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회관 반세기- 방명록 발행과 신문평론 창간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


신문회관은 1964년 7월 ‘전국언론인방명록’을 발행했다. 개별 신문사가 ‘사원 명부’를 발행한 것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지만, 전국을 망라한 언론인 명단의 발행은 처음이었다. 언론인방명록은 1981년부터는 명칭이 ‘전국언론인명록’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다. 신문회관이 시작한 사업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최초로 전국 언론인 명단 발행

1963년 말 방명록을 처음 발행했다는 설도 있으나, 남아 있는 실물이 없고 당시 이사회 회의록에도 발행 사실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발행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현존하는 방명록은 1964년 7월 발행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63년 말 방명록을 처음 발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1년이 지나지 않은 다음 해 7월에 또 한번 발행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전에도 여러 신문사 소속 언론인 명단을 묶은 자료가 없지는 않았다. 광복 후에 나온 여러 신문 소속 언론인 자료로는 단행본에 부록 형식으로 수록된 자료가 있었다.

① 슬포산인, 현역 기자 100인 평, ‘일선 기자의 고백’, 모던출판사, 1948. 6.
② 나절로, 신문인 100인 촌평, ‘신천지’, 1948. 7.
③ 오소백, 신문기자 150인 평, ‘신문기자가 되려면’, 세문사, 1953. 3.
④ 대한신문연감, 신문사 역간부(役幹部) 편, ‘대한신문연감’, 1955. 12.

그러나 이전 자료들은 개인이 주관적으로 선별하여 저서에 수록한 명단이거나 민간 출판사가 연감 편찬용으로 입수한 자료였다는 한계가 있었다. 정부의 ‘관보’에 언론인의 명단과 생년월일, 최종 학력을 게재한 일도 있었다. 1967년 12월 11일 자 관보(제4820호)와 1968년 7월 23일 자(제5006호)에 실은 명단이 있다.


관보에 언론인 생년월일, 주소 게재도

공보부는 언론인의 명단을 관보에 게재하면서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의거하여 등록된 정기간행물(언론기관)의 업무 및 기자 명단을 휘보(彙報)한다고 밝혔는데, 정기간행물 등록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종사자 명단을 관보에 게재하라는규정은 없었다. 사이비 기자의 발호를 막기 위한 자료로 언론인 명단을 관보에 게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 12월 11일 자 관보는 사별, 소속 부서, 직위, 생년월일, 최종 학력을 기재하였고, 1968년에는 개인별 주소까지 추가하였다. 관보의 언론인 명단 게재는 두 번으로 그쳤다.

신문회관의 언론인방명록에는 전국 일간신문사와 통신사, 외신기자, 언론단체 종사자와 방송국·주간신문 간부들이 수록되었다. 명단에 수록된 사람들은 공인된 언론인으로 볼 수 있었다. 언론사 사장에서 말단 수습기자까지 부서별, 서열 순으로 기재된 국내 최초의 전국언론인인명록이었다. 1964년 8월 15일 처음 발행된 방명록에는 같은 해 7월 현재의 현황이 실렸는데 크기는 10.4×14.5cm 82쪽으로 작은 수첩 형태였다. 이듬해 11월 두 번째로 발행된 방명록에는 10월 현황이 수록되었다. 크기를 약간 줄이고 페이지 수를 늘린 9.5×13.6cm 108쪽 분량이었다.

초기의 발행 간격은 일정하지 않았다. 1964년에는 7월, 1965년에는 10월, 1966년부터는 해마다 대개 11월 또는 12월 현재의 명단이 수록되었다. 언론인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분량도 늘어나 거의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는 판형도 커지고 무려 500여 쪽이 넘는 대형 인명록이 발행되고 있다.

명칭도 약간 달라졌다. 1964년부터 1979년까지 ‘전국언론인방명록’으로 발행되다가 1981년부터 ‘전국언론인명록’으로 바뀌었다. 1980년에는 언론 통폐합의 여파로 방명록이 발행되지 못했다. 1960년대이후의 인명록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하면 어느 언론사에 소속된 언론인이 어떤 부서에서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하였고, 어느 연도에 승진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그만두었는지 등 전국 모든 언론인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신문평론 창간 후의 언론파동

신문연구소는 1964년 4월 ‘신문평론’을 창간하면서 정식으로 발족하였음은 앞에서 잠시 살펴보았다. 신문평론은 1976년 11월 지령 72호부터는 제호를 <신문과방송>으로 바꾸어 2004년 4월에는 지령400호를 발행하였고, 내년에 500호 발행을 앞두고 있다. 언론계를 대표하는 전문지의 위치를 확고히 구축한 것이다.

