 3년 동안 1만 2,500달러의 사업비를 지원받기로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신문평론>은 계간 발행으로 바뀌었다. 이해 가을호(10월 발행)와 겨울호(12월 발행) 2호는 박승훈(건국대 교수)이 간사를 맡아 편집했다.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신문학부를 졸업했고 홍익대, 중앙대, 건국대에서 신문학을 강의하면서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1967년 봄부터는 안광식이 간사를 맡아 신문평론 편집을 담당하다 이화여대 교수가 되었다. 1969년부터 송창기(전 신아일보 기자)가 간사였는데 청주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전직했다.

신문연구소 제3대 소장 이관구는 1970년 2월 취임했다. 1927년 조선일보 정경부장으로 출발하여광복 후에는 서울신문과 경향신문 주필, 서울일일신문 사장, 편집인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연구소는 초대에서 3대까지 언론계를 대표하는 원로들이 소장을 맡았다. 신문연구소는 이들의 후광에 힘입어 초기 사업의 기초를 닦으면서 신문평론 발간, 세미나 개최, 조사 업무 등을 수행했다.

제4대 소장 윤임술(1973년 3월 취임)은 신문연구소의 마지막 소장이면서 1981년에 출범하는 언론연구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신아일보 창간 편집국장이었던 윤임술은 소장 취임 후 편집을 직접 챙기면서 연구소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하였다. 계간이었던 신문평론을 격월간(1973. 5〜1975. 5)으로 발행하다 1975년 6월부터는 월간으로 발행 횟수를 늘렸다. 이 무렵 이병국(대한일보 기자)이 편집기자로 들어왔다가 편집부 차장으로 승진하여 1977년까지 근무했다. 1976년에 연구소에 들어간 정방준(鄭芳俊)은 1981년 신문연구소가 언론연구원으로
확대 개편된 후에는 출판부 차장, 출판부장을 거쳐 출판국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했다. 현재 동아대학교 교수인 이진구(李鎭求)도 1977년부터 잠시 근무하다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황옥률(黃玉律·1923. 6. 1〜1986. 10. 2)은 1948년부터 여러 신문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는데 조선일보 편집부 차장을 지낸 후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975년에 신문연구소에 들어가 편집부장을 맡았다. 언론연구원 시절에는 전문위원을 지냈다.


윤임술 4대 소장, 다양한 사업 펼쳐

신문연구소는 창립 10주년이었던 1974년 5월 27일 이미 포화 상태였던 회관의 사무실 공간을 2개로 확장했다. 연구소 창립 이래 사용했던 209호실에 더하여 인접한 기자협회 사무국이었던 210호실까지 연구소 사무실로 확보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기자협회는 복도 건너편 도서실로 밀려났다. 도서실이었던 203호실은 사무국 겸 편집실, 204호는 회장실 겸 회의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도서실은 기자협회 편집실 겸 회장실이었던 302호실로 올라갔다. 신문연구소를 확장하기 위해 기자협회와 도서실의 배치를 바꾼 것은 윤임술 소장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여러 경로를 동원하여 관철시킨 결과였다<그림2>.




기자협회 입장에서는 3층에 독립된 별도 편집실이 없어지고 2층으로 내려와서 사무국과 편집실이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어 업무상 편리한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옹색하고 불편한 점이 많았다. 당시 기협 회장은 신아일보 기자 김인수였고, 편집실장이었던 필자는 이 같은 변화가 있을 당시 영국 톰슨재단의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4월부터 8월까지 영국에 체류했다. 김인수 회장은 윤 소장이 신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에 수습기자로 입사한 인연 때문에 윤소장의 요구에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웠다. 사무실 확장에 관해 연구소 측은 <신문평론> 1974년 7월 호에 다음과 같이 감사의 뜻을 밝혔다.

연구소는 지난 5월 27일 신문회관 209호와 210호를 병합 확장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배려해 주신 분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한 모든 분들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것이 곧 저희들에 대한 격려와 채찍질로 알고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윤임술 소장은 취임 이래 여러 사업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계간에 머물렀던 <신문평론>을 격월간, 월간으로 발행 간격을 늘렸고, 1975년 12월에는 사료집 ‘한국신문 100년’을 발간하였다. 1976년과 이듬해에 걸쳐 ‘대한매일신보’ 영인본 6책을 출간한데 이어 ‘협성회회보-매일신문’의 영인본을 발행한 것도 큰 업적이었다.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문’을 영인할 때 자료 수집과 영인 실무 작업은 기협 편집실장이었던 필자가 맡아서 완결하였다. 1977년 1월에는 ‘한국신문연감’을 발행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문연감은 1968년 신문협회에서 발행한
이후 중단된 상태였던 것을 윤임술 소장이 속간한 것이다. 연구소는 이처럼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 공간을 더 넓힐 필요도 있었다. 승용차를 소유한 사람은 신문협회 사무국장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이 무렵부터 윤임술 소장도 승용차를 소유하여 회관에는 두 기관의 승용차가 주차했다.

1974년 8월에는 언론인금고가 설립되어 1층에 사무국을 두었다. 사무국장에 조동건(趙東健)이 취임했다. 조선일보·한국일보·민국일보의 편집부국장, 세계일보와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냈고, 신문윤리위원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한 언론인이었다.

1977년 9월에는 관훈클럽도 사무국을 마련했다. 회관 건립 이래 유엔군 신문연락사무실(PLO)이었던 212호실에 사무국이 입주한 것이다. 관훈클럽은 신문회관 발기인 단체로 설립 당초부터 신문회관 이사를 선임했지만 그때까지는 사무국 없이 윤리위원회 캐비닛에 서류를 보관한 상태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창립 20년 만에 재단법인 신영연구기금을 설립하고 독립적인 사무실을 갖게 된 것이다. 초대 사무국장에는 기자협회 편집실장이었던 필자가 임명되었다. 이로써 신문회관의 사무실은 더 이상의 공간을 만들 여유가 없이 정착된 상태였다.