신문연구소는 한국언론연구원을 거쳐 한국언론재단이 되었다가 한국언론진흥재단으로 확대 개편되는 동안 법적으로는 두 차례나 발전적으로 해산되고 새로 출범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신문평론은 지령을 이어 오고 있다. 신문회관이 발행하기 시작한 ‘전국언론인방명록’(현재는 ‘전국언론인명록’)과 ‘신문평론’(<신문과방송>)은 반세기 전에 언론 발전과 언론인의 연구, 복지를 위해 출범했던 신문회관과 신문연구소의 역사를 언론진흥재단이 계승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실증적 존재이다.

신문평론은 언론계의 토론과 연구 발표의 광장이었고, 언론계의 소식을 알리는 정보의 전달자이기도 하였다. 외국 언론계의 이론을 소개하는 전문지 역할도 병행하면서 언론 발전을 견인하고 있다. 신문평론은 “신문계 공동의 연구 표현 기관이 될 것과 아울러 신문계의 모든 인사들이 유쾌히 참가할 수 있는 토론의 광장”이 될 것을 창간사에서 천명했다.

창간 당시의 편집위원은 김규환, 박권상, 조세형, 천관우, 임근수, 송건호, 김용구, 최석채였다.

창간호는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던 영국인 배설(裴說·Ernest Thomas Bethell)과 한말 언론에 관한 글들을 머리에 실었다. 편집인협회가 주도하여 언론계의 성금을 거두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있는 배설의 묘비를 새로 세웠던 때에 신문평론이 창간되었기 때문에 이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이다.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5월 건립된 묘비는 일인들이 그 비문을 깎아 없앤 상태로 세월이 흘렀는데 편집인협회가 원래의 묘비 옆에 비문을 새겨 새 묘비를 세웠다.

신문평론 초기의 내용은 주로 언론 현실 또는 제작 실무 관련 주제를 다루었다. 창간 직후 정계는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하여 데모 학생들에게 영장을 발부하라고 압력을 행사한 사건(5월 21일)과 군인들의 동아일보 침입(6월 5일)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격렬한 가두데모 끝에 파출소를 점거하고 파괴하는 극단적인 사태에 이르자 정부는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른바 6·3 사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6·3 사태의 원인이 “일부 정치인의 무궤도한 언동,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
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 있었다고 말하고 언론 규제 입법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정부는 신문윤리위원회법 제정 준비에 착수하였다.


정부의 언론 규제법 제정 움직임에 대해 언론계는 크게 반발하였다. 한국신문발행인협회와 통신협회·편집인협회·IPI한국위원회 등 언론단체 대표들은 ‘언론규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 27일 정부의 언론 규제 입법에 대응하여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기능 강화 방안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여당 의원들은 8월 23일 야당 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단독으로 ‘언론윤리법안’을 통과시켰다.


언론 규제 반대 투쟁 속 기자협회 탄생

이에 대해 5개 언론단체는 이튿날 긴급 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언론규제법철폐투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고, 3부 각 부처 출입기자단이 일제히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반대한다는 강력한 의사 표시의 방법으로 4일 하루 24시간 취재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입법 방침을 바꾸지 않았고 8월 5일 법률 제1652호로 공포하는 강경한 자세로 맞섰다.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 투쟁의 와중에서 일선 기자들은 8월 17일 숙원이던 한국기자협회를 창립하였다.

언론과 정부가 극도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발행된 ‘신문평론’ 제6호(9월 호)는 ‘언론출판의 자유는 죽느냐? 사느냐? ― 정부의 언론윤리위원회법의 강행과 악법 폐기투쟁의 제 문제’를 권두에 놓고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반대하는 언론계의 목소리를 담은 다양한 기사들을 실었다. 박정희 정권과 언론의 대결은 동양통신 사장이면서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국회 재경위원장이었던 김성곤(金成坤)의 중재로 9월 8일 언론계 대표들이 유성에 머물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사태 수습을 건의한 끝에 윤리위원회법의 시행 보류를 발표하게 되는 것으로 마
무리된다. 이렇게 38일간의 언론파동은 일단 수습되었다.

신문평론 제7호(10월 호)는 ‘신문윤리강령과 실천 요강의 재음미’(천관우), ‘유성회담의 자초지종’(최석채), ‘신문윤리위원회 운영 강화의 이론과 실제’(김규환)를 비롯하여 편집국장과 일선 기자들의 ‘자율규제 강화’에 대한 발언을 실어서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을 저지하는 대안으로 언론의 자율규제 문제를 다루었다. 신문평론은 당시의 언론 상황을 반영하면서 언론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노력한 것이다.