1973년에는 편집기자회가 신문회관 2층 끝 윤리위원회 사무국 옆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책상 하나와 전화를 들여놓고 사무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쪽 계단은 건물을 증축할 경우 사용하기 위한 비상구였는데 일반인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고, 옥상으로 통하는 층계는 도서실에서 열람한 후 날짜가 지난 신문을 제본하여 보관하는 공간이었다. 편집기자회는 그 계단용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사무실로 사용한 것이다.


회관 도서실 들락날락했던 단골들

회관 도서실에서 책과 신문, 잡지를 보거나 원고를 집필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홍종인 선생과 오소백 두 분이 기억에 남는다. 홍종인은 신문연구소 소장에서 물러난 뒤 동화통신 회장을 맡았지만 통신사에서 하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 도서실에 자주 드나들면서 외국 신문을 읽거나 원고를 집필하다 편협 간사 우상재(禹相宰)와 바둑을 두기도 했다. 오소백은 1940년대 말에 기자 생활을 시작하여 1960년대 초까지 10여 개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8개 일간지의 사회부장을 9차례나 맡는 기록을 세운 ‘영원한 사회부장’이었다.4) 그는 늘 보따리에 자료를 싸 들고 다니면서 도서실에 앉아 원고를 썼다. 전북일보 논설위원이었던 김영호는 조용한 자세로 꾸준히 도서실에 출입했다. 전북일보 서울지사에는 그의 책상이 없었는지, 집필의 편의 때문이었는지 늘 도서실에 나와 있었다. 그 후 산업경제신문 논설위원, 한국경제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경제 관련 책도 몇 권 출간했고, 언론계를 떠난 지 한참 뒤인 2004년에는 ‘한국언론의 사회사’(지식산업사) 상·하권을 출간했다.

도서실 단골이었던 오소백은 1967년 7월부터 ‘한국신문연감’의 편찬실장을 맡았다. 기자협회가 신문연감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을 무렵, 편집간사였던 필자가 잠시 임시 여자 직원 두 명과 초보적인 기초 작업에 착수하던 때에 연감 편찬 업무가 신문협회로 이관되었다. 신문협회는 각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기협간부, 신문연구소 간부 등 13명의 편찬위원회를 두고 오소백의 지휘하에 실무 팀을 구성하여 신문협회 회의실인 206호에서 편찬 업무를 진행했다. 이듬해 4월 1,000여 쪽 분량의 연감을 출간했다.

오소백은 연감 편찬이 끝난 뒤 1968년 6월부터 신문윤리위원회 제소부장에 취임하여 신문회관에 상근하게 되었다. 신문윤리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은 김용구(코리아타임스)였고, 1963년부터 엄기형(경향신문 부국장 겸 정치부장, 논설위원)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엄기형과 오소백은 1970년 1월 윤리위원회에 사표를 내고 2월 창간 예정이었던 태양신문 편집국장과 부국장으로 임명되어 윤리위원회를 떠났다. 하지만 무슨 사정이었는지 태양신문은 창간되지 않았다. 엄기형, 오소백 두 사람이 동시에 물러난 뒤 심의실장 이한용은 사무국장이 되고, 심의실장에는 정만교(대구 매일신문 주필)가 새로 들어왔다.

오소백은 윤리위원회에 근무 중이던 1968년 8월 10일에는 신문회관 입주 언론단체 사무국 직원들이 결성한 친목단체 ‘신우회’(新友會) 회장에 선출되었다. 신문회관 입주 언론단체 직원들은 소속이 서로 달라도 같은 직장 동료들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좁은 공간을 나누어 쓰는 몇 명 안 되는 적은 인원이 언론계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유대감 때문이었다. 오소백은 윤리위원회를 그만둔 뒤에 신문회관 도서실에서 원고 쓰는 생활을 하다가 1970년 9월 창간된 독서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오소백은 한 직장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문회관은 그가 자유롭게 활동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1974년에 다시 신문회관으로 돌아와 통신협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통신협회는 1957년 7월에 창립되었지만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양대 통신이 신문협회로 소속을 바꾸었기 때문에 종합통신사를 제외한 군소 통신사 단체인 시사통신, 경제통신, 산업통신, 무역통신의 모임으로 축소된 상태였고 특별한 사업도 없었다. 통신협회는 신문회관 3층 좁은 공간에 사무국을 마련했는데, 국장 오소백과 여자 직원 한 사람이 전체 인원이었다.5) 1980년의 언론 통폐합 때 통신협회는 그나마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통신협회 사무국장 시절인 1977년 4월 오소백은 퇴직 언론인들의 친목 모임 ‘4·7구락부’의 창립을 주도했다. 현재 ‘대한언론인회’로 명칭이 바뀐 단체가 프레스센터에서 탄생했다.6)


<주>
1) 정진석, 협회 50년 역사와 새로운 도전, 신문협회보, 2007.10.15: ‘신문협회50년사’, 한국신문협회, 2008, pp.259-260.
2) ‘신문협회50년사’, 한국신문협회, 2008, pp.129-134.
3) 홍종인에 관해서는 ‘대기자 홍박’(LG상남언론재단, 1999) 참고.
4) 정진석, 현장을 역사로…9번의 사회부장, ‘영원한 사회부장 오소백’,한국홍보연구소, 2009.
5) 오소백에 관해서는 서울언론인클럽 편, ‘영원한 사회부장 오소백’ (한국홍보연구소, 2009) 참고.
6) 오소백, 전직 언론인과 4·7구락부, 기자협회보, 1977.7.1.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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