‘신문평론’은 초대 소장 홍종인이 취임한 때로부터 이듬해 12월까지 통권 16호가 발행되었다. 이 기간은 신문연구소가 법인체로 구성되기 전이었는데 1966년 초 사단법인체로 설립되어 제2대 소장에 오종식이 취임한 이후에는 신문평론을 계간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1973년 5월(제42호)에 제4대 소장 윤임술이 취임하여 계간으로 발행되던 잡지를 일단 격월간으로 바꾸었다가 2년 뒤인 1975년 6월(제55호)부터는 월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신문평론이 월간으로 정착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윤임술은 취임 직후부터 신문평론에 시사성을 가미하고 편집 내용을 다양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제호의 글자체를 바꾸고 내용 면에서도 ‘언론가신문’(言論街新聞)란을 신설하여 언론계 뉴스를 다루는 동시에 보도 사진을 게재하는 ‘뉴스의 눈’을 만들어 시사성과 함께 지면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의욕을 보였다. 1976년 11월(제72호)부터는 제호를 <신문과방송>으로 바꾸어 인쇄매체 중심이었던 편집 내용에 전파매체를 균형있게 다룰 수 있도록 하였다. 전파매체의 영향이 점차로 증대해 가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1977년부터는 ‘한국신문연감’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듬해부터는 이 연감의 제호도 ‘한국신문방송연감’으로 바꾸었다.

1981년 6월 22일에는 한국신문연구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새로운 사단법인체인 한국언론연구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제5공화국 성립과 더불어 우리나라 언론의 구조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였다. 새로 창립된 언론연구원은 독립된 기구로 출판국(처음에는 출판부)을 두고 <신문과방송>, <신문방송연감> 발행을 계승하여 편집 내용을 더 짜임새 있게 꾸려 나가는 한편 새로운 출판 사업을 벌였다. 1984년 7월에는 영문판연감 ‘Korean Press’를 창간하였고 1986년 12월에는 언론연구원 총서 제1권 ‘세계의 방송’과 제2권 ‘세계의 신문’을 발간하였다. 언론연구원 총서는 그 후 언론 각 분야에 걸친 단행본을 22권까지 발행하였다. 연구원 총서 제1권부터 제4권까지는 1989년 2월 한국일보가 시상하는 한국출판문화상 제작부문상을 수상하였다. 신문평론 창간 이후의 발행 상황은 <표>와 같다.



1965년 유공 언론인 5명 초상화 걸어

신문회관 및 언론인과 관련해 기록할 일이 있다. 편집인협회가 추진하였던 유공 언론인 현창 사업이다.편집인협회는 ‘유공 언론인’ 다섯 명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1965년 4월 신문회관 3층 강당에 봉안했다. 편협은 한 해 전인 1964년 4월 28일 제3차 운영위원회에서 언론 발전에 공이 많은 언론인과 순직 언론인 가운데 엄선하여 초상화와 업적을 신문회관에 게시하기로 하였다. 유공언론인기념사업 준비위원으로 강영수, 곽복산, 김종규, 천관우, 최석채 5명을 위촉하고 5월 7일 16명의 예비 후보를 선정하였다. 이상재, 서재필, 장지연, 양기탁, 배설(영국인), 장덕준, 최병우, 박은식, 유근, 신채호, 남궁억, 송진우, 김성수, 이종일, 장도빈, 한기악이 선정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약력과 업적은 편협 박홍서 총무(사무국장)가 곽복산과 최준 두 신문학 교수의 의견을 참작하여 12월에 조사를 마쳤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12월 30일과 이듬해 1월 9일 열린 준비위원회는 신중하게 검토한 결과 서재필, 장지연, 양기탁 세 유공 언론인과 장덕준, 최병우 두 순직 언론인을 선정하여 화가들에게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박득순(朴得錞-서재필, 양기탁, 최병우)이세 언론인의 초상화를 그렸고, 손응성(孫應星-장지연), 김인승(金仁承-장덕준)은 각각 한 사람씩을 맡았다.

편협은 사상계사가 제정한 1964년도 독립문화상 ‘월남(月南)문화상’ 수상 부상 6만 7,000원에 경향신문, 대한일보, 대한공론(코리아헤럴드), 동양통신,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 합동통신 등 10개사가 각각 1만 원씩 출연한 돈, 신문회관의 보조금 일부를 보태어 사업을 완결하였다. 다섯 유공 언론인의 초상화는 이리하여 1965년 4월 신문회관 강당 양편에 걸렸다.

그러나 1983년에 신문회관을 철거한 후 새 프레스센터가 준공된 후에는 어떤 곳에도 걸려 있지 않았다. 1987년에 필자가 편협의 요청으로 ‘신문 100년 인물사전’을 편찬하면서 신문회관에 걸려 있던 유공 언론인 다섯 사람의 초상화가 어디에 있는지 소재를 수소문해 프레스센터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다섯 언론인의 초상화를 찾아내 촬영한 사진을 ‘신문 100년 인물사전’ 머리에 화보로 수록했다. 창고에서 꺼낸 초상화는 그 후 프레스센터 18층 기자회견장 벽에 걸려 있었는데, 언제인지 19층 기자클럽에 옮겨져 걸려 있다. 1964년 유공 언론인 초상화를 신문회관 강당에 봉안할 때 후배 언론인들은 이들을 언론인들의 사표로 삼자는 뜻을 담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습은 단지 장식용으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 주로 식당, 커피숍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기자클럽에 유공 언론인의 초상화를 게시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다. 반세기 전에 언론계가 정성을 모아 제작한 초상화를 무심한 마음으로 몇 차례 옮기면서 게시하는 동안 보관상 문제가 있었던지, 초상화의 색깔도 변질되어 선명했던 모습이 상당히 퇴색되었다.

“한국의 민주 언론을 창설하고, 필봉을 들어 제국 일본의 침략을 방지하는 데 생명을 걸고 투쟁한 대표적 언론 선구자”들의 업적을 기리고 언론인들의 사표로 삼겠다는 취지를 살리며, 신문회관 시절 대강당에 걸어 언론자유 수호를 위한 집회를 지켜보던 위치에 걸맞은 오늘의 장소는 국제회의장이 아닐까. 편협이 1차 사업으로 선정한 인물 외에도 더 많은 언론인이 있다. 박은식, 신채호, 남궁억, 영국인 배설과 같은 인물은 1차 예선에 올랐던 분들이다. 이들은 추가로 선정될 수 있는 유공자들이다. 안재홍, 천관우 같은 인물도 마땅히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언론자유 수호 운동과 신문회관

신문회관은 준공 이후 언론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언론단체들의 사무국이 들어서고, 언론계의 크고 작은 모임이 회관에서 열렸다. 1964년의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때 언론인들은 신문회관에 모여 악법 반대 투쟁을 벌였고, 젊은 일선 기자들이 한국기자협회를 창립하던 장소도 신문회관 강당이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언론파동)은 군사정부에서 민정으로 넘어온 직후에 일어났다. 언론 통제를 위한 권력의 법 제정을 반대하여 언론계가 벌인 전면전 성격의 대립이었고 언론과 제3공화국의 갈등이었다. 언론파동은 7월 18일 정부와 공화당이 언론윤리위원회의 법제화에 합의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에 대해 언론 5개 단체가 구성한 ‘언론윤리위원회법철폐 투쟁위원회’(위원장 유봉영·조선일보 주필)는 8월 10일 신문회관 3층 강당에서 대규모 반대집회를 열었다. 500여 명의 언론인들이 모인 전국언론인대회는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를 요구하는 동
시에 언론윤리위원회의 발족과 구성에 어떤 협력도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대회는 편협회장 고재욱이 낭독한 선언문, 기자단협의회 대표 김영수의 결의문, 발행인협회 대표 김남중의 건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뒤 유광렬(한국일보 논설위원), 홍종인(신문연구소 소장)의 악법 규탄 강연을 들었다.1)


기자협회 초대 회장에 이강현 선출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 투쟁의 와중에 한국기자협회도 창립되었다. 기자들은 오래전부터 기자 단체의 창립을 시도해 왔으나 여러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했었는데,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를 위해 각 기자단이 협의회 형식으로 연락을 취하다가 8월 17일 오후 2시 신문회관 3층 강당에서 전국 일선 기자의 모임인 한국기자협회를 창립한 것이다. 초대 회장에 이강현(동아일보 지방부 차장)을 선출하였다. 1차 당면과제는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 투쟁이었다. 장기적인 목표로 기자들의 자질 향상과 권익 옹호를 결의했다. 기자협회는 출범 후 8월 23일 신문회관 210호 실에 사무국을 차리고 활동을 시작했다.

1975년의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 집단해직 사태때 신문회관이 언론자유 수호 운동의 광장이 되었던 사실은 다음 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언론파동에 관해서는 정진석, ‘광복 50년, 언론 50년 / 광복언론 50년사 3,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신문과방송>, 1995년 3월 호 참고.

<바로잡습니다> 지난 호 92쪽 9번째 줄 “도서실이었던 203호실은 사무국 겸 편집실, 204호는 회장실 겸 회의실로 사용하도록 되었다”는 부분은 “도서실이었던 204호실은 사무국 겸 편집실, 열람실이었던 203호는 회장실 겸 회의실로 사용하도록 되었다”로 바로잡습니다. <그림2> 배치도도 “204호실 사무국 겸 편집실, 203호실 기협회장실”로 바로잡습니다






Posted by in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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